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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말라야 안나푸르나 트레킹_farewell party

시누와의 자장가

by 이부작

이날,

제일 고생한 포터 꺼멀에게 20달러를 추가로 주었습니다.

(지금은 많이 올랐겠지만 그때는 일 포터 비용이 12달러 정도였기에 적은 금액은 아닙니다)

꺼멀은 처음엔 안 받으려고 했지만 꺼멀의 두 손을 잡으며 나의 작은 마음을 남겼습니다.

이날,

포터 꺼멀은 나의 동생이 되었고 다음에 히말라야에 또 온다면 무조건 꺼멀과 함께하겠다고 마음먹었습니다. 그런데 이젠 꺼멀을 찾을 수 없습니다...


[시누와(sinuwa, 2360미터)에서의 farewell party]


휴식을 취하자 스님의 발목이 조금 나아졌다. 스님께서는 걸을 수 있다며 다시 등산화를 신으셨다. 우리는 걱정스러웠지만 스님의 의지가 워낙 강했다. 우리는 다시 이동을 하였다. 꺼멀과 나는 이젠 우리의 페이스대로 걸었다. 이러다간 시간이 넉넉하지 않은 나의 일정도 틀어질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그래도 마음이 편하지 않았다. 한참을 걷다가 다시 휴식을 취했다. 20여 분을 기다리니 스님 한 분이 도착하셨다. 윤서 스님이 어떠신지 먼저 물어보았다.

“스님께서 조금 더 걸어가다가 발목이 더 안 좋아지셨어요 다행히 저렴하게 포터를 구해 즉석에서 지게를 만들어 스님을 태우고 내려오고 있는 중이에요.”

“그나마 다행이네요, 그러면 촘롱까지 가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겠네요?”

“스님께서는 어떤 일이 있어도 촘롱까지 가시겠다고 하시네요. 그런데 잘해야 시누와 까지나 갈 수 있을 것 같아요.”

난 잠시 고민을 하다 말했다.

“그럼 시누와 까지는 가실 수 있겠다는 거죠? 그러면 알겠습니다. 먼저 시누와에 가서 기다리고 있을게요”

”네, 나중에 봐요”

그때부터 내 다리는 뛰기 시작했다. 영문을 모르는 꺼멀도 어쩔 수 없이 뛰면서 뒤따라 왔다.

단 한 번도 안 쉬고 독하게 걸어서 마침내 시누와에 도착했다. 배낭을 내려놓고 꺼멀에게 부탁했다.

내용은 이랬다.


“꺼멀, 한 가지 부탁이 있어. 라메쉬 형과 네 분의 스님들이 가족처럼 느껴졌어. 그래서 원래 스님들과 촘롱에서 다시 만나서 내가 가지고 있는 한국 음식들을 다 드리려고 했지만 알다시피 한 스님이 다리를 다쳤잖아. 그래서 그 스님은 잘해야 시누와 까지만 올 수 있을 것 같아. 그런데 우리의 짐은 촘롱에 있고, 또 우리는 촘롱까지 가야 하고, 이제 헤어져야 하는 거지. 하지만 꺼멀, 아픈 스님을 나 몰라라 하기가 내 마음이 너무나 편하지 않아, 그리고 정들었던 라메쉬 형과 스님들과 인사도 못하고 헤어지는 게 너무 싫다. 그래서 한 가지 부탁이 있는데……나랑 같이 촘롱에 갔다가 다시 이곳 시누와로 돌아오면 안 될까?”


꺼멀의 눈빛에 놀라움과 당황함이 가득했다. 꺼멀의 마음도 이해되는 게 여기서 촘롱 까지는 왕복 2시간의 거리였고 중간에 거대한 Y자 계곡이 있어서 가파른 경사를 내려갔다가 다시 올라가서 짐을 챙겨 가파른 경사를 내려왔다가 다시 올라가야 하는 고생을 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 미친 짓을 같이 해달라는 나의 말을 듣고 꺼멀이 잠시 생각하더니 “Yes, sir”라고 고마운 답을 해주었다. 꺼멀에게 너무나 미안하고 고마움을 느꼈다.


꺼멀에게 한 가지를 더 부탁하며 롯지 주인에게 내 말을 전해달라고 했다.

우리가 시누와에 빨리 오기는 했지만 촘롱에 다녀오는 동안 스님들 중에 빠른 분이 이곳을 지나 처서 급경사인 아래쪽으로 내려오면 안 되니, 롯지 주인에게 우리가 오늘 이곳에서 투숙할 테니 지나가는 한국 스님들이 계시면 더 이상 가지 말고 이곳에서 꼭 기다리 수 있게 해달라고 신신당부를 했다.

그러고 나서 우리는 맨몸으로 촘롱까지 날아가듯 뛰어갔다. 급경사 지대를 내려가면서 직선 길이상으로 약 5백 미터 되는 시누와와 촘롱까지 다리가 연결되어 있으면 얼마나 편할까, 그리고 내가 슈퍼맨이거나 날개가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공상에 빠졌다. 예상대로 1시간 만에 짐을 맡겨두었던 롯지에 도착했다. 롯지 주인아주머니는 우리를 보자 엄청 반가워하셨다. 우리가 무사히 돌아왔음에 기뻐하는 게 아니라 여기서 1박을 할 줄 아셨나 보다. 꺼멀이 아주머니에게 우리의 계획을 말해주었다.

아주머니는 이해가 전혀 안 된다는 표정이었다. 짐을 챙겨서 물건들을 점검해 보니 다행히 아무 이상도 없었다. 몇 분 만에 짐을 챙기고 신속히 콜라와 사이다를 한 병씩 마신 후 우린 다시 시누와로 출발했다. 한참을 다시 내려가다가 숨을 헐떡거리며 올라오고 있는 외국인 트레커 한 명이 보였다. 그는 미국인으로 트레킹 중에 간단히 통성명을 했던 친구였다. 그 친구에게 다가가 인사를 했다. “Hi!” 지쳐있던 고개가 자동적으로 스스로 올라왔다. 그는 역으로 내려오고 있는 나를 놀랜 듯이 쳐다봤다.


“What are you doing now? Where are you going?”

“I’m going back to sinuwa”

”What? So you went to chhomrong and go back to sinuwa? Why? Are you crazy?”


그는 나의 행동이 전혀 이해가 되지 않았다. 나는 그저 짧게 답했다.

I have to do something for my friends


그 친구와 헤어지고 계곡 밑까지 내려가서 계곡을 건너고 다시 오르막길로 들어섰다.

오르막길은 역시나 힘들었다. 나의 무모한 행동 때문에 고생의 길로 동참하게 된 꺼멀에게 계속 미안하다고 했다. 그때마다 꺼멀은 ‘노 프라블럼’이라고 답해주었다. 그런데 2/3쯤 올라갔을 때쯤 한국인 여자 대학생이 원빈을 닮은 포터와 함께 힘겹게 내려오고 있었다. 그 친구에게 다가가 이야기를 했다.


“오늘 시누와에서 1박 안 하실 거예요?”

“아니 왜 촘롱 쪽에서 올라오고 계세요?”


간단하게 자초지종을 설명해 주었다.

“대단하시네요, 전 너무나 힘들어서 빨리 내려 갈려고요, 몸이 너무 힘드네요.”

“네 조심 히 내려가세요, 아 참, 그리고 여기 초콜릿이랑 컵라면 도 하나 가져가세요!”


고맙다고 하는 학생을 뒤로하고 서둘러 올라갔다. 그런데 오르막길을 거의 올라왔을 찰나 앞쪽에서 스님 세 분이 지친 발걸음을 이끌고 내려오고 있었다.

‘아니, 왜 스님들께서 시누와 롯지에 계시질 않고 내려오시는 거지?’ 스님들을 보고 크세 소리쳤다.

“스님 내려오지 마세요! 다시 올라가세요!” 스님들은 나를 보고 그 자리에서 엉거주춤했다. 우리는 재빨리 스님에게로 올라가 숨을 헐떡이며 말했다.

“아니 스님, 왜 시누와 롯지에 머무르지 않으시고 촘롱까지 오시는 거예요? 롯지들 중 한 곳에서 스님들 보고 거기에 머무르라고 하지 않던가요”

“아니요, 시누와에 도착해서 **님을 찾았지만 못 찾아서 아무 롯지나 들어가서 동양인 한 명을 못 봤냐고 물어보니 **님과 꺼멀이 쏜 화살처럼 촘롱으로 갔다는 말을 듣고 우리도 촘롱으로 가고 있는 중이었어요. 그건 그렇고 왜 촘롱에서 올라오고 계시는 거예요?”


갑자기 부탁을 했던 롯지 주인에게 화딱지가 밀려왔다. 꺼멀도 돌아가는 상황이 파악되자 스님들께 더욱 미안해하였다. '돌아가서 롯지 주인에게 쓰디쓴 한 소리를 해야겠다.'

스님들께 촘롱에 다녀온 이야길 해드리니 모두가 놀라셨다. 그나마 급경사의 내리막길을 얼마 내려오지 않아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꺼멀과 나는 힘들어하시는 스님들의 배낭을 하나씩 추가로 메고 다시 시누와로 돌아갔다. 돌아가자마자 롯지 주인에게 왜 부탁을 안 들어주고 스님들을 지나치게 했냐고 목소리를 높여 따졌다. 주인은 아무 잘못 없다는 듯 잘 몰랐다고 했다. 말이 통하지도 않고 안 되겠다 싶어 롯지에 맡겨 논 배낭을 들고 다른 롯지로 이동해 버렸다.

다른 롯지 2층에 짐을 푼 우리는 각자의 짐을 정비하고 윤* 스님을 기다렸다. 서서히 태양이 저물고 시누와에도 깊은 밤이 찾아왔다. 스님께서는 아직도 도착하지 않으셨고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그저 기다리는 수밖에 없었다. 모두가 스님 걱정을 했다. 하지만 라메쉬 형이 옆에서 잘 보필하고 있기 때문에 스님께서 분명 이곳에 나타나실 거란 확신이 있었다. 오후 8시가 넘어섰다. 우리는 스님이 도착하기 전까진 저녁식사도 하지 않았다. 모두가 2층 옥상에서 저 멀리 어둑한 시누와 오는 길 쪽만 바라보고 있었다. 그런데 그때 어둠 속에서 희미한 불빛이 보였다. 불빛은 조금씩 가까워져 오고 있었으며 터벅터벅 무거운 발걸음 소리도 들렸다. 이 시간대에 트레킹을 하고 오는 건 스님밖에 없을 거라며 우리는 일제히 1층으로 내려갔다. 드디어 불빛의 존재가 나타났다. 스님의 배낭을 메고 서있던 라메쉬 형이 우리를 보자 얼굴에 안도와 기쁨의 웃음꽃이 피어났고 깡마르고 순진하게 생긴 포터가 지게 위에 올려진 윤* 스님을 조심스럽게 내려놓고 있었다. 스님은 우리를 보자 너무 반가워 목이 멘 듯 제대로 말씀하시지 못했다. 갑자기 내 눈에도 눈물이 글썽이고 맘이 뭉클했다. 마치 헤어졌던 친누나를 다시 만난 느낌이었다.


모두가 허기진 상태였다. 우리는 먼저 식당으로 들어가 음식을 주문했다. 나에게 컵라면이 충분했기 때문에 별도로 음식은 시키지 않고 흰쌀밥을 시켰다. 그리고 내가 가지고 있는 모든 것을 풀어놨다.

컵라면에 김치, 김, 인스턴트 죽, 고추장 볶음, 각종 반찬들에 소주까지, 식당 안은 오랜만에 보는 한국 음식에 기쁨이 넘쳐났다. 우리는 뜨거운 물에 라면과 쌀밥을 섞어서 후다닥 먹어 치웠다.

모두들 식사를 끝내고 오늘 있었던 일들에 대해 이야기를 나눴다. 스님은 끝까지 참다가 도저히 발목이 아파 더 이상 걷기 힘들 때 옆에 있는 깡마른 포터가 찾아와선 저렴한 가격으로(다른 포터들이 터무니없이 불렀던 가격의 10분 1 정도, 아마도 하루에 500루피 정도인 것 같다.) 자신이 하면 안 되겠냐고 했다. 거래는 즉석에서 성사되었고 이 포터가 바로 나무를 잘라서 우리나라 지게와 같은 간이 운송수단을 멋지게 만들어 스님을 등에이고 여기까지 온 것이었다. 스님은 이 포터에게 너무나 미안해했고 또 감사했다. 나머지 사람들도 이 포터에게 너무 고맙다고 한 마디씩을 전했다. 옆에 있던 포터가 부끄러운 듯 얼굴을 붉히며 아무 말을 못 했다.


이번엔 화제가 나에게로 돌아왔다. 라메쉬 형이 나의 이야기를 듣더니 엄지손가락을 치켜들었다.

“와, 정말 대단해요, 어떻게 촘롱을 다녀올 생각을 했어요? 가는 길이 엄청 가파른데?”

스님들께 인사는 드리고 헤어지고 싶었어요” 나도 부끄러웠다.

앞쪽에 앉아 계시던 윤*스님께서 말씀하셨다.

“저와 라메쉬는 오늘 여기 계시는 분들을 당연히 못 볼 줄 알았어요, 제가 무조건 촘롱까지 가야 한다고 우겼는데 이렇게 발목이 아파서 어쩔 수 없이 시누와까지만 가자고 했지요. 그런데 정말 뜻밖에도 이곳에서 모든 분들을 다시 만나게 되니 아까는 눈물이 나더라고요.” 분위기가 숙연해졌다. 분위기를 띄우기 위해 내가 말했다.


“이제 오늘 밤만 지나면 저도 포카라로 내려가야 하고 스님들과도 이별을 해야 하니 피곤하겠지만 간단히 farewell 파티를 하는 게 어떨까요? 곡차도 조금 남아있고 한국 음식도 많이 남아있는데요……”


스님들과 라메쉬 형 모두 좋다고 했다. 어제보단 훨씬 많은 군것질거리에 식당 안 분위기가 화기애애하였다. 오늘 고생한 깡마른 포터에게 한국의 전통술 소주를 맛 좀 보라고 한 잔 드렸다. 그리고 오늘 누구보다 고생이 많았던 꺼멀에게도 술잔을 따랐다. 술을 드실 수 있는 분들은 소주를, 다른 분들은 음료수를 따른 후 고생한 서로에게 격려를 하며 건배를 했다. 술을 한두 잔 마시고 서로를 칭찬하다 보니 식당 안은 웃음으로 가득했다. 그러다 우리는 다시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깡마른 포터에게 사이다 병에 담긴 숟가락 마이크를 넘기니 처음엔 쑥스러운 듯 노래를 하지 못했다. 포터가 노래를 못하자 우리는 계속 합창으로 다그쳤다.


“노래를 못 하면 장가를 못 가요, 아 미운 사람, 장가를 못 가면 아기를 못 낳아요, 아 미운 사람, 아기를 못나면……”

포터는 당연히 우리 노래가 무슨 노래인지 몰랐으나 분위기상 불러야 한다는 것을 알고 노래를 시작했다. 우리는 숨죽여 노래를 기대했다. 그런데 또 ‘레썸삐리리'였다. 네팔의 포터들은 거의 대부분이 이 노래만을 부르는 것 같았다. 그래도 들을 때마다 ‘레썸삐리리'는 흥이 겨웠다. 롯지 안에 있는 모두가 ‘레썸삐리리'를 목청껏 불렀다. 노래가 끝나자 환호성이 가득했다. 숟가락 마이크가 스님들과 라메쉬 형, 그리고 나에게로 돌아왔다. 라메쉬 형은 역시나 조용필 노래를 불렀고 나머지 분들도 빠지지 않고 흥에 겨워 노래를 했다. 공간이 좀 넓었다면 춤도 췄을 것 같았다. 너무나 행복하고 즐거운 시간이었다.

생각해 보라, 오지의 땅 히말라야에서, 어제오늘 정말 좋은 분들과 함께 마치 가족인 것처럼 서로를 격려하고 노래를 부르고 있는 유쾌한 경험을 어느 누가 쉽게 할 수 있겠는가?


밤이 더욱 깊어갔다. 이제 또 각자의 방으로 돌아갈 시간이 되었다. 마지막 곡을 부탁했다. 바로 어제 들었던 ‘나가거든’을 다시 한번 듣고 싶었다. 스님께서 목소리를 가다듬으시더니 노래를 다시 부르셨다. 시누와 전체에 맑고 고운 스님의 목소리가 스며들었고 자장가처럼 모든 이들의 가슴을 포근하게 적셔주었다.

[To be continu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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