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다림을 생각하다.(3)

by 생각하며 놀자

이제 내게 남은 시간 동안 진정으로 절실하게 기다려야 할 대상은 무엇일까? 하나는 평화롭게 우리나라가 통일되는 일이다. 이 일이야말로 가장 긴 시간의 기다림이 필요하지 않을까 생각된다. 남과 북의 분단이 갑작스레 온 것처럼 통일도 예상치 못한 시점에 갑작스럽게 될 거라는 희망 섞인 전망을 말하는 사람도 있다. 나는 그렇게 생각지 않는다. 분단이 된 채로 80여 년이 흐른 세월에 통일의 장벽은 더욱 높아져만 갔다. 동쪽과 서쪽으로 분단된 독일이 45년 만인 1990년에 통일을 이루었고, 베트남이 21년의 분단을 극복하고 1975년에 통일을 이룬 것에 비한다면 우리나라의 분단 상황은 너무도 긴 시간 지속되고 있다. 그런 만큼 평화통일을 기대한다는 일은 예측조차 하기 어려운 희망 제로 상태처럼 보인다. 조국 통일의 당위성은 약해지고 지금 이 상태로 살아도 좋다며 분단 고착을 원하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있다. 분단의 피로감이 통일의 의지를 포기하게 만드는 상황이 안타깝고 두렵다.

아무리 통일의 과정이 험난하고 통일 이후에 더 많은 사회적 갈등이 예상된다 하더라도 통일은 당위이며 그렇기에 기다려야 한다. 아무 일도 하지 않고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정치, 경제, 외교, 국방 등 통일의 여건을 만들기 위한 모든 노력을 기울이면서 통일로 향한 발걸음을 멈추어서는 안 된다. 온 국민이 한마음으로 절실하게 기다려야 한다. “가다가 힘들면 쉬어가더라도, 손잡고 가보자 같이 가보자”라는 ‘홀로 아리랑’의 노래 가사 말처럼 통일을 향한 긴 여정의 도상(途上)에 우리는 있다. 우리 세대가 못하면 다음 세대가 그리고 그다음 세대도 이어서 이루어야 할 통일은 우리 민족 모두의 기다림이다.

이제 내게 남겨진 마지막 절실한 기다림의 대상은 죽음과 관련되어 있고 나의 종교적 신념과 연관된 기다림이다. 죽을 날만 기다린다고 해서 죽음 자체가 기다림의 대상은 아니다. 죽음 자체를 기다린다는 것은 자기 보존이라는 존재의 본질에 반(反)한다. 죽음이 끝이라면 굳이 기다릴 필요도 없고 절박한 기다림의 대상도 아니며 기다림에 의미도 없다. 내가 말하는 기다림은 그리스도교에서 말하는 영혼의 여정이며 구원에 대한 기다림이다. 이미 왔으나 아직 오지 않은 것에 대한 기다림이다. ‘이미’와 ‘아직’의 연결은 과거와 미래가 현재 안에서 공존하는 것을 말한다. 마치 죽음은 생명이 시작하는 순간부터 ‘이미’ 우리 안에 함께 와 있으나 ‘아직’ 오지 않은 미래의 사태인 것과 같다.



20210518_142227.jpg 아주 특별한 섬, 독도


“파수꾼이 새벽을 기다리기보다 제 영혼이 주님을 더 기다리나이다”라고 노래하는 시편의 저자처럼 내가 절실한 마음으로 기다리는 것은 죽을 때까지 가야 할 영혼의 여정 중에 찾아올 위로자이며, 죽음의 문을 넘어 그 이후의 세계를 기다리는 것 두 가지라는 생각이 든다.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아버지께서 약속하신 분을 기다려라.” 이 당부는 십자가에 처형당한 스승의 죽음 앞에서 절망한 제자들이 예루살렘을 떠나 고향으로 내려가 본래 직업인 어부 생활로 돌아간 일에 대한 걱정에서 나온 말이다. 그래서 그리스도는 승천하기 직전에 제자들에게 다시 한번 위의 당부를 하고 있다. 그리스도가 기다리라고 한 것은 파라클레토스(parakletos), 보호자이며 위로자인 성령을 말한다. 우리 각자에게 필요한 보호자이자 위로자를 기다리는 일은 매일매일을 대림 시기처럼 살아가야 할 신자다운 기다림이다.

죽음 너머의 세계에 대한 설명은 불가능하다. 여러 종교가 사후 세계를 신자들에게 이해시키기 위해 교리의 이름으로 설명하고 있지만 그것은 한계가 분명하며 오류를 피할 길 없다. 그 세계는 설명을 통해 이해되는 세계가 아니며, 해석의 세계도 아니다. 그런 세계라면 굳이 기다릴 필요도 없다. 내가 말할 수 있는 것은 오직 그곳은 신비의 세계라는 것뿐이다. 그것도 가장 위대한 신비(magnum mysterium)이다. 그렇기에 기다릴 만한 가치가 있다. 순간이 영원과 만나고, 육신을 떠난 영혼이 신의 자비에 온전히 내맡겨지는 일은 위대한 신비라고 말할 수밖에 없다. 위대한 신비의 세계는 확실성의 땅이 아니라 의심과 회의의 강을 건너야 만날 수 있는 세계이며 죽어도 살 수 있는 세계이다. 노년을 지나고 있는 내가 마지막으로 기다릴 수 있고 기다리고 싶은 것은 그 위대한 신비이다.

작가의 이전글기다림을 생각하다.(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