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02
나와 K는 먼저 여행의 전반적인 계획을 세웠다. 각자 가보고 싶은 곳과 방향을 정하고, K가 휴가를 나오는 날에 만나 의견을 나누었다. K의 전역 예정일은 여행 출발 일주일 전이었다. 아프리카와 호주, 러시아, 북미를 제외하는 전체적인 경로에 우리는 합의했다. 중국에서 출발해 육로로 베트남의 북쪽 국경도시까지 이동하고, 동남아시아로 들어가 베트남, 라오스, 캄보디아를 거쳐 태국까지 가자. 마침 경로에 있는 인도와 이집트에 가서 타지마할, 피라미드를 둘러보고 이집트에서 터키행 비행기를 탄다. (육로로 이동하고 싶었지만 이스라엘, 시리아와 레바논의 상황은 녹록치 않았다.) 터키에서 버스를 타고 유럽으로 들어가 연말까지 어떻게든 포르투갈에 도착하자. 겨울이 깊어지고 해가 바뀔 즈음에 유럽의 서쪽 끝에서 비행기를 타고 남미 대륙으로 향한다. 브라질의 해안도시를 따라 아르헨티나로 내려가서, 시계방향으로 칠레를 돌아 올라온다. 볼리비아로 들어가 우유니 고원의 소금사막을 꼭 가보고, 페루로 나와서 잃어버린 도시 마추픽추를 찾아보자. 그리고 페루에서 인천행 비행기가 가장 싼 곳에서, 아마도 리마에서, 집으로 돌아온다.
전체적인 계획은 어렵지 않게 세웠지만 긴 여행을 위해 실제로 준비해야 할 것은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우리는 구청에서 여권을 갱신하고, 운전면허 시험장에서 국제운전면허증을 발급받고, 여행자보험에 가입했다. 국립중앙의료원에 가 장티푸스, 황열을 비롯한 몇 가지 예방주사를 맞아야했다. 해외에서 사용이 편리한 카드를 신청하고, 가격이 조금이라도 낮을 때 미리 몇 개의 비행기 표를 사야하고, 첫 목적지인 중국에 가려면 미리 비자를 발급받아야 했다. 그리고 7개월을 메고 다닐 배낭, 침낭, 챙겨갈 옷과 신발, 세면도구, 실과 바늘, 각종 상비약 등의 목록을 정해 놓고 없는 것을 하나씩 사 모았다. 이외에도 준비하고 알아봐야 할 것은 끝이 없었다. 각국의 환율, 현금 인출 방법, 지역마다 특별히 주의해야 할 것, 목적지마다의 숙소, 도시간 이동 방법, 볼거리, 유명한 먹을거리…. 나와 K는 패키지여행 상품을 이용하는 것이 아니었기 때문에 모든 것을 직접 알아봐야 했다. 하노이의 숙소에서 하롱베이의 선베드가 있는 배의 갑판까지 가는 방법을, 뉴델리의 터미널에서 아그라에 있는 타지마할의 입구까지 가는 길을, 아테네 광장에서 자킨토스 섬의 난파선이 있는 해변까지의 경로를, 타국의 대사관에서 볼리비아 여행 비자를 신청하는 절차를, 우리는 알아야 했다. 하지만 나는 어려서부터 무엇이든 철저하고 꼼꼼하게 준비하는 성격이 아니었고, 다행히 K도 마찬가지였다. 결국 우리는 중국에 두 개의 숙소만을 예약하고 일단 가보기로 한다. 어디로 어떻게 가야할지, 그곳에서 물어보면 알 수 있겠지. 예약해둔 숙소가 없다거나 예약한 숙소마저 찾지 못한다면 하루나 이틀 정도는 길에서 자면 그만이다. 미리 사놓은 비행기 표 두 장을 빼면 반드시 지켜야하는 일정도 없었다. 자세하게 계획을 세워놓은들, 일정대로 움직일 수 있을 것이라는 확신은 어디에도 없다. 실패할지라도 크게 잃을 것이 없었기 때문에 우리는 일단 가서, 그 곳의 길 위에서 모든 것을 부딪혀보기로 했다.
그리고 8월 4일. 여행을 출발하는 날 부모님과는 집 앞에서 작별했다. 수능 시험장에 가는 날에도 그랬고 입대하는 날에도 그랬다. 집 문을 나서며 나는 멀리 나오지 마시라고, 건강히 다녀오겠다고 했다. 마침 동생은 학교에서 지원한 교환학생에 합격해 다음 학기를 네덜란드에서 보낼 예정이었다. 연말에 암스테르담에서 보자며 동생은 얼른 다시 집으로 들어가고 싶은 표정으로 손을 흔들었다. 그렇게 나는 8장의 속옷과 사계절용 침낭이 들어있는 50L의 빨간 배낭을 메고 집을 나섰다. 1년도 되지 않아 돌아올 여정이었지만, 마음만은 남미대륙을 향한 오토바이에 몸을 실은 체 게바라와 같았다.
나와 K의 치밀하지 못한 성격은 시작부터 빛을 발했다. 중국에 입국하려면 여권에 사증이 붙어 있어야 한다. 문제는 시간이었다. 중국 비자 발급에는 최소한 사흘이 필요했다. 명동에 있는 중국 대사관에 서류와 여권을 맡기고 비용을 지불하면, 3일 후에 사증이 붙은 여권을 돌려받을 수 있었다. 하지만 우리는 비자 신청을 미루고 미루다 정확히 출발 3일 전에 중국 대사관에 찾아갔다. (왜 비자 신청을 미루었냐고 물어본다면, 딱히 이렇다 할 이유는 없었다.) 사정을 듣던 대사관 직원은 일단 여권을 받아들고, 장담할 수 없지만 일단 출국일에 찾아오라고 했다. 결국 태양을 마주할 용기가 있는 젊은이는 뜨거운 가슴을 찾아 헤매기 위해 여권 없이 오토바이에 오른 것이다.
나와 K는 명동역에서 만나 침낭이 딸린 커다란 배낭을 멘 채로 중국 대사관으로 들어갔다. 대사관이 업무를 막 시작하는 시간이었다. 직원들은 다소 당황스러운 표정으로 신기한 듯 우리를 쳐다본다. 정작 우리는 사무적인 미소를 띠고 있었다.
“3일 전에 여행 비자를 신청했는데요.” 직원은 잠시 벙찐 얼굴을 하더니, 갑자기 할 일이 생각난 사람처럼 서류를 뒤적거렸다. “여기, 여행 비자 신청하신 것 나왔네요.” 나와 K는 중국을 한달 간 여행할 수 있는 사증이 붙은 여권을 받아들고 대사관을 나왔다. 등에 멘 커다란 배낭이 아니었다면, 어디로 보나 3시간 내로 공항에 도착해야하는 여행자로 보이진 않았을 것이다. 대사관에서의 일은 오래 걸리지 않았고, 우리는 인천 국제공항에 생각보다 일찍 도착했다. 공항에는 나와 K의 당시 여자 친구가 기다리고 있었다. 우리는 각자 여자 친구와 시간을 보냈다. 나는 J와 1년 정도 만나고 있었고 K에게는 출국 전날 밤부터 사귀기로 한 여자 친구가 있었다. K와 그의 그 당시 여자 친구가 어떻게 만났고, 도대체 왜 긴 여행을 앞둔 전날 밤 사귀기로 했는지, 나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어쨌든 둘은 잘 어울렸다. K가 여행을 마치고 한국으로 돌아갈 때까지 둘은 잘 만났다고 한다.
나는 J와 같이 마지막 밥을 먹고 커피를 마셨다. 공항 출국장 카페의 커피는 기대했던 것보다 괜찮았다. 여행을 마치고 돌아오면 다시 오자고, 우리는 약속했다. 나도 그녀도 콘크리트와 같은 확신을 갖고 한 약속은 아니었으리라. 헤어짐의 아쉬움과 씨름하다보니, 어느새 게이트 앞으로 가야할 시간이었다. 그렇게 J와 작별하고, K도 그의 전날 밤에 사귄 여자 친구와 작별하고, 우리는 출국 심사장으로 향했다. 언제나처럼 심사장의 줄은 생각보다 훨씬 길었다. 제시간에 비행기에 오르기 위해서 우리는 전속력으로 달려야했다. 왜 언제나 내가 배정받은 게이트는 탑승동의 맨 끝에 있을까. 안내 방송에서는 연신 나와 K의 이름을 불러댔다. 땀을 뻘뻘 흘리며 게이트에 도착해 중국 여행 비자가 단단히 붙어있는 여권을 보여주고, 우리는 드디어 비행기에 올랐다. 좌석에 앉아 차분히 마음을 가라앉힐 시간이나 내가 남기고 떠나야할 것들에 대해 생각할 시간 따위는 물론 없었다. 비행기는 기다렸다는 듯 움직이기 시작한다. 이제는 정말 우리나라와, 가족과, 친구들과, 성동구 왕십리와 작별할 시간이었다. 체 게바라도 그의 여행을 떠나던 날에 이렇게 땀을 흘렸을까?
비행기는 한참 속도를 올리다 불현듯 땅을 박차고 날아올랐다. 여행은 막 시작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