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월의 강은 기억으로 흐른다.(1)

외가에서 보낸 추억

by 박상준


어린 시절, 강 언덕 짙은 갈대가 서로 부딪히며 바람에 자신의 소리를 실어 보내는 광경을 본 적이 있는가. 희미한 기억 저편 먼지가 쌓인 추억이지만, 아직도 꽤 선명하게 기억되는 일이 있다.


태양의 고도가 정점을 지나고 오후 햇살이 얼굴을 발갛게 물들이는 즈음, 흐르는 강물 옆에서 한쪽으로 몸을 누인 채 소리인지 음악인지 구분하기 어려운 음향이 그렇게 들려왔다. 엄마가 입은 남색 땡땡이가 수 놓인 하얀 한복 주름이 바람에 펴졌다 구겨짐을 반복하고, 땡땡이가 빛을 받아 움직일 때마다 어린아이의 마음은 풍선을 타고 더 높은 하늘로 날아오른다.


강가, 버려진 나무로 만든 배 안에는 이미 고인 물로 흥건하다. 회색빛 갯벌은 온통 작은 게들로 가득하고 게는 바스락거리는 인기척에 놀라 제 구멍으로 들어가기 바쁘다. 강물 색깔은 아무리 떠올려보려 해도 잘 기억에 새겨져 있지 않다. 따스한 엄마의 손길과 환하게 웃는 어른들 사이(아마 아버지와 이모)에서 아이는 천진난만하게 걱정 없이 그냥 환하게 웃으며 시간이 주는 혜택을 만끽했다.


그날의 기억이 왜 그렇게 또렷하면서도 따스하게 느껴지는지 모를 일이지만, 아마 그날이 어린 내가 느끼기에도 유난히 기분 좋았던 날이었나 보다.


기억 저편에 자리한 외가댁이 있던 작은 마을 덕두리(德斗理)의 강변 풍경이다. 아마도 이것은 내가 어릴 적 초등학교에 입학하기 전인 5~6세쯤에 일어난 일이 아닐까 한다.


당시에도 부산이 전국에서 두 번째로 큰 도시였지만, 지금과는 비교하기 어려운 정도로 열악한 사회 기반시설과 도로망을 갖추고 있었기 때문에 도심을 벗어난 시 외곽 경계는 거의 70년대 농촌과 같은 모습을 하고 있었다. 현재 부산 강서구의 강변도로를 타고 가다 김해 국제공항으로 진입하는 입구가 덕두리다.


경상남도와 부산을 가르는 낙동강 하구에 있는 구포(龜浦, 거북이가 강물 속을 거슬러 오르듯, 낙동강 어구에서 소항 하는 하항(河港)의 성격을 안은 데서 붙여진 이름이다.)는 조선 시대부터 농산물과 어염(魚鹽)의 집산지로 활기를 띠었다고 한다. 개화 과정에서 경부선이 지나면서 수륙교통의 요지가 된 구포와 경상남도 김해를 이어주는 유일한 다리가 바로 구포다리다. 일제 강점기에 놓인 다리가 내 어릴 적에도 이 두 지역을 연결하여 차량과 사람이 건너 다니는 중요한 통로가 되었다.


구포다리를 건너면 포장도로는 끝이 났다. 차가 지날 때마다 뿌연 먼지가 플라타너스 나뭇잎에 겹겹이 쌓이고 뜨거운 여름날 길을 지나던 자전거를 순식간에 사라지게 만드는 비포장도로는 끝이 보이지 않게 강변을 따라 쭉 남쪽으로 명지(鳴旨)를 향해 뻗어 있었다.


명지는 낙동강의 끝자락에 위치하여 진해로 가는 관문 역할을 하고 있었다. 부산 서쪽에 사는 주민이 하단에서 을숙도를 거쳐 배로 건너 다녔다. 내 어린 시절 명지는 파와 재첩의 주요 산지로 유명했다. 지금 이곳에는 거대한 신도시가 들어서 있어 상전벽해(桑田碧海)가 바로 이를 두고 생긴 말이리라.


오일장이 서던 구포는 부산에서 서부 경남으로 사람과 물건이 이동하던 요충지였다. 시외버스 종점이 있었던 조방(구 조선방직 터) 앞에서 구포를 거쳐 명지까지 가는 직행버스가 없어 구포에서 덕두리로 가기 위해서는 다른 버스로 갈아타야 했다.


몸집이 작은 사내아이가 복잡한 버스를 타고 먼 길을 이동하기가 여간 힘들지 않았다. 다소 덩치가 자란 형들은 어떻게 해서라도 자신의 자리를 버텨 낼 수 있었지만, 힘없는 작은 소년이 감당하기에는 벅찼다.


학교에 갈 나이가 멀어서 아직 집에 남아 부모의 돌봄이 필요한 시기였지만, 당시 부모님이 모두 직장에 나가야 겨우 생계가 유지되던 힘든 시절이라 집에서 어린아이를 돌볼 형편이 되지 못했다. 이런 이유로 어린 나는 연세 든 외할머니가 계시는 외가댁에 보내져 유년기 일부를 보내야 했다.


누구를 탓할 처지가 아니었기에 어쩔 수 없이 고생스럽게 친척 집을 전전하는 생활을 반복할 수밖에 없었다. 가끔 형들도 방학을 맞아 외가댁에 오기는 했지만 잠시 있다가 돌아가는 경우가 대부분이었고 혼자만 남겨져 긴 시간을 보내야 했다.


내 기억에 남아있는 부산 시외버스터미널은 당시 평화시장 인근에 있었다. 버스를 타고 서면 로터리와 사상을 지나서 오랜 시간을 달려 구포에 도착하면 타고 온 버스에서 내려서 다시 덕두 마을을 거쳐 명지로 가는 버스로 갈아타야 했다는 것이다.


당시 구포는 시간에 상관없이 항상 붐볐다. 오가는 사람과 이동하는 물건이 넘쳐났고, 장날이면 일대는 혼잡이 극에 달했다. 특히, 봄에는 딸기밭으로 가는 행락객까지 더해져 이 일대가 몹시도 흥청거렸다. 버스 시간이 남아 기다려야 할 때면 구포 쪽 강 언덕에 올랐다. 넓은 낙동강을 가득 채운 황톳빛 강물이 태양에 반짝이며 눈에 반사되었다. 다리 아래는 낚시하려는 사람들이 항상 많았다. 건너편으로 뻗은 구포다리가 시작되는 곳까지 올라가 끝이 보이지 않는 다리를 바라보면서 신기해했던 어린 시절이 아스라이 떠오른다.


구포다리의 우측에는 강을 건너는 배가 여럿 있었다. 사람들이 여기에서 배를 타고 강 반대편이나 더 멀리로는 물금(勿禁)과 멀리 삼랑진까지 이동했다. 봄이면 많은 행락객(당시 주로 갈 곳이 없었던 터라 계 모임에서 딸기밭을 방문하였던 시절)이 구포 건너편에 있는 딸기밭으로 나들이를 떠나곤 했다. 위태할 정도로 많은 사람이 탄 배를 타고 강을 건넜던 아찔한 기억이 아직도 남아 있다.


지금 돌이켜 생각하면 매우 위험한 일이었지만 당시에는 아주 흔한 풍경 일부였다. 별다른 놀이 시설이나 놀이 장소가 없던 시절, 안전에 대한 불안감보다 한철 봄을 만끽하고픈 욕구가 더 강하게 작용했기 때문일 것이다.


버스가 이름 모를 마을을 지나 덕두리에 도달하면, 버스에서 내려 얼마 떨어지지 않은 외가댁으로 걸어갔다. 당시 외가댁에는 외할머니와 외항선을 타 거의 집에 머물지 않는 큰외삼촌을 기다리던 외숙모 그리고 외사촌 동생이 함께 살고 있었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자연스럽게 외할머니가 집안의 어른이자 가장의 역할을 동시에 맡고 있었다.


이방인이자 불청객인 외손자의 방문이 외할머니에게 그리 달갑진 않았겠지만, 어쩔 수 없는 환경이 만들어낸 외손자와 외할머니의 불편한 동거는 그렇게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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