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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머니의 쪽진 머리

폭염이 계속되어 긴 머리 때문에 더 덥네.

by 박언서

할머니의 쪽진 머리가 생각난다.

퇴직하고 무작정 기른 머리 때문에 더워서 묶다가 할머니가 쪽진 머리를 꾸미시던 옛날이 생각났다. 어릴 때 우리 집에는 할머니가 자주 오셔서 주무시고 가셨다. 아버지는 4남 1녀 중 막내인데 유달리 우리 집에 오시면 여러 날을 묵고 가신 기억이 있다. 막내네 집이라 편해서 그랬는지 아니면 다른 형제들보다 막내에게 정이 가서 그런지 몰라도 아버지는 할머니가 오시면 장에 가셔서 고기와 생선 등 반찬거리를 사 오시곤 했다.

할머니는 눈이 어둡고 귀가 밝으셨다.

아버지는 할머니가 오시면 장에 가셔서 소 간을 꼭 사 오셨다. 눈이 어두운 할머니를 위해 눈에 좋다는 간을 사 오셔서 기름소금에 드시게 하셨다. 그리고 어머니는 치아가 좋지 못한 할머니를 위해 딱딱한 음식보다 부드러운 음식을 드실 수 있도록 신경을 쓰셨다.

할머니는 항상 문 앞에 앉아서 계셨다.

귀가 밝고 눈이 어두워 밖에 누가 왔는지 분간할 수 없으니 목소리를 듣고 사람을 알아보셨다. 방에 앉아 계셔도 목소리만으로 자주 오는 사람들이 누군지 알아채셨다. 아무래도 어두운 곳 보다 밝은 곳에서는 희미하지만 형체는 구분할 수 있으니 항상 방 문 가까이에 앉아서 계셨다. 앞을 볼 수 없어 혼자서는 나갈 수 없으니 문 밖 세상이 얼마나 궁금하셨으면 목소리라도 듣고 싶어 저러시는지 어린 나는 알 수 없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얼마나 답답하셨을까?

할머니는 쪽진 머리에 비녀를 하셨다.

이른 아침에 일어나면 항상 문 앞 환한 곳에 거울을 세워 놓고 머리를 단정하게 꾸미셨다. 어디 갈 곳도 없으시지만 항상 머리카락 한 올이라도 빠질까 봐 참빗으로 몇 번이고 빗어가며 머리를 가지런히 손질하시는 모습이 생생하다.

아침마다 머리끈을 챙겨야 한다.

언제부터인지 모르지만 나는 길어진 머리 때문에 한낮에는 더워서 어쩔 수 없이 묶어야 한다. 일을 하다 더워지기 시작하면 두 손으로 가지런하게 하고 챙겨간 머리고무줄을 꺼내 묶으면 조금은 시원해진다. 그렇게 머리는 묶다가 어느 날 문득 예전에 할머니가 머리를 하실 때는 손으로 쓰다듬으며 정갈하게 꾸미시던 그 모습이 뚜렷하다.

머리 때문에 할머니에 대한 추억을 소환했다.

하얀 백발에 쪽진 머리 은비녀를 꽂으신 모습은 지금도 눈에 선하다. 시골에서는 커다란 거울이 흔하지 않던 시절 벽에 걸린 작은 거울을 내려놓고 머리를 빗고 손으로 쓰다듬어 댕기를 따고 돌돌 말아 비녀로 마무리한다. 쪽진 머리는 시간도 많이 걸리고 귀찮을 텐데 항상 정갈하게 꾸미시는 모습을 보면 한 치의 허술함이 없으셨다.

93년이란 세월 동안 만고풍상을 다 겪으신 할머니의 쪽진 머리를 손자인 내가 머리를 묶게 되어 추억할 수 있게 되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아버지가 할머니께 하는 것처럼 다 하지 못해 부모님께 죄송한 마음이 든다. 어찌 보면 사소한 것이지만 할머니의 쪽진 머리 덕분에 이렇게라도 할머니와 부모님을 추억할 수 있어 좋다.

나는 오늘도 폭염에 더위를 견딜 수 없어 머리를 묶어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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