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다림을 생각하다.(1)

by 생각하며 놀자

교회력에 따라 매년 성탄절에 앞서 지내는 대림 시기는 그리스도교 신자들이 아니면 잘 알지 못한다. 이 대림 시기에 신자들은 세상의 구원자(Salvator mundi) 그리스도의 탄생을 기다리지만 또 다른 의미에서는 각자 마음속으로 무엇인가를 기다리며 기도한다. 2025년 대림 시기를 지나면서 나는 무엇을 기다리고 있으며 그것은 왜일까에 대해 묵상해 본다.

기다림에 관한 시는 참으로 많다. 왜 그럴까? 그리운 사람을 기다리고, 자유롭고 평등한 세상을 기다리고, 합격 통지 같은 좋은 소식을 기다리고, 그리고 내 자식이 손주 낳아주기를 기다리는 할아버지와 할머니의 꿈처럼 기다림은 가슴을 설레게 만들기 때문이다. 사실 삶 안에는 수많은 기다림이 있고 그것의 연속이기 때문에 시인들은 기다림을 자주 시제(詩題)로 삼는다. 황지우 시인은 “세상에서 기다리는 일처럼 가슴 애리는 일이 있을까”하고 말했으나 누구를 기다리고 또 무엇을 기다리는가에 따라 가슴이 애릴 수도 있고 설레일 수도 있고 행복할 수도 있고 무서울 수도 있다.


어설프고 분명치 않은 이유로 헤어진 첫사랑이 다시 돌아오기를 기다리는 마음은 아마도 애리고 쓰릴 수 있다. 조금만 참고 기다리면 좋아질 거라는 여러 가지 희망 고문들은 종종 억장이 무너지게 만든다. 휴대폰이 없던 시절에 연애하던 숱한 연인들은 길거리에서 아니면 찻집에서 약속 시간이 넘어도 오지 않은 애인을 기다렸다. 지금 같으면 일어나지 않았을 무모한 기다림이 그때는 사랑하는 이에 대한 진심을 표현하는 방식이기도 했다. 그 기다림의 시간은 지루할 틈도 없었고 야속하지도 않았다.

기다림은 미래의 사건을 현재로 끌어오려는 노력이다. 기다림은 현재와 미래의 연결고리이다. 아직 오지 않은 미래의 그 무엇이 현재의 내게 다가와 실현되기를 기대하며 현재 안에서 미래를 사는 것이 기다림이다. 그렇기에 기다림에는 언제나 끊어지지 않는 가느다란 끈 같은 희망이 함께한다. 희망이 없는 기다림은 허망한 일이며 지루하다. 희망이나 소망이 생명력을 잃지 않고 살아 있을 수 있는 것은 기다림의 에너지가 있을 때만 가능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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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약 기다리는 마음의 강도(强度)를 측정할 수 있다면 그 기준은 무엇이 되어야 할까? 사람마다 기다리는 대상도 다르고 기다리는 시간도 다르며 그에 따라 기다리는 마음의 태도도 다를 수밖에 없다. 따라서 기다림의 열망을 측정한다는 것이 가능한지 모르겠다. 내 생각에 기다림의 마음을 측정할 수 있다면 그 기준은 두 가지가 고려되어야 할 것 같다. 하나는 절실함이고 다른 하나는 절망 상태 또는 희망 제로의 상태이다. 우리가 무엇을 기다린다면 그것을 얼마나 진심으로 절실히 기다리고 있는가에 따라 마음의 강도를 측정할 수 있을 것이다. 기다림의 대상이 현실로 다가올 가능성이 0%에서 100%까지 있다고 할 때 실현 가능성이 낮으면 낮을수록 그 절박함의 강도는 높아질 것이다. 거의 절망적 수준에서 무엇인가를 기다리는 것은 고통스럽고 슬픈 일이다. 그래서 희망이 없는 기다림은 체력과 정신력을 소진시키고 몸과 마음을 피폐하게 만들 뿐이다. 그런데도 무엇을 기다린다는 것은 무서운 희망이다.

기다림을 극적으로 표현한 작품 하나를 꼽으라면 베르디의 오페라 「나부코」 중에서 ‘히브리 노예들의 합창’을 꼽겠다. 디아스포라 유대인들이 바빌론에서 포로 생활을 하며 꿈에서도 잊지 못할 조국 이스라엘과 예루살렘으로 돌아가기를 기다리며 부르는 합창으로 많이 알려진 곡이다.

“가거라 그리움이여, 황금빛 날개를 타고 고향의 절벽과 언덕 위로 날아가라.... 그리운 요르단 강변과 무너진 시온의 성탑에 안부를 전해다오. 오! 지금은 잃어버린 아름다운 나의 조국. 오! 소중한 그러나 절망으로 가득 찬 기억들.”

제임스 레바인이 지휘하고 뉴욕 메트로폴리탄 오페라단의 합창단이 보여준 표정과 몸짓은 히브리 노예들의 그 지친 절망과 기다림을 사실적으로 잘 보여주고 있다. 바빌론에서 보낸 70년 가까운 긴 유배 세월은 절망 속에서의 기다림이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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