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부님 될래, 스님 될래

by 솔내

나는 천주교에서 유아 세례를 받았다. 어린 시절부터 고등학교 때까지는 가톨릭 환경 속에서 자랐다. 고등학교 시절에는 성당 학생회의 회장을 맡았으니, 말 그대로 ‘성당 오빠’였다. 당시에는 기타를 치고 밴드 활동도 했다. 하계 수련회에 전자기타와 드럼을 들고 갈 정도로 노는 데도 꽤 정성을 쏟았다.

주일학교 고등부 선생님들은 때때로 걱정스러운 눈길로 우리를 바라보았다. 성가보다는 가요에 더 열심이었으니, 내가 교사라고 해도 어디로 튈지 모르는 학생처럼 보였을 것이다. 그럼에도 별 탈 없이 활동할 수 있었던 것은 주임 신부님과 수녀님 덕분이었다.


L신부님은 농촌에서 농민들을 위해 활동을 많이 하신 분이었다. 나중에 대학에 가서야 그것이 ‘가톨릭 농민운동’이라는 것을 알았다. 신부님은 때로 정부의 부조리한 정책에 대한 발언도 하셨다. 그 모습은 당당했고, 낮은 곳으로 임하신 예수님의 가르침과 맞닿아 있다고 보였다. 학생들 앞에서는 늘 인자한 미소를 지으셨지만, 그릇된 일에는 주저없이 목소리를 내셨다. 아마 내가 후일 학생운동을 하게 된 데는, 이런 모습에서 받은 인상이 작용했던 것 같다.


성경 낭독과 토론 모임에도 일주일에 한 번씩 참여했다. 고2 때는 경남 교구에서 주최한 교리 경시대회에 나갔는데, 뜻밖에도 1등을 했다. 학사님(신학생)이 “마티아, 네가 1등 했어!” 하고 알려주셨을 때는 얼떨떨했다. 그렇게 열심히 준비한 것도 아니었는데, 운이 좋았다고 생각했다.

H 수녀님은 지혜롭고 똑똑한 분이었다. 본명이 남자 성인인 ‘베드로’였던 것도 특이했고, 늘 똑 부러진 모습이었다. 신부님이 상징적인 분이었다면, 수녀님은 학생회를 직접 이끌고 함께 시간을 보내는 분이었다. 어느 날 수녀님이 물으셨다.

“마티아, 신학교에 가보지 않으련?”

나는 신부님이 된다는 생각을 해본 적이 없었다. 그렇다고 단호히 부정하지도 못하고, 그냥 웃으며 넘겼다. 어머니가 나중에 들려주신 이야기로는 수녀님이 '아들이 신부가 되면 좋겠다'고 했을 때, 속으로 싫었다고 했다. 하나뿐인 아들이 신학교에 가는 게 마음에 들지 않았다는 것이다. 나중에는 달라졌다고 하셨지만, 당시에는 딱딱하게 대답할 수밖에 없었다고 했다.


세월이 흘러 내가 대학졸업 후 절의 선방을 다니기 시작했을 때, 어머니는 난감해하셨다. 아픈 몸에서 회복한 것만 해도 감사했기에 요가나 명상을 하는 것은 말리지 않으셨지만, 절을 드나드는 것은 달리 보이셨을 것이다. 나는 어머니께 이렇게 말씀드리곤 했다.

“불교는 일반 종교와는 다릅니다. 자기 자신이 누구인지를 찾는 수행적 종교입니다.”

그 말이 사실이기도 했지만 어머니를 안심시켜드리려는 마음도 있었다. 가끔은 어머니의 평안을 위해 주일 미사에 참석하기도 했다.

그 무렵 나는 정기적으로 절의 선방에 들려 수행을 이어갔다. 한 번은 머무르던 절에서 큰스님 33분을 모시는 연속 법회를 기획했다. 담당 스님과 여러 절을 돌며 포스터를 돌리다가 한 절에서 큰스님과 차를 마셨다. 대화가 끝날 무렵, 그분이 내게 물으셨다.

“능엄 처사, 출가할 생각은 없느냐? 내 상좌로 들어오지”

나는 미소를 지으며 합장으로 인사하며 답을 대신했다.


좋게 해석하면 그분들이 신학교나 출가를 권한 것은 그만큼 내게서 수행자적인 소양을 보았기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어떤 때는 ‘세상에 발을 담근 채 내가 더 깊이 수행에 들어가지 않고 있는지' 물음을 던지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그런 시간을 지나 결국 요가명상 지도자가 되었다. 그 과정에서 다양한 수련을 접했고 지금은 가르치는 일을 하고 있다. '수행의 특성상 어쩌면 가르친다기보다는 안내한다'가 더 맞을 것이다.

지금은 자신이 어떠한 길을 가고 어디에 도달하는 가도 중요하지만, 그 속에서 무엇을 배우고 깨우치는 가도 그에 못지않게 중요하지 않나 싶다.

하지만 길은 다양한데 한 길을 걷는 기분이 드는 것은 왜일까.

아마 그 모두가 자신의 역사가 되기 때문이지 않을까.

월, 목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