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 위에 가을이 있다.

by 박명혜


차창 너머로 가을이 밀려온다. 스스로 단풍을 즐기고자 떠난 길인데도 쏟아질 듯 밀려드는 가을에 당최 정신을 차릴 수가 없다. 잠시 멈춰 둘러보고 싶은 곳도 많았다. 하지만 쨍한 해가 있을 때 도착해야 그곳의 아름다움을 모두 즐길 수 있기에 유혹을 떨치고 그곳, 호프 밸리(Hope Valley)로 내리 달렸다.


타호로 들어서기 전에 89번 도로를 타고 20분쯤 남쪽으로 달리다 보면 만나는 호프밸리. 오래전 이곳은 워쇼(Washoe) 인디언들의 땅이었다. 그들은 눈 덮인 산길을 스노우슈(snowshoe)를 신고 건너며, 서쪽에서 연어를 잡아, 다시 동쪽으로 돌아오곤 했는데 이런 그들의 발자국이 이 계곡에 첫 이야기로 남아있다. ‘호프 밸리(Hope Valley)’라는 이름은 1848년, 멕시코 전쟁이 끝난 뒤 귀향하던 모르몬 대대(Mormon Battalion)에서 비롯되었다고 한다. 전쟁에 지친 그들이 눈 덮인 혹독한 시에라를 넘어 이곳에 이르렀을 때, 처음으로 따스한 햇살을 맞고 비로소 희망을 되찾았다하여 그때부터 이곳을 ‘호프 밸리’라 불렀다 한다.


하이웨이 50에서 89번으로 갈라지는 길까진 높은 산으로 둘러싸여 답답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시에라를 가로지르면 등장하는 파란 가을 하늘과, 금빛 아스펜(Aspen)으로 펼쳐지는 탁 트인 호프 밸리의 경치는 상쾌한 해방감마저 느끼게 한다.


군락을 이룬 아스펜이 햇살에 반짝이는 모습은 투명하고 순수하게 빛나는 황금빛이다. 그래서 때론 붉은 단풍보다 아스펜(Aspen)의 노란빛이 더 화려하단 생각이 든다. 잎자루가 납작해 작은 바람에도 잎이 쉽게 흔들려 ‘속삭이는 나무(whispering tree)’라 불리기도 하는데, 바람과 함께 숨 쉬는 숲의 심장처럼, 잎 하나하나가 반짝이며 제 존재를 드러낸다. 바람이 가만 지날 때면 그들은 금빛 물결이 되어 일렁이고, 세찬 바람에는 우수수 잎이 떨구어 날리는데, 마치 수십 마리의 황금 나비가 날아오르는 것만 같다. 또 잎이 서로 부딪치며 내는 “차르르, 차르르” 소리는 이 계절에만 들을 수 있는 가을의 노래다. 산불 뒤에도 뿌리에서 다시 돋아나 가장 먼저 숲을 재건하는 강한 생명력은 바사삭 말라 보이는 시에라 들판조차 건강하게 보이게 한다.

가을은 길 위에서 가장 선명하게 다가온다.

호프 밸리의 황금빛을 뒤로하고 395번 도로를 따라 남쪽으로 달리면, 길 양옆으로는 메마른 사막과 산이 번갈아 펼쳐지고, 한때 바다였을 법한 대지는 푸석하다. 하지만 그사이를 채우는 마른 풀 내음과 누런 가을빛, 그리고 오아시스처럼 나타나 황금의 강을 이루며 흐르는 아스펜 숲은 가을 풍경을 절정으로 끌어올린다. 또 산자락에 깃든 햇살은 유리 조각처럼 반짝이고, 바람은 그 빛을 한 줌씩 흩뿌려 더 고운 가을 길을 만든다.


리 바이닝(Lee Vining)을 지나, 작은 길로 접어들면 만나는 곳, June Lake loop.

빙하에 의해 말굽 모양으로 깎인 호수를 따라 도는 14 마일 드라이브. 약 11,000 피트 높이의 카슨 피크 협곡을 따라 이어지는 이 길로 들어서면, 세상은 갑자기 낮은 목소리로 속삭이기 시작한다.

바람이 불어도 요란하지 않고, 나뭇잎이 떨어져도 소란스럽지 않다. 오래 쌓인 낙엽 위로 새로 내려앉은 잎들이 겹겹이 쌓이며, 부드러운 이불처럼 땅을 덮고 있기 때문일까?

“흠”하고 깊이 들여 마시는 공기엔 비에 젖었다가 마른 흙냄새, 오래된 나무껍질의 진한 향, 그리고 막 떨어진 잎의 풋풋한 향이 섞여 묘하게 마음을 가라앉히고, 따뜻하게 한다.

바람 한 점 없는 호수엔 산자락의 금빛 아스펜이 고요히 비치고, 그 사이로 구름 한 조각. 발끝으로 잔잔한 물결을 만들면 나뭇잎은 어느새 금빛 가루로 호수 위에 흩어진다.

보이는 것보다 들리는 것이, 들리는 것보다 느껴지는 것이 많아, June Lake의 가을은 깊다.


돌아오는 길, 공기는 한나절만큼 더 차가워졌다.

바람에 낙엽들은 하나둘 제 그림자를 놓아주듯 떨어지고, 바스락 소리로 작별 인사를 한다. 길가 풀잎 끝에는 서늘한 기운이 내려앉고, 온기가 빠져나간 하늘빛도 차갑다. 그래도 이토록 마음이 오래 머무는 계절이 또 있을까 싶다.


바람, 햇살, 낙엽, 풀 내음.

가을은 길 위에 있다.



이 글은 미주 현대뉴스에 게재했던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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