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눈과 함께 걸었다.

by 박명혜

오랜만에 눈길을 걸었다. 그것도 첫눈 내리는 거리를, 한국에서 말이다. 먼지처럼 흩날리던 눈발이 어느 순간 팔랑팔랑 날개를 달고, 내 머리와 뺨, 온몸에 내려앉았다.


한국에 온 지 열흘째, 예상했던 한국 추위였지만 캘리포니아의 겨울과는 결이 다른 냉기가 몸을 자꾸 웅크리게 했다. 오후가 되어도 유리창으로 느껴지는 냉기는 쉬이 가시지 않았지만, 모처럼 쨍한 햇살이 나를 서울의 겨울 거리로 자꾸 불러냈다.

무리 지어 걷는 사람들 따라 도착한 정동전망대. 빌딩 가득한 도심 속, 고작 13층 높이에 전망대란 이름이 어울릴까 싶었는데, 그 틈 사이로 펼쳐진 서울의 겨울은 뜻밖에도 한눈에 담기가 어려울 만큼 아름다웠다. 유리창 너머로 내려다본 덕수궁은 걸어 들어가 본 궁과는 또 다른 느낌이었다. 오래된 화첩을 펼쳐 보는 한 폭의 그림 같았다. 짙은 청자빛인 듯도 하고, 은은한 회색빛 같기도 한, 궁궐 지붕의 포개진 기와들이 겨울 하늘과 잘 어우러져 아름다웠다. 잎을 모두 떨군 나뭇가지들은 자칫 앙상해 보이기도 하지만, 황톳빛 마당 위에 빈 가지가 만든 그림자는 수묵화의 여백처럼 조용한 여운을 남긴다. 수많은 이들이 오고 갔을 텐데도 궁의 마당은 금세라도 빗질을 마친듯 단정했다. 고즈넉한 한옥 전각들과 나란히 서 있는 석조전은 격동의 근대사를 온몸으로 겪어내야 했던 운명을 상징하는듯 회색빛으로 묵묵히 서 있었다.


계획 없이 나선 길에서 만난 정동전망대는 뜻밖의 큰 선물이었다. 더구나 첫눈이라니. 발 시리게 기다리던 버스는 이미 도착했지만, 첫눈 내리는 이 겨울 저녁을 이렇게 흘려보낼 수는 없었다. 전망대만으로는 부족했다. 나는 그 풍경 속을 직접 걸어보고 싶었다. 조금 더 오래 붙잡고 싶었다. 덕수궁 돌담을 따라 정동길로 향했다.


눈이 아니어도 정동길은 서두르며 걷기엔 어울리지 않는 길이다. 길 자체가 너무 많은 이야기를 품고 있기 때문이다. 덕수궁 돌담길을 빠져나오면 곧바로 서울시립미술관이 나타난다. 근대 법원 청사로도 쓰였던 이곳, 오래된 시간이 스며 있는 건물 벽 앞에 서면 전시된 작품 그 이상의 작품을 만난다. 미술관을 지나면, 붉은 벽돌의 정동교회가 눈에 들어온다. 한국 개신교의 첫 역사가 시작된 곳, 그리고 3·1 운동과 민족 운동의 현장으로 우리 근대사의 수많은 순간을 조용히 지켜본 곳이다.


조금 더 걸으면 오래된 러시아 공사관 터의 외로운 탑이 먼저 눈에 들어온다. 대부분 건물은 전쟁과 세월 속에 사라졌지만, 이 탑만이 고종이 머물던 격랑의 밤들을 기념하듯 여전히 하늘 가장자리에서 희미하게 빛난다. 그리고 이제는 전혀 다른 시대의 공기로 새로 지어진 러시아 대사관이 정동의 오래된 숨결과 대조를 이루며 현존한다.

길은 자연스레 이화여자고등학교 100주년 기념관과 배재학당 역사박물관 쪽으로 이어진다. 근대 교육의 상징이자, 새로운 지식을 갈망했던 젊은이들의 열정이 불꽃처럼 뛰던 곳. 이 길을 걸었을 수많은 학생들의 웃음과 숨 죽은 고민이 여전히 공기 중에 희미하게 떠도는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킨다.


덕수궁 돌담길의 낭만도, 역사의 무게와 변화의 흔적도 한데 느낄 수 있는 정동길. 이 길을 걷는다는 건 한 곳에서 또 다른 곳으로의 단순한 이동만이 아니다. 시간 여행자가 되어, 근대의 서울, 과거와 특별한 한때와 대화를 나눌 수 있는 색다른 시간이었다.

궁의 기와 위에도 붉은 벽돌 교회에도 학교 운동장에도 평등하게 내리는 눈. 첫눈답지 않게 어느새 소복하게 쌓여가는 눈은 세상의 빛과 소리를 흡수해 마법의 공간을 만든다. 눈은 점점 굵어지고 ‘뽀드득’ 밟히는 소리는 어릴 적 눈 맞으며 깔깔대던 나를, 누군가를 생각하며 하얀 거리를 걷던 젊은 날의 나를 모두 한꺼번에 만나게 했다.


하얀 눈이 모든 것을 덮어 감싼다. 지난 한 해 동안 나의 모든 아픔과 미련도 이 순간만큼은 흰 눈으로 조용히 덮어 두련다. 왜냐하면 오늘 나는, 정동길을 걸으며 잊고 살았던 소중한 기억들을 다시 찾았고, 다가올 새해를 향해 내 마음의 여백을 비워냈기 때문이다.


잃어버렸던 계절을, 잊고 있던 나를

2025년 12월 5일, 눈 내리는 정동길 위에서 다시 만났다.


미주 현대뉴스에 기고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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