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안의 생각장난 -18-

여태껏 붉은 석양

by 생각소년 김영안

시대의 어둠과 달리 하루의 어둠은 길수록 좋았다.

아홉 식구 한 방에서 자니 나는 장롱을 빼놓고 뒤에 들어가서 공부했는데 엄마가 가끔 야단쳤다.

석유 아껴야 한다고 자라는 거였는데 그게 석유 아까워서가 아니었음을 안 것은 한참 후였다.


희망등이 나와서 방을 밝히고부터 엄마의 밤은 더 까매졌다.

호야가 좁았고 한 뼘 정도의 크기였는데

요 작은 것이 등잔불을 껐고 남포등을 눌렀다.


엄마의 시름은 말이 아니었다.

영안이, 저것이 대낮 같은 불 앞에서 눈에 불을 켜고 있으니

밤의 희망이 흑망(黑亡)이 됐던 것이다.


전기가 들어온 해, 개구리들이 겪었던 수난이 컸다.

전깃줄을 개울로 끌고 가 스위치를 눌렀다 떼었다 하면 찌릿찌릿,

개구리들은 뻗거나 뛰쳐나왔다.

고문 기술자 이근안이 김근태를 그렇게 한 건 한참 후의 일이다.


경칩이 지나고

진달래 붉은 사월에 시를 썼다.


-----


진달래 꽃


원피스 투피스 없던 시절

볼 발간 새색시 모습인 듯


앞산 뒷산 한꺼번에 피는

4.19 붉은 넋 함성인 듯


달, 진다 하여 진달래라니

희생의 꽃


진 달, 내솟는다 하여 진달래라니

부활의 꽃.


이것이 내가 태어나 처음 쓴 글이었는데 함석헌이 발행하는 씨알의 소리에 실렸다.


-----


통일


봄의 군단에

저지선이 무너졌어요.


포위된 성은

버틸 힘이 없어요.


투항하세요, 적장에게

나를 노예로 써달라고

손 드세요.


행복한 항복


꽃군에 점령된 영토는

온통, 적화통일입니다.


이걸 발표했는데 경찰서 정보과에서 형사 둘이 왔다.

적화통일을 고무 찬양했다고 구속하겠다는 뜻이다.

나는 적화의 화자가 될 화(化)가 아닌 꽃화(花) 자라고 우겨 돌려보냈는데

하마터면 필화 사건으로 누구처럼 유명해질 뻔했다.


-----


겨울이 지나고 나면 나의 시간은 고단해진다

농사의 주적은 풀이다. 바랭이다. 쇠뜨기다. 쇠비름이다.

매고 돌아서면 금방 수북해지는 바랭이는 차라리 저주의 풀이었다.

쇠뜨기도 그렇다.

곧은 뿌리가 길어 끝에 은방울이 달렸다고 했다.

쇠비름은 다육이라서 뽑아 돌 위에 얹어 놓아도 고개를 든다.


한때 이것이 암치료에 좋다고 밭마다 사람들이 엎드렸었다.

겨우살이가 그랬고, 민들레가 그랬고, 돼지감자가 그랬다.

그렇게 좋으면 유한양행에서, 종근당에서 약제화했지 그냥 뒀겠는가.


대중들은 기적이나 신비주의에 기대려는 속성을 갖고 있다.

그것들의 뿌리는 쇠뜨기처럼 깊다.

이런 심리를 이용해 돈 버는 자들이 많다.

특히 다단계다.


간을 씻어준다느니

혈관을 뚫어준다느니

주름을 없애준다느니

이들이 파는 건 하나같이 신비의 영약이다.


어렵게 어렵게 작업해 사귐을 시작했던 여자가 있다.

인근 시의 바리스타였는데 예뻤다.


여름 내내 공을 들였다.

지나갈 일도 없는데 지나가는 참이었다고 했다.

아메리카노만 먹는 나였지만

관심도 끌 겸 환심도 살 겸

고구마 라테도 먹었다. 블루베리 요거트도 먹었다.


이렇게 공들여 전화번호 따고

차를 태웠는데,

아, 글쎄

이 자가 다단계였는지

뇌가 젊어지는 식품이라며 구매를 요구했다.


"어이쿠, 몸은 늙었는데 뇌가 젊으면

그게 기형이지 어찌 정상이겠냐"라고 거절했더니 그날로 베었다.


아, 한 세트 60만 원,

그냥 팔아줄 걸 그랬나


그날

영종도 큰 물속으로 지던 석양만

여태 붉다.

작가의 이전글김영안의 생각장난 -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