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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타클로스의 희망

아직 산타를 믿는 이유

by 불멍

어느새 연말, 크리스마스이브다. 어릴 적 머리맡에 놓여 있던 선물들. 나는 산타클로스의 존재를 남들보다 꽤 늦게까지 믿었던 것 같다. 정말로 믿었던 것인지, 아니면 믿고 싶었던 것인지는 이제 잘 기억나지 않는다. 다만 산타를 부정하는 순간, 더 이상 산타는 오지 않을 것이라는 사실만큼은 어렴풋이 알고 있었던 것 같다. 그래서였을까. 끝까지 모른 척하며 그 믿음을 놓지 않았던 것일지도 모른다.

살다 보면 안 될 것을 알면서도 희망을 쉽게 내려놓지 못할 때가 있다. 현실적으로는 이미 답을 알고 있으면서도, 마음 한편에서는 끝까지 가능성을 붙잡고 싶어질 때. 간혹 그 희망이야말로 삶을 지탱해주는 마지막 끈이 되기도 하기 때문이다. 삶이 유한하다는 사실은 누구나 알고 있지만, 우리는 대부분 삶의 끝을 생각하지 않으며 살아간다. 끝을 떠올리는 순간, 지금의 소소한 기쁨과 기대마저 함께 사라질 것 같아서다. 그래서 애써 생각하지 않은 채 하루하루를 이어간다.

진료실에서 만나는 통증 환자들의 대부분은 몸의 통증만을 안고 오지 않는다. 오래 지속되는 통증의 뒤편에는 대개 오래된 감정과 마음의 문제가 함께 자리하고 있다. 그래서 진료 과정에서 한방신경정신과로의 협진을 의뢰하는 경우도 드물지 않다. 검사상 뚜렷한 구조적 이상이 없는데도 통증이 쉽게 가라앉지 않는 이유는, 마음의 문제에 있는 경우가 많다. 한의학에서는 심신의학이라 하여, 몸과 마음을 분리해 이해하지 않는다. 최근 현대의학 연구들 역시 감정과 스트레스가 자율신경계의 조절 이상을 통해 통증으로 이어질 수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만성 스트레스는 교감신경의 지속적 항진과 부교감신경 기능 저하를 초래하고, 그 결과 통증 역치가 낮아지며 근긴장 증가와 혈류 조절 이상이 동반된다. 이러한 자율신경계의 불균형은 검사상 특별한 이상이 없어도 통증이 지속되는 중요한 이유 중 하나로 이해되고 있다.

어느 날 문득, 살아온 날보다 살아갈 날이 더 짧게 남았다는 사실을 자각하게 된다. 그때부터는 수명이 아니라 ‘어떻게 살아갈 수 있는 시간인가’가 더 중요해진다. 한의학에서 말하는 건강은 단순히 질병이 없는 상태가 아니라, 우리 몸의 기혈이 원활히 순환하고 마음이 안정되어 일상생활을 스스로 영위할 수 있는 상태를 말한다. 다시 말해 중요한 것은 얼마나 오래 사느냐보다, 언제까지 나답게 움직이고 느끼며 살아갈 수 있느냐다.

퇴직까지 남은 시간, 그리고 그 이후를 헤아려보면 온전히 건강하게 살아갈 수 있는 시간은 생각보다 길지 않다. 그렇다면 그 소중한 시간을 여전히 누군가에게 상처받고, 상처 주고, 불안과 긴장 속에서 소모하며 살아가는 것이 과연 옳은 일일까. 올바른 순환이 막히면 통증이 생기듯, 마음에 쌓인 감정의 울체 역시 삶을 무겁게 만든다. 덜 애쓰고, 덜 흔들리며, 기운을 아껴 써야 한다.

산타클로스의 희망은 선물이 저절로 하늘에서 떨어지기를 기다리는 마음은 아닐 것이다. 다만 오늘의 선택이 내일의 몸과 마음에 조금씩 쌓여가고, 그 시간들이 헛되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 무리하지 않고 속도를 늦추며, 삶을 돌보는 태도에 가깝다. 내년의 내가 올해보다 조금은 덜 아프고, 덜 불안하고, 조금은 더 단단해지기를 바라는 소망. 어쩌면 건강수명이란 거창한 목표가 아니라, 이런 작은 희망들을 하루하루 지켜내는 과정일지도 모른다. 그렇게 차곡차곡 쌓인 시간의 끝에서, 나는 오늘보다 조금 더 담담하게, 그리고 조금 더 당당하게 나의 삶을 돌아볼 수 있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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