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451
친하지 않은, 아니 어쩌면 서로 아예 아는 바가 없는 두 사람이 외딴곳에서 어떻게든 시간을 때워야 한다면 무엇을 해야 할까. 어떻게 해야만 그 시간을 축내버릴 수 있을까. 이 지독한 임무는 내게 거의 매일 주어진다. 밤낮을 가리지 않고 나, 그리고 무작위로 선정된 한 명의 아무개는 외딴곳으로 발길을 향한다. 낮에는 햇볕이 찡하게 내리쬐고 밤에는 앞이 잘 보이지도 않는 어두컴컴한 외딴곳, 그런 곳에 단둘이 남게 되는 것. 물론 나는 아래에 있다. 서로 이름을 잘 모른다.
“누구세요? 아니, 너 이름이 어떻게 됐더라?”
나의 오른쪽 가슴에 적힌 세 글자를 응시하면서도 이름을 물어보는 상대방의 눈빛을 엉뚱하게 바라보며 정중하게 답한다. 그와는 달리 나는 예습을 조금 했다. 종이에 적힌 이름 세 글자와 지나가는 얼굴을 대조해 보면서 안경은 썼는지 안 썼는지, 키는 어느 정도 하며 성격은 대체로 어떤지에 대해. 아, 마지막으로 왼쪽 가슴에 선이 몇 개인지. 두 개인지 세 개인지. 혹여나 네 개는 아닌지. 시간 지체할 것 없이 신상 파악은 이렇게 단방향으로 빠르게 마무리된다.
그러고서 다음 단계는 무엇을 하다 왔는지에 관한 물음이다. 이 물음은 결코 빼먹는 일이 없다. 안 그러면 얘깃거리가 굉장히 궁해지기에 어쩔 수 없는 노릇이다. 무엇을 하다 왔냐니. 그러니까 이 멀고도 고독한 외딴곳에 왜 왔고 그 이전에는 어떠한 삶을 살았었느냐는 물음이다. 이렇게 보니 흡사 교도소에서나 들을 법한 질문 같다.
“아, 대학 다니다가 왔습니다.” (물론 그 1년이 학교에 다닌 거라고 말할 수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과는 뭔데? 혹시 학교 어디 다니는지 물어봐도 돼? 오호라. 그렇구나. 어디서 왔어? 와. 대박이네. 나 처음 봐. 하하하.”
나를 신기하다는 듯이 쳐다보며 그는 줄기차게 질문을 이어간다. 나라도 궁금한 것이 많을 것도 같다. 그렇게 바깥세상 이야기로 쭉 잘 이어 나간다 싶더니, 아무래도 몸이 그곳에 머물던 때가 오래된 탓에 그만 뚝 끊기고 만다. 그러고서는 우리가 있는 이곳으로 눈을 돌린다. 이곳은 어떤지, 뭐 힘든 것은 없는지, 궁금한 것이나 고민 같은 것은 없는지에 관해 묻는다.
“없습니다. 저는 진짜 너무 재밌습니다.”
“응...? 재밌어? 재밌다고..? 뭐 그럴 수 있지.."
백이면 백, 반응들은 다 똑같다. 그러고서는 다들 '이곳은 썩 좋지 않다'라는 이미 충분히 알고 있는 사실을 내게 어필한다. 재밌어하는 내가 이해가 안 된다는 식으로 내 생각을 뭉개버린다. 그들에게 이곳은 절대 오면 안 되는 곳이며, 얼른 나가야 하는 장소인 것이다. 장점을 이야기할 생각은 추호도 없이 안 좋은 사실들만 내게 피력한다. 나는 연신 고개만 끄덕이며 부정적인 생각을 가져야 한다는 서약에 동의하는 척한다. 분명 이곳에 올 때 난 그런 서약을 한 적이 없다. 이곳에 오면서 굳게 먹었던 다짐이 무색하게 나는 힘들어야 하는 사람, 힘들어야 할 사람으로 단숨에 전락해 버린다. 물론 난 전혀 흔들리지 않는다. 조악한 말투로 다가오는 피력은 아니다. 축 늘어진 어깨와 이미 체념한 듯한 표정으로 내게 조언 아닌 조언을 건네는 것뿐이다. 솔직히 어느 정도는 공감이 가기도 하며 진실로 고개가 끄덕여지기도 한다. 이곳이 쉽지 않은 것은 사실이니까.
아무쪼록 이런 식으로 서로의 생각과 마음을 들춰보면서 점점 상대방을 알아가기 시작한다. 하나의 물음에서 시작해 여러 가지 질문으로 뻗어 나가 점점 길어지는 대화는 칠흑 같은 어둠과 정적을 해결해 줄 것처럼 보인다. 서로 궁금했던 것들을 묻고 답하며 공감되는 부분을 찾고, 새로운 사실들도 알아가게 되면서 이야기가 그 주변을 정답게 서성이게 된다. 하지만 서로 딱히 무관심하거나 말수가 적다면 좀처럼 그 정적은 깨질 기미가 보이지 않는데, 이럴 때는 호시탐탐 기회를 노리며 시시콜콜한 이야기로라도 그 빈틈을 채울 수 있도록 해야 한다. 좀처럼 시간은 이 외딴곳을 그리 편하게 놔두지를 않기에. 세상에서 가장 확실한 약속임에도 이곳에서는 약속이 조금 늦어지는 경향이 있는 듯하다. 앞만 멍하니 쳐다보며 혼자 사색에 잠기는 것을 좋아하긴 하다만, 긴 시간 동안 멍만 때릴 수 있는 그런 폭력적인 인간은 못 된다. 수다 없이는 파리가 꼬일 정도로 무료한 곳이기에, 우리는 이곳에서만큼은 다정한 수다를 떠는 것에 혈안이 되어야 한다.
햇볕이 찡하게 내리쬐는 오후의 어느 날, 둘은 처음 만났다. 외딴곳 속에서의 또 다른 외딴곳에서. 서로 이름도 잘 몰랐으며 상대방에 대해 정말 아는 바가 없었다. 이날도 여지없이 무작위로 선정된 한 명의 아무개와 같이 머물게 된 나는 처음 본 사람과 시간을 무료하지 않게 흘려보내기 위해 각별히 신경을 쓴 상태였다. 이번에는 예습하지 못했기에 상대방의 외적 모습, 어디선가 주워들은 성격과 같은 그런 전반적인 그 사람에 관한 정보에 무지한 상태였다. 직전에 이름과 얼굴만 얼추 맞춰보고 온 것이 전부였다. 초장에 이야기했던 것처럼 이제 우리는 시간을 축내버리기 위해 노력을 가해야 했다.
그런데 어째선지 대화가 시작되기도 전에 나는 지극히 편안함을 느끼고 있었다. 왜였을까. 외모도 성격도 잘 몰랐지만 딱 처음 마주했을 때 그가 겉으로 풍기는, 한 인간의 육체에서 내뿜는 느낌 또는 분위기는 영락없는 나의 단짝이었다. 눈, 코, 입, 그리고 얼굴 어딘가에 있는 점마저도 비슷하게 자리를 잡고 있었으며 몸의 형태마저도 똑같았다. 외적 모습이 이리 닮을 수가 있던가. 더 중요한 건 내적 모습, 즉 성격까지도 그는 나의 둘도 없는 친구였다. 그 순간, 내 정신은 말랑해지고야 말았다. 분명히 아래에 있는 나지만, 더할 나위 없이 나와 친한 사람으로 보인 것이다. 나는 간만에 인간을 향한 안정감을 느끼며 서슴지 않게 그에게 다가갈 수 있었다.
신나게 혀에서 끊임없이 말들이 굴러 나왔다. 술은 없지만, 얼핏 보기에는 둘이서 조용한 호프집에 있는 듯했다. 맥주 한잔하며 서로 회포를 풀어놓는, 그런 고즈넉하고 진중한 술자리. 내가 좋아하는 딱 그 분위기였다. 반말보다 편한 존댓말이 세상에 존재할 수 있었던가. 상대방을 진정으로 위하는 말로 계속해서 나는 대화를 이어 나갔다. 앞서 말했듯 우리 또한 무엇을 하다 왔냐는 물음에서 긴 대화가 시작될 수 있었는데, 그렇게 묻고 답하는 과정을 거치면서 나는 내 이야기를 풀어놓게 되었다. 단짝과 둘이서 술을 마시며 하는 이야기처럼, 점점 인생에 관한 이야기를 꺼낼 수 있었다. 난 어떤 삶을 살았고, 앞으로는 어떤 목표가 있으며 이곳을 나가서는 어떻게 그것을 이뤄낼 것인지에 관해. 글 쓰는 것을 좋아하는 만큼 말하기도 좋아하는 나였다. 그러다 보니 지금의 이 글처럼 엄청난 양을 입 밖에 쏟아내고야 말았다. 처음 이야기해 보는 낯선 사람한테 말이다. 심적으로 편안한 사람에게 긴장이 풀어지는 혀를 가진 나였다.
취미는 무엇이고, 지금까지 어떤 목표를 이뤄왔으며 이곳에서 무엇을 얻어 갈 것인지. 무척이나 깊고 심오한 답변들을 그의 물음 앞에 내놓았다. 그는 다른 이와 달랐다. 정말 공감하는 태도를 보이며 나의 얘기들을 잘 들어주었을뿐더러 미래 걱정을 같이 나눠주는, 나란 사람에게 어련히 협조해 주는 사람이었다. 그는 나에게 조언을 해주기도 하고 이곳에서 더 효율적으로 살아가는 법을 공유해 주었다. 이겨내는 법이랄까. 물론 내가 진 적은 없지만, 그리고 질 일도 없지만, 이 고독을 배로 즐길 수 있는 노하우 정도. 아무래도 지금의 내가 알면 좋은 것들을 내게 피력했다. 이곳의 안 좋은 점도 물론 일컫긴 했지만, 그것이 주가 되진 않았다. 그 사실들은 이미 내가 몸소 느끼고 있는 것들이었다.
어쨌든 그와 함께한 두 시간은 너무나도 빠르게 흘러갔고, 그리하여 우리는 마침내 그 외딴곳으로부터 탈출할 수 있었다. 나는 그날 이후로 꽤 많은 것을 깨달았다. 처음 마주하는 인간이라도 어쩌면 무미건조한 내 삶을 맘 편히 꺼낼 수 있더라는 것. 친해질 수 없는, 더이상 볼 일도 없는 한 사람의 이야기를 서로 들어줄 수 있는 것이었다니. 보잘것없는 타인의 삶을 진솔하게 들어줄 수 있는 세상이었다는 사실에 이곳이 마냥 안 좋지만은 않다는 것을 깨달았다. 물론 그 시간을 축내버리기 위해 어쩔 수 없이 꺼낸 입이었더라도, 결코 가식을 빙자한 사람의 입은 아니었다. 낯선 사람들이 외딴곳에서 만나더라도, 서로 잘 맞고 편안함과 안정감을 줄 수 있다면 시간은 충분히 흘러갈 수 있었던 것이었다. 솔직하게 말하자면 무척 행복했다. 오랫동안 입안에 잔뜩 머금고 있던 한숨과 마음속 응어리들, 그리고 한편에 자리했던 내 소소한 즐거움과 행복의 순간들, 그러한 것들을 모조리 뱉어낼 수 있어서 너무나 짜릿했다. 오래간만에 글이 아닌, 한 사람을 붙잡고 말로 얘기를 털어놓게 되면서 내 삶이 진솔히 정리된 느낌을 받았다. 처음 느껴보는 그 외딴곳 속 편안함. 단순히 형식적이고 비즈니스적인 대화였을지라도 나는 그저 좋았다. 간만에 느껴 본 희열이었으니까.
그 이후, 우리는 단 한 번도 얘기해 본 적이 없다. 얘기하고 싶어도 단둘이서 따로 또 얘기 나눌 수 있는 그런 여건은 되지 않는다. 애당초 단둘이 마주할 수 있는 상황 자체가 성사되지 않는 것이다. 지금 우리는 서로 단지 옆을 지나가는 사람에 불과하다. 단방향으로 말은 건넬 수 있더라도, 다시 쌍방향으로 이야기가 오고 갈 일은 없을 것 같다. 또 한 번 무작위로 선정되어 우리가 우연히 다시 만나기 전까지는. 하지만 나는 그래도 기다려 보려 한다. 또 다른 나와 잘 맞는 사람이, 아니면 다시 그가 나타나는 순간이 분명히 오지 않을까 생각하면서.
외딴곳에서의 외딴 즐거움은 이렇게 불현듯 내게 찾아왔다. 어쨌든 내 얘기를 들어줄 수 있는 사람이 이곳에서도 존재한다는 것. 외딴곳에 동요되어 외딴 외로움에 사무치거나 원인 모를 감정 따위에 휩싸이지 않을 수 있다는 것. 어쨌든 내 단짝은 어느 곳에서나 존재한다는 거니까. 그래서 드디어 이 글을 마치려고 한다. 이젠 글로만 뱉어낼 필요가 없어진 나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