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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요일 Aug 15. 2023

파도여, 춤을 추어라

D-61

  정말 솔직히 말하자면, 나는 집의 전반적인 분위기를 경멸한다. 사실 안식처마저 불안정한 것은 외딴 인간에게 있어 무척 안타까운 현실이다. 그러나 한 글자의 공간 속에서 새어 나오는 결핍들에 나는 매번 허우적거린다. 이따금 소외감을 느끼고, 혼자서 집안의 모든 먼지를 마셔야 할 것만 같은 압박감에 온몸을 쥐어뜯게 되는 것이다. 방 곳곳에 어질러진 사랑의 결핍과 개탄의 조각들, 그리고 벽에 스며든 한숨의 얼룩들은 결코 우리를 한데 모으지 못한다. 지금의 내 처지가 그렇게 만든 것일까. 아니면 어릴 적부터 숨겨온 ‘외딴’의 힘이 지나치게 커져 버린 탓일까. 애석하게도 거실 바닥의 흠집들은 매번 내 발에 생채기를 남긴다. 분명 휴식의 공간으로 다가가야 함에도, 이놈의 정신 상태는 제대로 틀려먹었다.     


  더욱이 슬픈 사실은 ‘집에 가고 싶다’라는 말이 집 소파 위에서 흘러나온다는 것이다. 어째서 그 문장을 몇 번이고 뱉어댔는지 나조차도 의문이다. 그 말인즉슨, 내게 아직 집은 존재하지 않는다. 정말 집에 가지 못할 때나 튀어나오던 말이 바라던 위치에 도달했음에도 이어서 나온다니. 이것 참 골치 아픈 일이 아닐 수 없다. 오래도록 지녀 온 결핍들은 오로지 내게만 남아 있는 것일까. 어째서 나는 갈수록 현관 앞에 솔직함을 두고 문을 여는가. 이유는 모르겠으나 내게는 ‘집’과 ‘평온함’이란 단어가 서로 잘 붙지 않는 듯하다.     


  그런데도 이놈의 도시는 평생 바다와 떨어질 생각을 안 한다. 어쩌면 지겨울 법도 한 푸른빛의 일렁임. 그러나 이번만큼은 거대한 위로의 손길로써 나를 불러들이고 있었다. 그 어떤 풍경도 그보다 황홀할 수는 없었다. 어쩜 그렇게도 잔잔히 내 눈과 귀를 적실까. 물론 코의 반응도 빼먹을 수 없다. 적당한 짠 내는 눈시울에 시동을 걸기에 제격이었다. 하지만 여태껏 고향에 간간이 왔을 때마다 나는 윤슬을 경멸했다. 더 나아가 이 도시 자체의 특유한 분위기를 싫어했다. 집에서부터 확장된 경멸이 바다, 그리고 섬 전체에까지 영향을 미친 것이었다. 따라서 나는 바다 근처에서 머무는 시간을 최대한 줄였고, 매번 혼잡한 도시로 날아가 이방인의 박탈감을 남몰래 흡입했다. 그렇지만 이번을 계기로 분명히 알 수 있었다. ‘아, 그래도 유려한 것들이 좋은 거구나. 고요한 파도 소리와 바람, 그리고 무언가 모르게 여유로운 행인들까지. 아, 이거야말로 진정한 해방이구나.’ 물론 집밖에 머물 때만을 이야기한다.     


  지난주는 틀림없이 불볕더위였다. 이놈의 여름은 이제 지나칠 대로 지나쳐 버렸다고 생각한다. 며칠 되지도 않는 해방을 이렇게 망치려고 들다니. ‘지구 온난화’를 넘어 ‘끓는 지구’가 되어버린 이 행성마저도 곧 불에 타 없어져 버릴 듯한 날씨가 며칠 내내 나를 옥죄었다. 바다 근처는 바람이 조금 달래주긴 했지만, 그 예외의 세상을 곱게 쳐다볼 용기는 좀처럼 생기지 않았다. 진정 세계가 붉은빛으로 덮여 파괴되는 결말을 맞이한 걸까.     

  ‘낙관적 허무주의’라는 개념 자체가 허무주의에 빠져 버리는 기분이 들었다. 다 타서 없어져 버릴 것만 같은데, 저 말이 무슨 소용이겠냐는 것이다. 누가 뭐라 해도 난 최대한 행복만을 줍다가 죽을 작정이었다. 그러나 조금만 천천히 줍다가는, 그대로 열사병에 픽 쓰러져 생을 마감하는 시대가 도래한 듯싶었다. 충분히 열 받는 내게 그러한 죽음은 곧 죽어도 싫은 거다. 난 그저 행복한 우주 먼지로 떠돌고 싶을 뿐, 또다시 불쾌 속에서 타들어 가는 타인의 담배 따위가 되고 싶지 않았다.     


  그렇게 짧은 시간을 여유로운 도시에서 긴박하게 보냈다. 무척 더웠으나, 한편으로는 시원한 느낌을 받았다. 그러고는 여느 때와 같이 치명적인 경유지로 비행했다. 열섬 현상을 뼈저리게 경험하며 간만에 혼자만의 시간을 적잖이 가졌고, 저녁이 되자 발걸음을 역사 끝으로 옮겼다. 다시 외로운 노선의 끝으로 향하는 육체는 이제 질릴 대로 질렸는지 별 움직임이 없었다. 힘도 그다지 남아 있지 않으며, 충분히 체념에 젖은 탓에 아무런 생각이 들지 않았다. 곧 있으면 뒤도 돌아보지 않고 역행할 열차에 마음을 벌써 빼앗긴 듯했다. 그러나 이건 섣부른 착각이었다.     


  돌아오자마자 무심코 뱉어버린 문장 속에는 다시 경멸의 장소가 속했다. 혓바닥 위에서 미끄러진 말이지만, 그 경멸의 섬이 이 외딴곳보다 낫다는 점은 분명히 알 수 있던 무의식이었다. 아무래도 외로움은 떨치려야 떨칠 수가 없었다. 원체 성미가 자유분방한 탓에, 좁디좁은 관념들의 집합체, 다시 말해 숨이 턱 막히는 하수구 같은 곳에서 숨을 참는 행위가 너무 힘겹게만 느껴지는 것이었다. 악취와 더불어 자연스레 하찮아지는 나 자신을 혐오하고, 그 속에 든 생쥐들의 체취를 섣불리 판단하려 드는 것 또한 무척 어리석다고 느꼈다. 몸에 덕지덕지 붙은 가식의 향기와 추임새, 그리고 외력에 못 이겨 어둠과 악수하고 마는 내 손을 거침없이 떼어내고만 싶었다. 그 어떤 것도 자기혐오로 귀결되는 기이한 현상을 나는 언제나 목격했고, 그런 이유에서 존재하지 않는 집 따위가 혀 위에서 미끄러지기를 반복했다.     


  지금은 외려 다른 누군가가 나를 고약한 생쥐라 단정할지도 모른다. 다분히 누추한 꼴로 생존을 이어가고 있는 내게, 그 어떤 보잘것없는 관형어도 착 달라붙을 게 틀림없어 보인다. 그러나 염세적 태도를 이겨낸 나는 더 이상 불순물을 알아보지 못한다. 이런 무념의 인간은 어쩌면 해양 쓰레기의 의인화에 활용될지도 모르겠다. 거대한 흐름과 잔물결에 결코 저항하지 못한 존재. 소신껏 부유하지 못하다 어찌어찌 육지에 닿는 데에는 성공한 바다 쓰레기, 혹은 그저 파도에 못 이겨 떠밀려 온 세상의 잡것들·····. 난 그저 그런 부랑자의 결말을 앞에 두고 있는 게 아닐까.      


  아직도 경멸의 섬 주변엔 부랑의 실패들이 널브러져 있다. 조만간 그곳을 다시 찾게 된다면, 난 그것들을 착실히 주울 작정이다. 행복한 부유물의 형상은 결코 아니다만, 그것이 내 최후 모습이라면 내가 바꿀 수 있는 게 아니겠는가! 불행을 주워 행복의 형태로 가꾼다면, 그 또한 낙관의 일환이 아니겠는가. 내가 주운 것들의 일부는 분명 이로운 데 쓰일 것이다. 그리고 나의 때 묻은 허물들은 절대 새로운 사회에 남지 않을 것이다. 하루빨리 결핍의 조각들이 눈앞에서 사라지기를. 얼른 변화된 무의식의 문장이 나태한 나를 일깨우기를! 아, 파도여, 왜 이리도 늑장을 피우십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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