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과 향기가 있는 언덕

by 박명혜


햇살은 여전히 뜨겁지만, 바람결에선 분명 다른 계절의 향기가 느껴진다. 해는 짧아지고, 들판의 그림자는 길어졌다. 세상은 조금씩 가을 쪽으로 기울고 있다. 이맘때면 나는, 조금 이르다 싶게 애플 힐(Apple hill)을 찾는다. 가장 좋은 시기를 기다렸다가는 주차할 자리만 찾다 오거나, 사람들 구경만 하다 돌아오기 십상이기 때문이다. 물론 사람이 붐비는 때는 볼거리도, 먹거리도 더 풍성하다. 하지만 이슬에 젖은 과수원 길을 걷고, 아직 사람 손이 덜 닿아 나무마다 탐스럽게 매달린 사과를 볼 수 있는 고요함이 나는 더 좋다.


애플힐이 자리한 카미노(Camino, CA) 지역은 원래 배 산지였다. 1950년대 말만 해도 해마다 5만 톤이 넘는 배를 수확했다 한다. 하지만 병충해로 순식간에 생산량이 줄어들었고, 그 위기를 대신한 것이 바로 사과였다. 다행히 해발 3천 피트 고도의 이 땅은 오래된 용암층 토양과 큰 일교차 덕분에 사과의 당도를 살리기에 그만이었고, 이런 자연의 선물에 농부들의 땀과 지역 홍보 마케팅까지 보태져 오늘날 모두가 웃고, 즐기는 애플힐 축제가 탄생한 것이다.


나의 어린 시절에도 과수원 나들이의 추억이 있다. 여덟 살 무렵부터 몇 해 동안, 사과 과수원을 걸어서 산책할 수 있는 동네에 살았다. 특별한 계획도 필요하지 않았다. 그저 걷기 좋은 날이면 우리 가족은 빵과 차를 챙겨 나섰고, 그 길은 언제나 소풍처럼 설레었다. 운이 좋으면 과수원 안으로 들어오라 초대도 받았다. 그곳에서 봄이면 다른 꽃들보다 크고 단아한 사과꽃을 마주할 수 있었다. 봉오리일 때는 연분홍빛이지만 활짝 피면 눈부시게 하얗고, 꽃잎 끝마다 스며있는 은은한 분홍빛이 벚꽃이나 복사꽃의 화려함과는 다른, 오래 바라볼수록 마음을 맑게 하는 고요함을 품고 있다. 가을엔 가지마다 주렁주렁 매달린 열매 사이를 걸었다. 손 닿는 곳의 사과를 직접 따서 맛볼 수도 있었는데, 한입 베어 물면 퍼지던 사과의 달큰한 향. 아마도 이런 기억들이 나를 해마다 애플 힐로 이끌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Bill’s Apples / Felice’s Dolls”. 이곳은 걷다 보면 마음속 오래된 추억이 비눗방울처럼 피어올라, 어린 시절 과수원 나들이로 나를 데려간다. 봄이면 하얀 사과꽃이 부드럽게 피어나고, 그 사이로 튤립과 팬지가 화사하게 핀다. 그리고 가을엔 빨간 사과 조형물과 함께 국화꽃이 농장을 물들이는 꽃이 있는 과수원이다.


가을 축제의 흥겨움을 만끽하고 싶다면 아무래도 ”High Hill Ranch”가 제격이지 싶다. 애플 힐에서 가장 넓은 155 에이커의 땅 위에 펼쳐진 이곳은 사과, 사과파이, 도넛 말고도 주말이면 열리는 수공예품 마켓은 이곳만의 또 다른 매력이다.


언덕 아래 고즈넉하게 자리한 “Larsen’s Apple Barn.” 이곳은 애플 힐에서 가장 오래된 농장 가운데 하나로, 1860년대 덴마크 이민자였던 라센 가문이 처음 뿌리내린 후 지금까지 이어져 온 곳이다. 그래서일까? 소박한 베이크 샵, 그 문을 열면 퍼져 나오는 시나몬향 나는 사과파이는 세대를 이어온 그들 전통의 향기까지 더해져 색다른 달콤함이 느껴진다. 농장 뒤편으로 이어진 작은 길을 따라 걸으면 사과나무와 단풍나무가 어우러진 정원이 펼쳐진다. 초가을에는 푸른 잎과 빨갛게 익은 사과가, 늦가을에는 노랗고 붉게 물든 단풍과 그 잎들이 바람에 떨어져 덮인 농장을 볼 수 있는데, 이 풍경은 오직 시간만이 차곡차곡 빚어낼 수 있는 것이다.


진한 가을을 느끼고 싶을 때, 마음에 고요를 담고 싶을 때면 나는 “Smokey Ridge Ranch”로 향한다. 이름 그대로, 아침이면 안개가 낮은 언덕을 감싸고, 저녁이면 산 너머에서 내려앉는 연무가 농장을 부드럽게 덮는다. 이곳에는 사과뿐 아니라 포도와 올리브 나무도 함께 자라는데, 그 열매로 빚은 와인과 잼, 올리브 오일에는 안개로 신비로운 이 땅의 기억과 시간이 고스란히 스며 있다. 나무 사이로 스며드는 바람, 발아래 바삭하게 부서지는 낙엽, 사과를 따는 손길마저 소곤거리듯 고요해지는 곳이다.


애플 힐에서 나는 가을의 여러 얼굴을 만난다.

들뜬 축제의 얼굴, 세월이 묻어나는 전통의 얼굴, 그리고 아무 말 없이 자연을 닮아가는 고요한 얼굴까지.

햇살과 바람, 사과와 단풍, 그리고 어린 시절의 나를 만날 수 있는 곳.


이 모든 것이 애플힐의 가을에 있다.



이 글은 미주 현대뉴스에 게재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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