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디만큼 봄이 왔을까? 하늘만 쳐다보며 기다리다가, 이미 땅 위에 도착한 봄소식을 놓쳐 버리고 말았다. 겨울 동안 쌓인 낙엽과 마른 줄기들로 정원은 어수선했고, 흙은 아직 차가웠다. 그런데 어느 날 아침, 그 정리되지 않은 흙 사이에서 불쑥 고개 내민 노란 꽃들을 보았다. 수선화(Daffodil )였다.
겨울이 지나고 봄빛이 조금씩 길어지면, 가을에 묻어 두었던 구근(球根, bulb)들은 저마다의 사연을 담은 봄편지가 되어 돌아온다.
봄 구근이라고 하면 많은 사람들은 튤립을 먼저 떠올린다. 화려하고 당당한 꽃이다. 하지만 내가 봄 정원에서 먼저 떠올리는 구근 식물은 수선화와 무스카리, 그리고 프리지아 같은 꽃들이다. 튤립이 봄의 절정에서 정원을 화려하게 장식하는 꽃이라면, 이 꽃들은 아직 차가운 공기로 계절의 변화를 느끼지 못할 때에 피어, 조용히 봄이 시작되었음을 알려 주는 고마운 꽃들이기 때문이다.
수선화는 그리 튼튼한 줄기도, 커다란 꽃송이도 갖고 있지 않다. 그런데도 겨울의 끝자락을 힘차게 밀어내고 이 세상 곳곳에서 노란 얼굴로 봄을 알린다.
집에서 한 시간쯤 차를 달리면 만날 수 있는 수선화 천국이 있었다.
McLaughlin’s Daffodil Hill. 굽이굽이 이어진 좁은 길을 한참이나 달려 도착한 입구는 기대보단 소박했다. 아니 굳이 이렇게 힘들게 찾아올 이유가 있을까 싶은, 그저 시간이 멈춘 농가의 입구 같았다. 하지만 빛바랜 양철지붕의 작은 오두막을 지나면, 전혀 다른 풍경이 펼쳐진다. 4 에이커의 구릉 위에 30만 개가 넘는 구근이 피워 낸 수선화 언덕. 노란 꽃들이 물결처럼 이어진 그 풍경은 절로 탄성을 불러냈다. 1887년부터 맥라플린 가문이 가꾸어 온 이 언덕은 오랫동안 사람들에게 봄의 시작을 알려 주는 곳이었다. 그러나 130년 넘게 무료로 개방되던 이곳은 몰려드는 인파와 교통 문제, 환경 보존의 어려움 때문에 2019년 이후 결국 문을 닫았다. 이제 그 언덕에 다시 갈 수는 없다. 그래도 봄이 오면, 수많은 수선화가 바람에 흔들리던 그 노란 언덕은 여전히 내 기억 속에서 피어난다.
대지의 깊은 잠을 깨우는 작은 종소리, 무스카리(Muscari) 또한 봄을 알리는 구근식물이다. 진한 초록빛 잎줄기 사이에서 피는 작은 포도송이처럼 생긴 꽃. 깊은 푸른색에서 새벽녘 보랏빛으로 피어나는 무스카리는 혼자 있으면 키가 작아서 눈에 잘 띄지 않는 꽃이다. 하지만 정원의 한구석이나 나무 밑동 주위로 수백 개의 무스카리가 무리 지어 피어난 모습은 마치 지상에 내려앉은 푸른 은하수 같다.
그리고 프리지아(Freesia). 프리지아는 꽃보다 향기로 먼저 만나는 꽃이다. 이른 아침 문을 열면 공기 속에 풀려 있는, 달콤하고 맑은 이 꽃향기가 먼저 다가와 봄날의 아침을 환하게 만든다. 하지만 꽃의 모습은 생각보다 소박하다. 길게 올라온 줄기 한쪽에 작은 종 모양의 꽃들이 나란히 달려 있다. 꽃은 줄기 아래에서부터 하나씩 차례로 피어난다. 먼저 핀 꽃이 살짝 고개를 숙이면 그 위의 꽃이 뒤따라 피고, 또 그다음 꽃이 조심스럽게 꽃잎을 연다. 노란색, 흰색, 보라색으로 화사한 색을 지녔지만, 피어나는 모습은 차분하고 단정하다.
프리지아는 추억 속에서 늘 우리 가까이에 있던 꽃이기도 하다. 봄날 교실의 창가나 거실 한켠에 놓여 있던 꽃이었고, 버스 정류장이나 지하철역 가판대에서도 쉽게 만날 수 있던 꽃이었다. 또 누군가와 처음 인사를 나누듯 가볍게 건넬 수 있는, 봄처럼 상큼한 향기를 지닌 꽃이기도 했다.
“당신의 시작을 응원합니다.”라는 프리지아의 꽃말 때문일까? 새로운 계절의 문 앞에 선 우리에게 프리지아는 작은 응원처럼 느껴진다.
구근은 기다림을 가르치는 식물이라고들 말한다. 그도 그럴 것이 가을에 작은 알뿌리 하나를 묻어 두고 나면 한동안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 보이지 않는 흙 속에서 뿌리를 내리고 꽃눈을 키운다. 또 겨울의 차가운 시간도 견뎌낸다. 이 모든 시간이 잠든 꽃눈을 깨우는 약속의 시간이기 때문이다.
눈에 보이지 않는 시간을 믿어 보는 일, 그리고 언젠가 다시 돌아올 봄을 미리 환영하는 마음. 구근은 그런 마음을 가르치는 식물이다.
봄이 깊어진다. 낙엽 사이에서 올라온 작은 초록빛들은 어느새 꽃이 되고 향기가 되어 정원을 채운다. 이젠 더 이상 미루지 말고, 서둘러 겨울을 지워야 할 때다. 그래야 곧 여름이 데려올 꽃들을 맞이할 수 있을테니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