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성장시킨 호주 연대기
'역치'란 생물이 외부환경의 변화, 즉 자극에 대해 어떤 반응을 일으키는 데 필요한 최소한의 자극의 세기라고 한다. 하지만 역치 앞에 제목과 같은 힘듦을 넣음으로써 이때의 역치는 힘듦을 견딜 수 있는 최소한의 수치라고 표현할 수 있겠다. 쉽게 말해 역치가 높다는 건 "견딜 수 있는 힘이 세다"라고 할까.
요즘 같은 시대에 스트레스는 정말 많은 것을 포함한다. 직장을 구하기 위해 공부하는 것, 직장에서 동료들과의 관계, 자신의 경제적 상황, 심지어 저녁으로 무엇을 먹을지 고민하는 것조차 스트레스로 다가올 때가 있다. 나는 이러한 스트레스를 견디는 역치가 높다. 이를 설명하기 전 약 8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가 본다.
때는 2013년 대학을 졸업하고, 무작정 서울로 상경해 인턴생활을 시작했다. 많은 유능한 사람들 중에 내가 왜 뽑혔는지는 아직도 의문이지만, 어쨌든 6개월간의 인턴생활이 시작되었다. 당시에 사귀던 여자 친구와 헤어졌고, 나는 방황했다. 매일같이 술을 마셨다. 주말만 되면 돌아선 여자 친구를 돌리기 위해 고향으로 향하는 버스에 올랐다. (약 4~5개월 간 주말마다 찾아갔던 거 같다.) 인턴을 하는 회사에 취직하기 위해 노력하지 않았고, 내 생활은 붕 떠버렸다.
붕 떠버린 내 생활과 앞으로 무엇을 하고 살아야 할지의 생각을 정리하기 위해 무작정 호주로 워킹홀리데이를 떠났다. 수중에 120만 원밖에 없고 아무 계획이 없었지만, 호주의 햇빛은 강렬하다기에 30만 원짜리 선글라스를 구입했다. 90만 원 들고 도착한 시드니. 이제 어떻게 해야 하지? 막막하기만 했다. 일단 방을 잡은 후 과거 호주에 먼저 가서 일을 했던 친구에게 전화해 조언을 들었다. "내가 전에 일했던 곳으로 가봐라."
다음날 다시 무작정 비행기를 탔다. 도착한 곳은 브리즈번 근처에 있는 '누사'라는 작은 시골마을. 바닷가를 끼고 있어 세계 여러 곳에서 서핑이나 휴양을 위해 찾는 곳이었다. 그곳에 도착해서 2차 멘붕이 왔다. 이제 어떻게 해야 하지?
어둠이 내리깔리고, 숙소를 잡기 위해 무수히 뛰어다녔다. 지리도 모르는 곳에서 숙소를 잡기란 하늘의 별따기였다. 어쩔 수 없었다. 바닷가 옆에 앉아 컵라면을 먹으며 생각했다. "하.. 괜히 왔다.."
라면을 먹은 후 바닷가 모래사장에 자리를 잡고 누웠다. 배낭에 있는 긴팔을 다 꺼내서 겹겹이 입고 잠을 청했다. 너무나 추웠다.
다음날이 되어서도 저녁까지 숙소를 잡으러 다니느라 진을 뺏다. 다시 어둠이 깔리고, 내가 분주하게 돌아다니는 모습이 안타까웠는지, 나이가 꽤 있어 보이는 호주 아주머니가 나를 불러 말을 걸었다. 내 상황을 설명하니, 본인의 집에서 자고 가란다. 단, 아이들이 오해할 수 있으니, 새벽에 왔다가 몇 시간 자고 바로 가라. 너무 고마웠다. 지금은 얼굴도 기억이 안나는 아주머니지만, 그 감사함은 아직까지 간직하고 있다.
다음날 운 좋게 백패커에서 생활할 수 있었고, 다시 오랫동안 머물기 위한 셰어하우스를 찾기 시작했다. 2일이 걸려 운 좋게 일주일에 140불짜리 방을 구할 수 있었다. 내가 가진돈은 이제 약 70만 원 정도인데, 마음이 급해졌다. 셰어하우스에 들어간 다음날 나는 바로 이력서를 만들었다. 주인아주머니에게 자전거를 빌리고, 무작정 바닷가 옆으로 향했다.
바닷가 옆은 분위기 좋은 카페와 레스토랑들이 즐비해 있었고, 그 초입에 친구가 말한 레스토랑이 자리하고 있었다. 무작정 들어갔다. 이력서를 보여주며 일을 하고 싶다고 했더니, 내일부터 당장 나오란다. 아니 이렇게 쉽게..? 운이 좋았다. 마침 디시 워셔를 구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지금 생각하면 그리 세지는 않지만, 그때 당시 내가 체감하는 호주 시급은 굉장히 셌다. 시간당 21불, 주말엔 24불.
다음날부터 일을 하기 시작했다. 바닷가 바로 옆에 자리 잡은 분위기 좋은 레스토랑이었는데, 이거 웬걸 약 10명쯤 되는 셰프가 있었고, 디시 워셔는 2명이었다. 그 2명이 셰프가 한번 쓰고 바구니에 넣어둔 집기며 프라이팬이며, 모든 걸 돌아다니며 수거하고 씻어서 다시 배달해야 했다. 손님은 또 왜 이렇게 많던지, 잠깐 자리를 비우면 접시와 커피잔들이 빼곡히 쌓여있었다. 헤드 셰프는 내가 일을 열심히 한다고 좋아했지만, 여러 명의 셰프 중에 꼭 모난 셰프가 있었다. 인도네시아에서 온 셰프였는데, 꼭 내가 실수할 때마다 안 좋은 말들과 안 좋은 표정으로 나를 기분 나쁘게 했다. 이름은 기억이 나지 않는다.
처음에는 정말이지 너무나 힘들었다. 10시간 설거지를 하면 기본적으로 5개 이상의 고무장갑을 썼고, 온몸에 음식 냄새가 배었다. 잠시도 쉬지 않았다. 대부분의 유럽인들은 2주 정도 하고 다 도망간단다. 하지만 우리는 군대에서 약 2년이 안 되는 시간을 견뎌낸 전력이 있기 때문에, 이 정도는 괜찮았다. 아무리 힘들어도 버틸 수 있는 힘이 있다.
무작정 설거지만 하기에는 내 시간이 아까웠다. 하지만 돈을 벌어야 하니, 대신 설거지를 하며 미래를 생각했다. 앞으로 뭘 하고 살아야 할지 90프로, 헤어졌던 전 여자 친구의 생각 10프로. 정말이지 10시간이면 9시간 이상을 생각하는데 시간을 쏟았다. 그렇게 나는 일을 마치는 순간까지 생각에 생각을 거듭한 뒤, 앞으로 내가 나아가야 할 방향을 잡는 데 성공했다. 한국에 도착하기만 하면 내가 계획한 목표대로 실천하리라.
약 한 달 정도 지나니 다시 살만해졌다. 새벽 6시부터 오후 4시까지 약 10시간을 설거지만 했다. 남는 시간에 뭘 하지? 딱히 뭘 하고 싶지 않았다. 영어 공부하러 학원을 다닐까?(그 작은 시골마을에 한국인은 많지 않았다. 어학원은 한국인들이 모이는 커뮤니티의 역할을 했지만, 이렇게 먼 나라까지 와서 한국인과 노는데 시간을 쏟고 싶지 않았다.) 아님 근처로 여행을 다닐까? 10시간 일해서 번 돈을 쓰기가 아까워졌다. 목표를 세웠다. 한국에 돌아가서 차를 사야겠다. 어렸을 때부터 부모님은 운전을 하지 않으셨기 때문에 우리 집엔 차가 없었다. 당시 내 나이 27살. 이제 차를 몰아도 되는 때라고 생각했다.
그날부터 난 돈에 미쳤다. 4시 이후에 할 수 있는 세컨드 잡을 찾기 시작했고, 또 운이 좋게 첫 번째 직장에서 도보로 약 30분 거리의 레스토랑에 취직할 수 있었다. 5시부터 1~2시까지 일을 할 수 있는 곳이었다. 내가 버틸 수 있을까? 역시 의지의 한국인, 첫 번째 레스토랑에서 10시간 접시를 닦은 뒤, 두 번째 레스토랑 옆 벤치에서 맥주를 마셨다. 약 두병 정도를 빠르게 마신 뒤, 두 번째 레스토랑에서의 접시닦이가 시작됐다. 그렇게 6개월 정도를 일했다.
하루에 적게는 15시간에서 많게는 18시간까지 일했다. 새벽 한두 시가 되어 집에 가서 샤워를 하고 빠르게 잠에 들기 위해 다시 맥주 한 두 캔을 마셔야 했다. 잠이 드는 순간에는 손가락이 마비되어 움직이지 않았고, 일어날 때도 손가락이 움직여져야 일어날 수가 있었다. 우리네 어머님들이 손가락이 아프다고 한 이유를 그때야 알았다. 나의 어머니는 몇십 년을 이렇게 고생하셨구나. 마음이 아팠다.
돈은 정말 아껴 썼다. 방값과 약간의 맥주값과 과일, 견과류와 등등. 대부분의 식사는 레스토랑에서 해결했다. 목표가 있으니 가능했던 일이었다. 6개월을 그렇게 일을 하니 약 31,000불의 돈을 벌었다. 물론 위에서 말한 것들 때문에 다 가져가진 못해도, 내 인생에서 내가 가장 열심히 일해 가장 많은 돈을 만져본 때였다. 이제 한국에 돌아가서 차를 사리라. 황홀했다. 내 힘으로 사는 첫차라니!
일을 모두 마친 후, 우연히 고등학교 동창이 시드니에 있다는 걸 알게 되었다. 그 친구는 청소를 했는데, 돈은 꾀나 버는 듯했다. 모든 짐을 싸서 시드니에서 친구와 약 3일(딱히 그때도 무언가를 하지는 않았다.), 대학 후배와 대학생활의 추억을 곱씹으며 저녁식사 한 끼. 멜버른으로 향해 약 1년 전 베트남 어학원에서 만난 동생과 1~2일 정도 시간을 보낸 후 한국행 비행기에 올랐다.
뿌듯했다. 마치 금의환향하듯 한국에 도착했지만, 6개월간 고생하며 너무도 상해버린 내 모습이 안쓰러워 피부를 연구하는(지금은 아주 유명해진) 친구에게 관리를 한번 받고 화장품을 구입했다. 그리고 학원을 운영하는 후배에게 찾아가 낮술을 한잔 한 후, 낮잠을 잤다. 그리고 집으로 향했다. 보고 싶던 엄마 아빠와 만났고, 다음날 나는 바로 차를 사기 위해 따시 떠났다. 차를 구입한 후 약 일주일은 쉬고, 놀았다. 보고 싶던 친구들도 만났고, 계획을 실행하기 위한 몸과 마음의 준비를 했다. 그 이후로 난 약 3년 반 동안 계획한 일에 매진했고 결국에는 성공했다.
호주에서부터 였던 거 같다. 내가 힘든 상황을 견디는 역치가 높다고 느껴진 게, 군대인가? 싶기도 하지만, 군대는 대한민국 성인 남성이라면 누구나 다 견뎌내기 때문에.. 호주의 이야기 또한 많은 사람들이 겪어봤을 이야기다. 나보다 더 한 사람도 있었겠지. 하지만 나는 이를 통해 얻게 된 어려움을 극복하는 능력에 대해 말하고 싶다. 호주에서의 나는 표면적으로 15~18시간을 일하는 외국인 노동자였지만, 머리와 가슴으로는 지금까지의 나의 모습에 대한 고찰과 함께, 앞으로 무얼 할지 생각하고, 계획하는 고되고 귀한 시간이었다.
생각하는 시간이 고되어서, 몸은 죽을 만큼 힘들지 않았다. 어쩌면 조금 늦었다고 생각할 수 도 있는 27살의 나이에 정체성을 확립하게 되었고, 진짜 내가 해야 하는 일, 내가 좋아하는 일이 무엇인지 깨달았다는 게, 지금 생각하면 그때만큼 깊게 나에 대해 생각해본 적이 있었을까? 그때만큼 나를 위해 시간을 쏟아본 적이 있었을까? 생각이 든다.
그 이후로 나는 웬만한 고됨은 두렵지가 않았다. 작은 체구이지만, 특히 몸의 고됨을 겪는 것쯤은 아무것도 아니었다. 지금은 시간이 지나 조금 덜해졌지만, 여전히 몸과 마음의 강함을 갈구한다. 몸만큼 마음도 튼튼해져야 스트레스를 견딜 힘이 생긴다. 오늘도 이런저런 일로 스트레스를 온몸으로 받는 사람들에게..
몸도, 마음도 살찌우길 바라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