한참을 망설이다가 늦게서야 내 정원에 들인 꽃이 수국이다. 여름을 대표하는 꽃이지만, 타는 듯한 새크라멘토의 여름에 잘 키울 자신이 없어서였다. 그러나 늘 마음 한쪽에 자리한 수국에 대한 갈망이 용기를 내게 했다. 습자지 위에 번진 잉크처럼 짙은 보라색, 은은한 하늘색, 맑은 흰색이 경계를 잊고, 서로 스며든 몽실몽실한 꽃송이. 나와 수국의 첫 만남이었다.
수국(Hydrangea)은 그리스어 hydor(물) + angeion (그릇, 단지)에서 유래한 말로, 물을 담는 그릇이라는 뜻이 있다. 아마도 꽃송이 모양이 고대 물 주전자나 단지를 닮아 붙여진 이름이지 싶다. 이름처럼 물을 좋아한다. 또 여름꽃이지만 그늘에서 잘 자라는 식물이다. 바꿔 말하면, 물기 적고 까슬까슬한 이곳의 여름엔 기르기 까다로운 꽃이라는 뜻이다.
처음엔 그늘을 쫓아, 하루에도 몇 번씩 화분을 이리저리 옮겨 다녔다. 그 정성 때문이었을까? 사 올 땐 아이 주먹만 했던 수국이 얼마 지나지 않아, 꽃대가 휘어질 정도의 큰 꽃송이로 내게 보답해 주었다. 행복했다. 또 이른 아침, 스프링클러 물방울을 맞아 고개 숙인 꽃송이들의 그 겸손한 아침 인사도 좋았다. 꽃잎 하나하나는 여리고 얇지만, 그 작은 꽃잎들이 모여 만든 꽉 찬 풍성함은 마치 무수한 별들이 함께 만들어 낸 은하수 같았다. 긴 망설임 끝에 들여 논 수국은 잠깐동안이라도 여름 더위를 잊을 수 있게 했고, 하루를 웃으며 시작할 수 있게 해 주었다.
그랬는데, 딱 반나절이었다. 해가 높지도 않은, 그저 늦은 오후 몇 시간 동안 햇빛에 두고 깜빡했는데, 꽃잎은 갈색으로 타들었고, 짙은 초록빛으로 어느 잎보다 강한 생명력을 보이던 잎사귀마저 힘없이 처져 버렸다. 햇빛도 이곳의 복사열과 열풍도 생각보다 훨씬 혹독했다.
그렇다고 포기할 수는 없었다. 우선 수국이 편히 숨 쉴 수 있는 그늘을 가꾸기 시작했다. 매년 가지를 솎아주던 단풍나무는 단정하게 끝만 다듬어 그늘을 만들었고, 땅으로만 펴서 키우던 재스민은 지지대를 세워서 태양을 막을 벽을 만들었다. 또 소나무 밑에 솔방울과 우거진 잡초를 정리했더니 큰 수국 화분 두세 개는 충분할 그늘 자리도 생겼다.
태양이 강할수록 그늘도 깊어진다 했던가. 키 큰 나무와 빽빽한 나뭇잎들이 만들어낸 진한 그늘 아래, 숨을 잃은 듯 축 처진 수국이 다시 살아났다. 그게 고마워 매년 흙을 고르고, 거름을 더하며, 수국이 가장 편안해할 환경을 찾아갔다. 지고 난 꽃대를 잘라주면 늦가을까지 계속 꽃을 피우는 “앤드리스 섬머”, 라임빛이 감도는 연녹색으로 시작해, 점차 크림, 핑크빛으로 변하는 “라임라이트”, 촘촘한 분홍색이 고운 “핑크뷰티” 같은 새 품종도 들였다. 좀 더 선명하고, 고운 색을 보고 싶어 흙도 돌보았다. 토양을 산성으로 만들어, 깊고 차분한 푸름을 더 뚜렷하게 했고, 은근하고 따뜻한 분홍 수국을 위해선 알칼리성 땅도 만들어 주었다. 그랬더니 수국은 어느새 나의 여름 정원에 당당한 주인공이 되었다.
여름내내 정원을 사로 잡았던 수국도 찬바람과 함께 화려한 빛을 잃는다. 하지만 난 겨울까지 꽃대를 자르지 않는다. 꽃잎 가장자리에 세월이 내려앉듯 갈색으로 시든 수국에서만 느껴지는 또 다른 아름다움을 즐길 수 있기 때문이다. 빛바랜 사진에서 꺼내 볼 수 있는 추억처럼, 시든 수국은 오래도록 마음에 남는 색과 향기를 전한다.
빛바랜 수국이 다른 빛깔로 또다른 아름다움을 전하는 것처럼 사람도 나이 들수록 젊은 날의 화려함은 옅어지지만, 웃음과 눈물, 기다림과 포기, 사랑과 이별 같은 것들이 세월 속에 스며들어 반짝이던 젊은 날에는 느낄 수 없는 독특하고 담백한 삶을 경험할 수 있게 해준다. 색이 바래도 꽃은 여전히 꽃이고, 빛나는 순간만이 아름다움의 전부가 아니다. 나이든 얼굴에 더해진 주름과 마음에 남은 흔적들 역시 삶을 더 귀하게 할 것이다.
내 세상에도 조심스레 가을이 오고 있다. 그 계절을 그 어느 때보다 더 멋지게 살아 내고 싶다.
우리의 일생엔 헛된 계절은 없다.
(미주 현대뉴스에 게재했던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