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안의 생각장난-12-

다닥다닥의 미학

by 생각소년 김영안

향님의 집 마당 끝엔 앵두나무가 있었다. 호두나무가 있었고 오디나무가 있었는데 후덕한 부모는 동네 애들이 따먹어도 가만히 놔뒀다.

나도 향님이만 못 따먹고 다 따먹었다.


그는 공부를 잘했다.

1학년부터 6학년까지

반장을 했고, 수만 받았고, 예뻤고, 착했다.


향님에게선 향님의 향이 났다.

그의 향은 갓 자라 올라오는 로즈마리였다.

그의 향은 엄마가 때는 불 저녁연기였다.

그의 향은 욕조에서 나온 여인의 아직 마르지 않은 머리였다.

나는 그를 앵두소녀라고 이름 짓고 간직했다.


그는 늘 다닥다닥했다.

그는 늘 다닥다닥다닥 하얗게 폈다.

그는 늘 다닥다닥다닥다닥 빨갛게 익었다.


나는 소녀의 마당에서 손으로는 앵두를 땄고 눈으로는 소녀를 땄다.

앵두밭의 나를 훔쳐보던 소녀는 누구에게 가서 익었을까?


소유한 것은 소멸하지만 간직한 것은 간직된다.

그래서 소유한 사랑보다 간직한 그리움이 길다.


앞모습은 반드시 뒷모습을 남긴다.

앞모습이 없었던 나의 그리움도

뒷모습이 없어서 사랑보다 예뻤다.


예쁜 것과 잘생긴 것은 다르다.

예쁘다는 느낌일 터고 잘생기다는 인식일 터다.

전자는 감성이고 후자는 이성일 터다.

전자는 주관이고 후자는 객관일 터다.


그럭저럭 생겼어도 예쁜 사람이 있고 빼어나게 생겼어도 안 예쁜 사람이 있다.

이목구비를 자로 재 배열한 얼굴도 있다. 박은혜다.

그는 학생중앙 표지모델로도 나갔지만 예뻐한 남자가 없다.


정작 남자들이 바글바글했던 애는 눈이 크고 입이 작은 경란이었다. 그는 눈과 눈 사이가 좁았고 눈동자가 깜했다. 광대뼈는 전혀 나오지 않았고 입은 콩알만 했다.


저 입엔, 혀를 강력히 밀어 넣지 않고는 키스가 불가능할 것 같았는데 그럴수록 애들은 몸을 비틀었다.

가끔씩 입을 열어 쪼르륵 예쁜 여섯 개의 앞니로 애간장을 더해줬다.


잘생기기로 말하면 이영하이고 못생기기로 말하면 송강호다.

잘생기지도 못하고 예쁘지도 않은 송강호가 좋아함을 받는 건 소임에 충실하기 때문이다. 그의 소임은 연기다.


좋아하는 것과 사랑하는 것도 다르다.

온 국민이 송강호를 좋아할망정 세상의 어떤 여자가 그를 사랑하겠는가.

송강호보다 더 못생긴 남자도 있다. 발라드 황제 김범수다.

목소리 믿고 미팅 나갔다가 기절한 여자가 많다고 한다.


잘생기고 못 생기고와는 무관한 생김도 있다.

촌스러움이다.

유해진이다. 오달수다.

그러나 이상한 일이다.

적당히 촌스러운 애들에게 의외로 여자가 많다.

내 친구 이종윤이 그렇다.


내 친구 이종윤은 포도송이다.

그의 곁엔 온갖 사람들이 다닥다닥 붙었는데

특히 여자가 많아 우린 부러움의 눈빛으로 바라보곤 했다.


헌 섬에 곡식 많이 들어가는 까닭일까,

어눌한 말 뱉어놓고 제 혼자 웃는 그에게

온갖 여자들이 다닥다닥하니

때 빼고 광낸 효석이는 억울하다.


덩치 큰 수박보다 포도가 정다운 건

작지만 고만고만한 것들이 바글바글 모여

새까만 눈동자를 꼭 맞추고 있기 때문


정작 개구리밥이 연꽃보다 어여쁜 건

맨살이 맨살끼리 모여

그리움에 그리움을 맞대고 있기 때문.


나도 덩치를 키울 게 아니라

포도송이로

개구리밥으로


그대 눈동자 안에 있는 그대 그리움에

그대 맨살에 묻어 있는 그대 아픔에

내 눈동자 맞추고 맨살 대야겠다.

종윤이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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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벤트레스토랑 작은 영토 2에서 열린 무대 열린 방송을 운영한 적이 있다. 김세환이 와서 [토요일 밤에]를 불렀고 임창제가 와서 [편지]를 불렀다. 내 열 손가락 중엔 유익종이 예뻤다. 김신우의 열창은 몸을 비틀지 않고는 바라볼 수가 없었다. 윤형주도 세우고 싶었으나 아버지 잘 만나 배고프지 않다고 안 왔다. 유리상자 박승화가 예뻤는데 걔 뜰 줄 알았다.


대상 500만 원짜리 주부가요제가 인기였는데 참가자 선정은 서류심사 없이 면접으로 했다.

기준은 엄격했고 과정은 공정했다. 못 생겼으면 합격, 잘생겼으면 불합격이었는데 잘생긴 사람은 이미 많은 기회를 받았으므로 못생긴 사람을 우선해야 한다는 게 진행자 정표의 고집이었다.


그의 미추 기준은 전원주였다. 전원주보다 못 생겼으면 합격, 전원주보다 잘 생겼으면 불합격을 줬는데 대부분 무난히 합격했다.

남자의 미추 기준은 양택조였다. 주부가요제였으므로 금남이나 게스트 기회가 있었는데 양택조보다 못생긴 사람에 한해서였다.


얼굴 잘생기고 못생긴 건 남녀불문 부러움이고 한이겠으나 진짜 콤플렉스는 탕(湯) 콤플렉스다.

남탕에서 큰 놈들은 배를 쭉 빼고 다닌다.

허리를 뒤로 젖히고 어기적 어기적 다닌다.

안 다녀도 될 곳을 여기저기 다닌다.


쬐끄만 놈들은 허리를 구부리고 앉아 힐끔힐끔 본다.

눈이라도 마주치면 얼른 바가지로 가린다.

고깟 것 비눗갑으로 가려도 될 걸 바가지로 가리냐는 듯 괘액괘액거리며 또 몸을 튼다.


여탕에선 빈모다.

수북한 애들은 큰놈들 하는 짓과 비슷하고

몇 가닥 애들은 고깟 것 애들과 비슷하다.

나이 든 남자들의 걱정거리는 탈모다.

옷에 퇴화당한 털이지만 아직 위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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