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안의 생각장난 -7-

시간 창고 이야기

by 생각소년 김영안

적당히 강한 자 대 적당히 강한 자의 싸움은 적당히 싱겁다. 뒤돌아 도망치면 끝나니까 그렇다.

진짜 강한 자 대 진짜 강한 자의 싸움은 다르다. 반드시 하나 죽어야 하니까 그렇다.

고대 로마 귀족들이 원형경기장에서 괴성을 지르며 좋아 죽었던 것도 검투사 대 검투사, 둘 중 하나 죽는 모습을 보는 희열에서였다.


아홉 살 때였던가, 윤봉이가 동네 애들을 산으로 데려가 병정놀이 시킬 때였다.


“여기 뱀 있다, 여기 뱀 있다.”

“내가 잡아줄게 내가 잡아줄게”


용감했던 나와 용감했던 뱀의 싸움도 내가 장렬히 산화하는 것으로 끝났다.


"엄마,

나 죽으면 앞산에 묻지 말고 뒷산에 묻어 줘,

엄마 물 길러 다닐 때 보게 “

효종이 할머니가 와서 나를 보고 나가며 말했다.

"어멈, 맘 단단히 먹어야겠다."


턱, 턱, 곡괭이 자루를 끼는 소리,

스각스각, 조선낫을 가는 소리,

아버지는 영안이에게 살아있을 때 못 해본 효부(孝父)

죽은 후에라도 해 보겠다는 듯

나 파묻을 연장을 손보고 있었다.


엄마가 조석으로 길던 물웅덩이엔 매일 소금쟁이가 물 위를 걷는 기적을 보이고 있었다.


‘그래, 이번엔 얘 하고 한 번 겨뤄 보자 ‘


이놈과의 기적 싸움에서 이기고 돌아온 나는 세상이 이렇게 예쁜 그림인지 놀랐다.

방 안에서만 사십일 갇혔다 나오니 까맣게 잊었던 바깥세상이 신비했다.


마당 아래에선 호박이 늙고 있었는데 내가 다시 살아 저 풍광을 볼 수 있게 된 것이 이 호박 덕이다. 늙은 호박을 으깨 발등에 싸맸는데 그것이 전신의 뱀독을 해독해 준 것이다.

그 후 나는

'내 생에 넝쿨째 굴러온 호박'을 예찬하며 여태껏 살고 있다.


호박꽃에겐

호박벌이 있더라.


지나치게 뚱뚱한 몸에

지나치게 작은 날개여도


몸뚱이 가득 꽃가루 싣고

천리를 나는 사랑,


먼 곳까지 기어가며

여름날들을 포용하는 잎사귀 밑에서

모나지 않게 한 삶을 익고

세상을 해독하는 호박.


집 옆엔 한아름 대추나무가 있었다.

나무 꼭대기에 철선으로 만든 안테나를 매어 라디오를 들었는데

대통령 선거 개표하는 밤

박정희와 김대중이 엎치락뒤치락하는 상황에서 아버지의 밤은 초주검이었다.


나무 앞에 미끄럼 타고 놀던 바위도 있었는데 나중에 크고 나서 가 보니 바위라기보다는 조금 큰 돌에 불과했다.


유년기에는 모든 것이 컸다.

엄마도 컸고 엄마의 신발도 컸다.

마당도 컸고 추녀에 매달린 고드름도 컸다.

방 윗목엔 고구마 통가리가 있었고

중간목엔 콩나물시루가 있었는데

하여간 컸다.


작았던 나에게 그것들은 컸지만

커진 나에게는 한낱 작았다.

공간이 내 느낌 속에서만 크거나 작았듯

시간도 기억한 만큼만 길거나 짧았다.


런던으로 가는 하루는 길었다.

새벽에 일어나 공항으로 갔고

발권을 했고

옆에 탈 사람은 여자일까 아닐까를 궁금해하며 탑승했다.

가끔 스튜어디스가 뭐 도와줄 거 없는지 기웃기웃하며 다녔다.

비어를 한 캔 더 달래도 될까 안 될까 눈치 보다가

몸을 비틀어도 보다가

히드로 공항에 내렸다.

택시를 타고

호텔을 잡고,

그날은 하루가 얼마나 길었던가.

순간이 일상이 아닌 새것이라서

뇌가 모조리 담았기 때문이리라.


뇌는 경험 창고다.

경험은 기억 창고다.

기억은 시간 창고다.


현상에 대해 왜냐고 묻는 호기심과 도전,

그것이 오래 사는 길이지 않을까.


시간을 많이 차지하고 싶으면

내일,

오늘보다

'다른'

내일을 살아야 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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