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직 공무원의 삶은 순탄할 줄 았았다.
퇴직한 지 1년 6월이 되어간다.
인생 2막을 잘 살아가려면 준비가 필요했었지만 사실 준비를 못했다. 그렇지만 한 가지 마음속으로 다짐을 했다. 앞으로 모든 일을 공무원의 시각을 벗어나 생각하고 바라보는 것이었다. 하지만 그리 쉬운 일이 아니었다. 오롯이 35년간 몸에 익숙해진 습관이 하루아침에 변할 수도 없지만 생각 또한 변하기 쉽지 않았다.
주변에서 잘못된 것만 보인다.
공무원이 아니라면 볼 일도 없고 잘잘못을 판단할 일도 없을 것이다. 그런데 퇴직을 하고 나도 그런 것만 눈에 들어온다. 어느 다리에 걸린 깃발이 거꾸로 달렸다거나 도로가 파손되었는데 한 달이 지나도 그래로 방치된 것을 보면 눈에 거슬린다. 그래서 봐도 못 본 체 들어도 못 들은 채 하려고 노력하지만 주변 사람들이 나에게 이런저런 일을 물어보며 행정에 대한 불만을 토로한다.
퇴직하니 불편한 점이 한두 개가 아니다.
그렇다고 고향을 떠나 이사를 갈 수도 없는 일이다. 모든 일이 나를 중심으로 생각하고 움직이다 보니 불편한 점이 없을 수 없다. 눈에 보이는 대로 사사건건 민원을 제기할 수도 없다. 우리 속담에 아는 놈이 더 무섭다는 말이 있다. 무슨 일이 생기면 그 속담이 떠올라 참고 넘기는 일이 허다하다. 한 사람이 참으면 행정도 공무원도 평온하게 살아갈 수 있다는 생각이지만 과연 올은 일일까?
뭐 눈에는 뭐만 보인다.
사람은 누구나 평생 몸에 익은 습관을 버리기 쉽지 않다. 특히 공직생활의 타성으로 굳어진 습관은 나도 모르는 사이 행동으로 나오게 된다. 그래서 나는 될 수 있으면 관공서 방문을 최소화하려고 한다. 물론 만나면 반가운 사람도 있고 보기 싫은 사람도 있겠지만 굳이 방문해서 오랜만이네 뭐 하고 지내느냐는 등 어수선한 분위기를 만드는 것이 불편하다.
퇴직 후 머리부터 길렀다.
공무원 이미지를 가장 빠르고 쉽게 벗어나는 방법 중 하나가 바로 머리를 기르는 것이었다. 현직에 있을 때는 짧고 간결한 머리에 단정하고 깔끔한 복장 때문에 누가 봐도 공무원 스타일의 이미지를 벗어나기에는 헤어스타일의 변화만 한 것이 없다. 그래서 자유분방한 스타일이 최선이라는 생각으로 실천하는 중이다. 그런데도 바로 알아보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잘 몰라보는 사람도 있다.
전화 오는 횟수가 현저하게 줄었다.
35년간 나에게 어울리지 않는 옷을 입고 있었다. 그래도 오래도록 입고 있으니 내 옷이 되어버린 느낌이었고 이 옷이 진정한 내 옷이 되었을 때 떠나야 했다. 공직을 떠나는 순간 기존에 연락하며 지내던 사람들로부터 멀어지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만큼 연락하는 사람들이 없다는 말이다. 일부러 내가 먼저 연락을 하지 않으면 직장 동료였던 사람들도 필요의 관계가 아니라 자주 연락할 일이 없어졌다.
이제 남은 인생 잘 살아보려고 한다.
하루가 다르게 이미지를 변신하고 있지만 공직에서 알던 사람들은 고정관념을 가지고 있어 어렵다. 그래도 주변에서 변화의 노력에 긍정적인 반응을 보여줘고 있어 좋다. 겉으로 보이는 이미지는 많이 변신했는데 오랫동안 고착화된 습관은 조금 더 시일이 필요할 것 같다.
평일에 할 수 있는 친구들 모임이 있어 참여를 했다.
매월 정기적으로 모여서 운동하고 저녁까지 먹는 모임이다. 평일에 돌아다녀도 주민들의 눈치를 볼 필요도 없고 직장 때문에 불편한 일이 없어 좋다. 하지만 아직까지 지역에서는 알아보는 사람들이 있지만 지역을 벗어나면 내가 공직 퇴직을 했는지 농사꾼이지 알아보는 사람들이 없어 편하다.
오롯이 나일뿐이다.
일반인은 나만 잘하면 그만이다. 하지만 공무원은 나 한 사람의 잘못으로 인해 행정 전체에 대한 신뢰가 떨어질 수도 있다. 더 크게 본다면 공무원 놈들 다 그렇지 하는 식으로 매도되는 경우도 있다. 이제 그런 걱정을 할 필요가 없어졌다. 다만 떠나온 조직이지만 후배들을 위해 성실하게 그리고 다른 삶이지만 행복하고 즐겁게 살아가는 모습을 보여주고 싶은 생각이다.
진정 즐겁고 행복하게 잘 살아가는 모습을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