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새 내린 이슬에 말리려고 마당에 펼쳐 두었던 깻잎 씨가 더 축축해져 버렸다. 오늘 종일 볕에 두었다가 밤엔 집 안에 두고 말려야 할 모양이다. 정원 가꾸기의 시작은 봄이 아니라 가을이다. 그래서 요즈음이 정원사에겐 유난히 바쁜 때지만 해는 짧아지고, 기온은 차가워지니 마음만 바쁘다.
부추 씨앗은 몇 알 되지 않아 그냥 밭머리에 털어 두었다. 때로는 채종하고, 모종을 길러 옮겨 심는 것보다 이렇게 뿌려 두는 편이 더 나을 때가 있다. 자연의 손길이 사람의 손보다 섬세해서일까? 그저 흙과 바람과 햇살에 맡기면, 알아서 돋고 자란다.
올해 유난히 화려한 꽃을 피웠던 도라지는 씨앗도 실하게 맺혔다. 어차피 몇 해에 한 번은 옮겨심기해야 하는 작물이니, 올핸 뿌리는 캐고, 씨앗으로 내년 봄에 다시 시작해 볼 생각이다. 잘 마르고 단단해진 씨앗을 꼬투리째로 따서 바구니에 담았다. 그리고 4년 만에 캐는 도라지, 혹시라도 뿌리가 상할까 사방으로 모종삽을 깊게 넣어 살살 끌어 올린다. 흙냄새 사이로 알싸한 도라지 향이 번진다. 흙 속에서 묵묵히 몇 해를 보낸 뿌리의 힘과 향이 생각보다 강하다.
온도가 떨어지니 열매 맺은 방울토마토는 더 이상 익지 않는다. 열매가 실해도 올핸 여기 까진 듯싶다. 개중에 잘 익은 토마토를 골라, 반으로 잘라서 흙 속에 묻는다. 내년 새 모종으로 다시 태어날 것이다. 뿌리 부분은 잘라 버리고, 잎 부분은 잘게 잘라 밭에 다시 뿌려준다. 거름으로 이만한 것도 없기 때문이다.
바스스 누렇게 변한 아스파라거스 잎은 밑동까지 바짝 잘라준다. 마르고, 바스라진 잎인데도, 자를 때마다 올라오는 풀내음이 참 좋다. 이른 봄, 아삭하게 솟던 새순이 안개꽃 같은 잎을 펼치며 한여름 내내 하늘을 향해 자랐더랬다. 그러던 것이 어느새 고개를 숙이더니, 푸르던 줄기가 누렇게 시들어, 마지막 순간까지 땅속 깊은 곳에 영양분을 저장한다.
길게 자라 화분 밖으로 늘어진 국화도 밑동까지 바짝 자른다. 손끝에서 잘려 나가는 줄기마다 국화 향이 번진다. 자줏빛 수국은 하얀 단지에 꽂아 정원 탁자 위에 올려두었다. 단풍 든 백일홍 나무와 서로 다른 색과 질감으로 늦가을 햇살 아래 어우러져 한 폭의 그림이 된다.
노란 국화는 짧게 잘라, 말간 유리컵에 나누어 담았다. 식탁 위에, 부엌 창가에, 침실 스탠드 옆에 하나씩 놓으니 국화향이 집안을 가을로 가득 채운다. 국화는 화려하진 않지만 은근하다. 꽃과 잎의 향은 짙지만 그렇다고 마음을 들뜨게 하지 않는다. 가을처럼 말이다.
새크라멘토의 겨울은 춥다기보다 길고 지루한 비가 있다. 그래서 식물에 따라서 이곳의 겨울을 잘 나기 위해서는 비를 피할 자리를 찾아 주는 것이 중요하다. 군자란이 그렇다. 찬 바람쯤은 견디지만, 긴 비에 잎이 상하기 쉽다. 처마 밑으로 옮겨주면 주홍색 꽃대를 올릴 때까지 묵묵히 푸르름을 지킨다. 칼랑코에(Kalanchoe)도 마찬가지다. 단단하고 두터운 잎이 플라스틱처럼 강해 보여도 비에 오래 젖으면 잎이 물러 살지 못한다. 장미는 빗속에서도 꿋꿋하다. 가지를 짧게 쳐주고 뿌리 주변의 낙엽만 치워주면, 장미는 스스로의 힘으로 겨울을 건너간다. 어느 핸가 너무 긴 비에 병이 나지 싶었는데, 잘 이겨내고 더 단단해져, 가장 매혹적인 향기로 정원을 사로잡았다.
무화과나무는 벌거벗은 가지로 겨울을 난다. 잎은 모두 떨어지고 앙상한 줄기로 겨울을 나지만 이 모습의 휴지기가 꼭 필요하다. 그렇게 추운 모습으로 긴 잠을 자도, 봄이 오면 어느새 굳은 가지 끝에서 새순이 돋고, 여름이면 달콤한 열매를 맺는다.
어느새 어스름이 내려앉은 정원.
흙과 풀, 그리고 하루 종일 가을볕에 익은 나무의 숨결이 섞인 저물녘의 공기가, 분주했던 하루의 몸과 마음을 평안하게 해 준다.
떨어질 때마다 모아 두었던 솔방울과 마른 가지로 불을 피우고, 고구마를 굽는다. 정갈해진 정원 때문인지, 아니면 익어가는 군고구마 냄새 때문인지 내 마음이 달콤하다.
진녹색, 무성한 오렌지와 레몬잎 사이로 노랗게 익은 열매들이, 가을 저녁, 알전구처럼 하나둘 켜진다. 가을이 깊어질수록, 이 열매들은 쓸쓸하고 추운 정원을 더 따뜻하고 환하게 밝혀 주리라.
가을, 정원사의 하루가 이렇게 저물어 간다.
(미주 현대뉴스에 게재한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