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하장을 고르며
12월이 오면 나는 늘 연하장을 산다. 한 해를 마무리하고 새해를 맞이하는 나름의 의식 같은 것이다. 손으로 꾹꾹 눌러쓰는 글씨를 나는 여전히 사랑한다. 손편지가 귀해진 시절이지만, 연하장을 쓰고 우표를 붙여 우체통에 넣으며 안부를 보내는 그 느린 과정이 좋다. 문장을 고르고, 봉투를 닫는 그 짧은 시간만큼은 마음도 함께 정돈되는 느낌이다.
요즘 ‘저속노화’라는 말이 유행처럼 번지고 있다. 새삼스러운 개념은 아니다. 오히려 아주 오래전부터 한의학이 다루어온 삶의 태도와 닮아 있다는 생각이 든다. 서둘러 늙지 않는 것, 급하게 소모되지 않는 몸과 마음을 지키는 것, 느리게 살며 천천히 나이 들어가는 일. 건강한 노년이란 결국 시간을 대하는 태도에서 비롯되는 것이 아닐까.
약재를 고르고, 깨끗이 씻고, 약탕기에 올려 오랫동안 달이는 과정은 늘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한다. 빠르게 끓여내는 법도 있겠지만, 약은 그렇게 만들어지지 않는다. 충분한 시간과 기다림, 그리고 보이지 않는 정성이 필요하다. 그 시간 동안 약은 성분만이 아니라 시간과 마음을 머금는다.
모든 것이 빨라진 세상이지만, 여전히 천천히 하는 편이 좋은 일들이 있다. 무엇이든 빨리 해치우고 싶어 하면서도, 나이만은 천천히 들고 싶어 하는 이 모순적인 마음은 어쩌면 인간다운 선택적 불일치일지도 모른다.
아날로그에서 디지털로, 그리고 이제는 AI로 옮겨가는 세상 속에서 우리는 얼마나 우리의 사고와 감각을 건강하게 보존할 수 있을까. 속도를 따라가는 능력보다, 속도를 조절할 수 있는 힘이 더 중요해지는 시기인지도 모른다. 어떤 의미에서 느림은 뒤처짐이 아니라, 오히려 스스로를 지키는 방식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