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글 앞에
어릴 적 꿈은 작가였다.
놀 거리가 많지 않던 어린 시절, 방학이 오면 문학전집을 파는 아주머니들이 동네를 돌아다니셨고, 그때마다 어머니가 사주신 세계문학전집을 꺼내 읽는 시간이 참 좋았다. 책장에 줄지어 꽂힌 두꺼운 책들은 나에게 하나의 세계였고, 그 속의 활자들은 나를 붙잡았다. 마치 활자에 중독된 사람처럼, 한 줄 한 줄을 따라 읽는 일은 묘한 성취감을 주었다. 요즘에 유행하는 필사처럼 그 문장들을 다시 200자 원고지에 옮겨 적는 일 또한 나만의 놀이였다.
고등학교 때 국문과에 가고 싶다고 했던 내게 아버지는 담담하게 말씀하셨다. 글은 의사도, 교수도 쓸 수 있다고. 그렇게 나는 문학소녀의 마음을 접고 수학과 과학을 공부하기 시작했고, 부모님의 바람에 따라 전공을 선택했다. 지금 돌아보면 그 선택에 대한 원망은 없다. 덕분에 큰 굴곡 없이 여기까지 왔고, 사회적으로도 안정적인 삶을 살 수 있었다. 그 판단이 당시로서는 가장 현실적인 선택이었음을 이제는 이해한다.
다만 그 이후의 시간 동안, 책과 글쓰기는 내 삶의 중심에서 점점 멀어졌다. 대입 준비를 하던 시기부터 한의대 재학, 전공의 과정, 유학과 신임 교수, 그 과정에서 아이 셋을 키우며 살아온 치열한 시간까지, 내 책장은 전공서적으로 채워졌다. 읽고 쓰는 글 또한 연구와 진료, 교육을 위한 문서들뿐이었다. 문학과는 어느새 오랫동안 담을 쌓은 사이가 되었다. 육아와 일을 병행하는 삶은 나에게 잠시의 여백도 허락하지 않았고, 글을 쓴다는 것은 늘 우선순위에서 밀렸다.
육아가 조금씩 끝나가고, 일에도 조금 여유가 생기기 시작했을 때, 나는 다시 글을 쓰기 시작했다. 특별한 계기가 있었던 것은 아니다. 다만 어느 순간, 활자가 다시 살아 움직이는 느낌이 들었다. 내가 좋아했던 단어들이 머리속에 떠오르며 유영하고, 문장이 다시 연결되기 시작했다. 새로운 단어를 발견했을 때의 작은 설렘, 오래전에 알았던 나를 다시 만나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돌이켜보면 글을 쓰고 싶다는 마음은 사라진 적이 없었다. 삶의 여러 역할들 아래에서 밀려나 있었을 뿐. 오래 잊고 지냈던 즐거움을 다시 확인한다. 활자 곁에 머무는 시간. 그 시간이 다시 생겼다는 사실만으로도, 지금은 충분히 감사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