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0 ~ 70년대에는 도로 사정이 좋지 못했다.
그러다 보니 자동차가 많이 없었던 시절이라 일반적인 이동 수단은 소나 말이 끄는 마차나 자전거가 아니면 몇십 리 정도는 걸어서 다니던 때였다. 내가 사는 곳에서 장이 열리는 읍내까지 약 30리(12km) 정도다. 우리 동네에는 소가 끄는 마차가 한 대였고 옆 동네에는 말이 끄는 마차가 한 두 대 정도뿐이었다. 자전거는 그나마 먹고살만한 집에나 있을 뿐 그 또한 흔하지 않았다.
장날이 되면 동네 아주머니들은 보따리를 머리에 이고 한 손으로는 보따리를 잡고 한 손으로는 코흘리개 아이 손을 잡고 30리 길을 걸어서 다녔다. 시골에서는 농사지은 것을 장에 내다 팔아야만 돈을 만질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다. 아이들 학교 육성회비도 내야 하고 옷도 사입히고 반찬거리도 사야 하기에 발품을 팔 수밖에 없다. 남자들은 지게에 지고 아주머니들은 보따리를 머리에 이고 혼자 다니기보다는 몇 사람씩 모여서 다녔다. 그래야 먼 길 가는데 서로 이야기도 나눌 수 있고 위로도 하며 피곤함을 덜 수 있기 때문이다.
읍내에서 서는 장은 5일 장이다.
하지만 장날마다 갈 수 없다. 그 시절 시골에서는 농사 조건이 열악하여 무엇이든 대량으로 생산하지 못해 팔 물건이 계속 생기는 것이 아니라 조금씩 모이고 모여야 내다 팔 수 있을 만큼 되는 것이다. 또한 농산물을 수확한다 해도 항상 팔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상품성이 떨어지는 것은 집에서 먹고 한 푼이라도 더 받으려면 좋은 것만 골라놨다 가지고 가야 한다.
시골살이는 내다 팔기도 하지만 살 것이 더 많이 있다.
장날은 아니더라도 동네를 찾아다니며 장사를 하는 아주머니가 두 사람 있었다.
한 아주머니는 옷을 팔았고 또 한 아주머니는 생선을 파는 장사다. 커다란 옷 보따리나 생선이 가득한 큰 다라를 머리에 이고 다녔다. 지금 생각해 보면 옷은 보따리는 커도 무게가 별로 무겁지 않지만 생선은 무거울 텐데 어떻게 이고 다녔는지 모르겠다. 더군다나 생선은 광천에 사시는 아주머니가 장사를 하셨는데 생선을 팔아가며 돈으로 받아야 하지만 넉넉지 못한 농촌 살림에 곡식으로 받다 보니 집에 갈 때도 그 무게는 줄어들지 않았다.
옷을 파는 장사는 농사일이 바쁜 철에는 장사를 다니지 않았다.
일이 한가해지는 늦가을부터 겨울 동안 동네를 찾아다니며 장사를 했다. 동네 사람들이 많이 모여 있는 사랑방에 옷 보따리를 풀어놓으면 이 사람 저 사람이 집어 들어 몸에 맞춰보고 주섬주섬 고른다. 옷값은 돈으로 주는 사람, 외상을 하는 사람, 곡식으로 주는 사람 등 다양하다.
생선 장사는 다라에 비린내가 한가득이다.
주로 가지고 다니는 생선은 새우젓이나 조기, 갈치, 고등어, 멸치 등이다. 바다가 없는 시골에서는 장에 나가거나 그 아주머니가 아니면 생선을 사서 먹을 수 없다. 생선은 아주 귀한 반찬거리고 동네를 다니며 파는 장사는 유독 그 아주머니뿐이다 보니 생선 장사가 오는 날이면 동네 사람들이 기다렸다가 생선을 산다. 그리고 올 때마다 보면 생선을 남겨서 가는 적이 없었다. 특히 명절이 가까워지면 장사는 더 잘되었다. 제사상에 올릴 생선도 사야 하고 가족들이 모이면 특별한 반찬이라도 만들어야 하기 때문에 가지고 온 물건은 금세 동이 난다. 그런 아주머니는 장사를 하다 끼니때가 되면 물건을 펼쳐 놓은 집에서 동네 사람들과 어울려 끼니를 때우고 만다.
그 시절은 목이나 어깨가 견디는 무게만큼 행복할 수 있다고 믿고 살았다.
인생의 무게는 옷 보따리나 생선 다라를 머리에 이고 지게에 지어도 무겁기는 매한가지다.
그래도 살림살이가 궁핍해 먹고살기는 어려웠어도 인정만큼은 차고 넘쳤다. 돈이 부족해 조금 불편할 뿐 가진 것에 만족하고 정을 나누며 살았다. 그래서 그런지 모르겠지만 그 시절을 겪으며 살아온 기성세대들의 장래 희망이 나이가 들면 고향에 돌아와 풍요는 아니더라도 여유 있는 삶을 사는 것이라고 한다. 한평생 먹고살기 바쁘고 자식 키우고 가르치기 위해 한순간도 멈추지 못한 인생의 마지막 쉼은 고향으로 돌아와 동네 사람들과 어우렁더우렁 웃으며 살아가는 것을 바란다.
해가 지면 귀소본능이고 나이가 들면 귀향 본능인가 보다.
나이가 지긋해지면 삶에 보따리를 내려놓을 때가 되는 것이다. 인생이라는 보따리 무게에 목이 짓눌리고 어깨가 주저앉아도 고통을 드러내지 못하고 오롯이 자식 잘되기를 바라는 마음에 견뎌야 했던 인생이다. 그런 인생은 어떠한 보상을 바라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선택하고 감내해야 하는 일이었다. 그렇게 무겁던 보따리를 다 풀어내어주고 나니 남은 것이 없다. 그래도 마음이 편안하다면 더 이상 바랄 것이 없다는 말이다. 비움의 행복은 채움의 욕심도 허전함도 아니다. 오롯이 마음이 움직이는 대로 채우기도 비우기도 하며 여유롭게 살아갈 수 있는 자유로움에 있는 것이다.
이제 나도 인생이라는 보따리를 조금씩 풀어놓을 준비를 해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