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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불개 Oct 29. 2022

미싱 링크. 한국에서 펑크가 무시받는 이유.

Screaming at a Wall - Minor Threat

 한국에서 펑크 밴드를 한다고 하면 단순히 신나는 음악으로 치부되거나, 쉽고 별다른 노력을 들이지 않고 초보자들이 작곡을 하고 공연을 할 수 있는 가벼운 음악 정도로 무시하는 경향이 있다. 나도 꽤 유명한 블루스 밴드 뮤지션의 라이브 공연을 감상하고 나서 대화를 할 수 있는 기회가 되어 이야기를 나누다 펑크밴드를 하는 친구들이 이곳에 많이 있다는 이야기를 했다가 "펑크? 야. 됐다 그래~"라는 멸시를 당한 바 있다. 나이가 너무 많고 정신이 온전치 않아 보이는 분이라 딱히 흥분하여 언쟁을 벌이거나 다툼이 생기진 않고 모두가 술 취한 노인네가 벌인 재밌는 해프닝 정도로 여기고 지나간 사건이지만 한국에서는 대체로 펑크에 대한 인식이 이렇게 좋지 않다.

 특히 한국 메탈 뮤지션들이나 리스너들이 펑크를 얕잡아 보는 모습을 보면 정말 우습기 짝이 없다. 메탈과 펑크는 한 가족 음악이나 마찬가지고 펑크가 없었으면 지금의 메탈도 없었기 때문이다. 지금의 메탈 음악을 여러 가지 조상을 가지고 있고 펑크는 그중 하나이다. 특히 쓰래쉬 메탈 같은 경우는 80년대의 하드코어 펑크가 직접적으로 큰 영향을 끼친 장르이다. 뿐만 아니라 전 세계 모든 80년대 이후 록 뮤지션들은 어린 시절부터 자연스럽게 펑크록을 듣고 자란 세대이다. 한국과 몇몇 나라들만을 제외하고 말이다.

 보통 펑크록이라고 하면 영국과 미국만의 음악이라고 여겨지지만 이는 사실이 아니다. 70년대에 영국과 미국에서 시작된 펑크록은 젊음과 저항의 상징이 되어 순식간에 전 세계에 퍼져나가게 된다. 거의 동시다발적이라 할 만큼 빠른 속도로 퍼져나간 펑크록은 각 나라와 지역의 다양한 정치, 사회, 문화적 특수성과 맞물려 뿌리내리게 된다. 60년대에 68 혁명과 히피들이 있었다면 70년대에 들어 새로운 국제주의 청년문화운동이 시작된 것이다.

 일례로 일본의 JAPCORE를 보자. 일본 또한 70년대부터 펑크록의 씨앗을 수급받았고 일본만의 특수한 정치 사회문화적 토양 위에 뿌려진 그 씨앗은 곧 80년대의 하드코어 펑크라는 양분을 만나 재패니즈 하드코어 펑크(JAPCORE)라는 이름의 뿌리 깊은 나무가 된다. 그들만의 오리지널리티는 역으로 펑크의 본고장인 미국과 유럽의 청년들에게 깊은 울림을 주었고 전 세계에서 가장 독창적인 펑크 씬 중의 하나가 된다.

 펑크록이라는 이름의, 이 청년 하위문화의 국제주의 운동이 동시다발적으로 전 세계를 달구고 있는 동안 한국은 군사독재의 악몽을 겪고 있었다. 독재정권은 그들이 원하지 않는 새로운 인간성을 만들어내는 문화와 예술이라면 깡그리 검열했기 때문에 당연하게도 펑크록은 한국에 들어오지도 시작되지도 못했다. 물론 한국에는 포크의 영향을 받은 저항적인 노래패 문화가 있었지만 펑크록과는 아무 접점이 없다. 한국 음악사에서 펑크록이라는 이름이 처음 등장하게 된 것은 한참 후인 90년대 중반이니만큼, 해외에서는 수많은 현대음악에 영향을 끼친 펑크록이 유독 한국에서만 미싱 링크를 가지고 있는 것은 안타까운 일이다.

 특히 군사독재 정권을 등에 업은 국풍 81 같은 행사에서 공연을 한 뮤지션들이 현재 음악판의 큰 어른들로 칭송받는가 하면, 콘, 린킨파크, 림프 비즈킷, RATM 같은 뉴메탈/핌프록 장르를 하드코어라고 국내에 소개를 한 음악 평론가라는 작자를 한국 음악 평론의 핵심 인물로 대접해주는 왜곡된 한국에서, 펑크와 그 하위 장르들에 대한 제대로 된 이해가 있었을 리가 없다. 하지만 누구를 탓하겠는가. 한국 펑크의 미싱 링크라는 이 안타까운 현실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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