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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요일 Nov 23. 2022

어쩌다 꿈은 잔혹함을 갖게 되었나

D-430

  꿈속은 자꾸 나를 몇 년 전으로 되돌려 놓고는 아무 말이 없다. 가장 스트레스를 많이 받고 힘들었던 때, 다시는 찍고 싶지 않은 단편영화의 주인공 자리에 나를 앉혀놓고서 사과 한마디 없는 그런 무책임한 연출을 내보인다. 시험을 코앞에 두고 있는 상황, 그에 허덕이고 있는 한 인간에 초점을 맞춰 영화의 서사가 흘러가도록 짜인 각본. 하지만 난 이미 그 집단에서 벗어난 지 오래다. 수험생의 위치에서 벗어나 버젓이 어른이 됐는데도 불구하고 갑자기 나를 책상에 강제로 앉히고선 며칠 뒤 시험을 치러야 한다고 속삭인다. 그 순간 극심한 불안감에 사로잡히는 주인공. ‘난 이미 대학생인데. 이미 충분히 했는데.’ 난데없이 압박감을 선사하며 나를 옭아매는 그 상황 자체에 주인공의 기분은 단숨에 침전되어 간다. ‘나보고 공부를 하라니, 그걸 다시 하라니.’ 셀 수도 없이 많은 문제지와 교재들을 내 앞에 쌓아두고서는 그것들을 다 외우라고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었다. ‘이미 어느 정도 그렇게 했는데, 그렇게 해서 지금의 내가 있는데 대체 왜 내가 또.’ 꿈 밖에서는, 이미 굳어버린 얼굴 한 편에 눈물이 얼룩져 있다. 세상이 너무 야박해 보인다. 행여 나를 정말로 그 순간으로 돌려보내기나 할까 걱정에 휩싸이는 순간이다. 지금까지 쌓아왔던 노력에 대한 허망함에 짓눌려 버리는 것, 이는 그 어떤 것보다 고통스럽게 다가왔다.      


  이 얼마나 황당무계한 상황인가. 그 순간으로 다시 돌아가라니, 그간의 기억이 지워진 채도 아닌, 지금의 기억을 갖고 다시 하라니. 좀처럼 말이 되지 않는다. 그 고통이 어떤지 알기에 초반부터 기가 질려 힘이 축 빠져버리는 것이다. 꿈인데도 불구하고 너무나 적나라하게, 그리고 단호하고 엄연하게 다가오는 현실에 무력하게 무너져 버리는 주인공. 그래도 혹시나 하며 이 상황을 계속해서 의심해 본다. ‘나 이미 했잖아. 잘 버티고 지나쳐 왔잖아. 근데 왜...’ 제아무리 상황극이라고 한들 이미 잠자코 몰입해 있는 내게는 고역이다. 냅다 혼자 억울함과 울분을 토해버린다. 매일 카페인에 의존하며 검은색 잉크로 책 속의 수많은 문장을 뒤덮던 기억. 끝내 잠에 못 이겨 책상에 엎드려 축 늘어지고는 불편함으로 편함을 찾던 순간들. 잠에서 일어나면 모든 게 엉켜버린 듯 좀처럼 차리기 힘든 정신. 어떻게든 잘 봐야 한다는 압박과 옆에 있는 불특정 다수들을 제쳐야 한다는 부담감에 못 이겨 힘들어했던 초라한 인간의 모습·····. 어슴푸레 뇌리에 스쳐 지나가는 여러 통증이다. 서로 물고 뜯지 못해 안달 난 먹이사슬 속 생물종들처럼 견제심에 허덕이는 우리가 너무나 싫었다. 겉은 웃고 있지만 속은 썩어 문드러져 갔다. 나 자신을 속여가며 토닥이던 하루하루가 너무나 지겨웠으니.      

  

  그때를 상기시키는 순간, 어안이 벙벙해져 힘겨워하는 내 감정 자체는 실망스럽기 그지없다. ‘그렇게까지 싫을까. 더한 사람도 있을 텐데, 난 아무것도 아니지 않을까. 내가 뭐 얼마나 했다고...’ 내 딴에는 그래도 꽤나 노력했다는 오만한 생각이 뇌를 지배하고 있기에 어쩔 도리가 없다. 꿈속이라 해도 그 순간으로 돌아갈 때면 심히 괴롭다. 그런데 이런 식으로 허심탄회하게 얘기할 거리가 되긴 한 것인지는 잘 모르겠다. 얼마나 치열하게 했다고. 놀기도 엄청나게 놀았으면서. 실낱같이 미약한 인간이 아닌지. 내 노력을 폄하하는 것은 아니다만, 어떻게 보면 이렇게까지 과도하게 활자들을 늘어놓으며 그 순간들의 묵은 때를 벗겨내야 할 만큼은 아니었던 것 같다. 저열한 충동에 이끌려 홧김에 그때의 감정을 쏟아내고 있는 것은 아닐까.     


  그렇게 책상에 앉아 압박감에 머리를 쥐어뜯고 있다 보면 꼭 또 다른 등장인물이 내 옆으로 다가왔다. “더 해야지. 더 좋은 곳의 일원이 되려면 더 미친 듯이 해야지. 다시 해.” 지겹게 들려오는 잔소리에 혼자서 소리 없는 비명을 내지른다. 내 뇌 속에서만 울리는 그런 곡소리. 밖에선 내게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전혀 알지 못한다. 그 사람이 너무나 미워진다. 절대 미워하면 안 되는 인물이지만, 그 속에서는 극도로 꺼려진다. 이 때문에 내게는 꿈이 어쩌면 두려운 공간이 되어버렸다. 현실과 너무나도 비슷하게 다가오기에, 어떨 때는 정말 꿈이 현실 같고 현실이 꿈같을 때가 존재하니까. 사실 아직도 잘은 구분을 못하겠다. 내 꿈속에는 또 다른 내가 사는 곳, 내가 즐겨찾는 장소, 내가 자주 만나는 사람과 같은 삶의 필수적인 요소들이 아예 따로 존재해 버린다. 꿈이 계속해서 중첩되며 더더욱 견고히 자리를 잡아감에 따라 실제로 착각을 일으킨다. 한쪽의 감정이 다른 한쪽에서 발현되기도, 미처 처리하지 못한 기분은 또 고스란히 다른 한쪽으로 옮겨지기도 한다. 꿈을 무척 깊고 심오하게, 그리고 넉넉히 꿔버리는 탓에 현실에서의 진실된 감정을 가끔 상실해 버리기 일쑤이다. 사치스럽고 판타지 같은 꿈도 수도 없이 많이 꾸지만, 불과 몇 년 전으로 다시 되돌려놓는 그 꿈은 이따금 나의 정신과 영혼을 좀먹어 갔다.

     

  그 꿈에서 깨고 나서는 현실이 아니었다는, 다시 그 순간으로 돌아가지 않아도 된다는 안도감에 한숨을 푹 내쉰다. 변변치 않게 찾아오는 상황극에 고여있던 눈물이 떨어질 때도 종종 있다. 이런 무책임하고도 잔혹한 연출은 매번 나를 무릎 꿇게 했다. 과거의 내 멍을 아프게 꼬집어 버린다. 하지만 그런 내게도, 하도 허황된 꿈을 자주 접하는 까닭에 이제는 어느 정도 그 속에서 자각하는 능력이 생겼다. 그 꿈을 꿀 때면 처음에는 굉장히 몰입해 있어 고스란히 연출에 걸맞은 감정을 연기해 내지만, 점점 현실이 아님을 깨달음에 따라 속에서부터 이미 안도의 한숨을 쉬면서 나올 때도 있다. 그나마 다행이라고나 할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무책임한 연출의 반복은 좀처럼 나를 가만히 내버려 둘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그 꿈은 매번 내게 어둠침침한 아침을 선사해 주었으니까. 난 단지 무책임한 연출가의 능란한 술책에 넘어가는 한 인간일 뿐이었다.     


  다행히도, 요즘은 그곳에서 나를 좀처럼 찾지 않는 듯 보인다. 이력서의 내용을 조금 수정을 한 덕일까. '지금 너무 잘 지냄'이라는 한 문장이 추가되어 그런 것일까. 현실에서의 행복이 꿈속에서의 불행을 덮어주는 것처럼 느껴졌다. 짙은 안개가 드리워져 있는 모습을 보며 고스란히 머릿속도 복잡해져 갈 때, 바깥에서 비스듬히 보이는 무지개가 그것들을 싹 비워주듯이. 악의에 찬 힘든 기억들이, 바깥에 도사리고 있는 행복으로 서서히 메워져 가는 것처럼 느껴졌다.      

  

  최근 들어 그 꿈의 행방은 확실히 묘연해졌다. 또다시 언제 나를 다시 찾을지는 알 수 없는 노릇이지만, 지금 당장은 내 앞에 나타나지 않을 것 같다. 난 지금 행복하니까. 그렇다고 지금까지 행복하지 않았기에 그 꿈이 애타게 날 찾았다는 말은 아니다. 어떻게 보면 이미 바깥에서의 현실이 녹록지 않은 탓에 연출해 낼 필요가 없어져 캐스팅이 불발된 것일 수도 있다. 이미 그때만큼의 감정을 느끼고 있어 연기해 낼 이유가 없는 것일 수도 있으니까. 남몰래, 스스로 알아채지 못하게 무척 지친 상태에 내가 놓여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반복되는 꿈을 찬찬히 생각해 보면 지금 내가 무엇을 두려워하고 있는지를 알 수 있다. 입으로는 괜찮다고 되뇌지만, 마음은 그리 편치 않은 상태임을 인정하라고 무의식에서 이야기하는 것이다. 결국엔 두 경우 중 하나이다. 내가 행복하기에 찾지 않거나, 이미 불행하기에 찾지 않거나. 그래도 긍정적인 것은 꿈과 현실, 두 곳 모두에서 불행을 희구하지는 않는다는 것. 힘듦은 한 곳에서만 고여있을 수 있다는 것.     


  만약 다시 그 순간이 온다면, 나는 남몰래 연출 방법을 바꿔버릴 생각이다. 이전의 고통스러워했던 내 모습은 깡그리 잊어버린 채, 숙련된 자각 능력을 활용해 내가 먼저 야단칠 것이다. 이미 알고 왔다고, 나 안 할 것이라고 거세게 소리치며 그들이 말끝을 흐리도록 말이다. 그러면 그런 격의 없는 꿈에서 재빨리 빠져나올 수 있겠지. 다른 좋은 시나리오로 옮겨갈 수 있겠지. 더 이상 원초적 불안감에 휩싸이고 싶지 않다. 내게도 두 곳 모두에서 행복을 희구할 수 있는 날이 찾아올까. 애당초 한 곳만 존재하도록 만들어 버리고 싶지만, 내겐 무척 버거운 일이기에 마음을 비우는 일이 힘든 인간은 오히려 마음속을 무언가로 두둑이 채워 넣어 힘듦이 고여있지 못하도록 만드는 방향이 더 낫다. 어쩌다 꿈이 잔혹함을 갖게 되었는지는 도통 모르겠지만, 나는 묵묵히 그 속에서 발버둥 치며 서서히 빠져나오는 수밖에 없다. 잔혹함을 묻어버릴 만큼 더한 즐거움으로 나를 가득 채울 수 있기를. 아니, 그냥 꿈을 기억지 못하는 한 바보가 되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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