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ay 6_순례자의 여유

아무리 더딜지라도, 도착을 하게 되어 있듯이

by 시원

Day 6_10.17

Estella - Los Arcos (21.2km)


100Km를 걸었다.

어느덧 산티아고에 온 지도 일주일이 다 되어갔고, 몸의 불편한 곳들이 느껴지기 시작했다. 마치 순례자의 마음을 아는 듯이 길의 시작점부터 Wine Fountain (와인 분수)가 우리를 반기고 있었다. 물처럼 누르기만 하면 와인이 콸콸 나오는! 순례자의 피로를 씻길 수 있는 좋은 기회였다.


No Vino, No Camino!

와인이 없으면 까미노도 없어!라고 외치는 순례자들답게 와인을 채워서 길에 나섰다.


어쩌면 800km를 넘는 길을 걷기 위해서는 '술'례자가 될 필요도 있다. (우리끼리 와인을 너무 마셔서 순례자가 아니라 술례자가 아니냐는 농담을 할 정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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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길에 나섰다. 걸은 지 1주일이 다 되었을 때, 몸의 불편한 곳들이 느껴지기 시작했다. 피로가 누적됐다. 끝없는 광야를 걸으며 지루함을 느끼기도 하고, 유독 시간이 더디게 갔다. 온몸의 신경이 느껴지는 듯했다.


힘들 때는 침묵을 지킨다. 말을 멈추고, 침묵과 고요함에 집중을 한다. 까미노에서의 예의이기도 하다. 누군가가 침묵을 원하면 아무 말 없이 걷기도 하고, 각자의 속도대로 몸에 집중을 하는 시간을 가진다. 누군가가 혼자 걷고 싶다면 혼자서 길을 걸을 시간을 주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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끝없는 포도밭을 지나면서, 바람을 정면으로 맞으며 힘겹게 걸었다. 바람을 가려주는 나무도 없었기에, 그저 바람을 뚫고 걸어야 했다. 말없이 침묵 속에서 오로지 발걸음에 의지하며 길을 걸었다.


점심은 또 어디서 먹어야 하지 - 나무도, 의자도 없는 넓은 광야에서 배는 고파왔고, 점심을 먹어야만 했다. 길 위에 있는 아무 나무 아래에 걸터앉아 점심을 먹기 시작했다. 배를 채우고, 지나가는 순례자들과 부엔까미노를 외치며 서로의 길을 응원했다. 유독 길게만 느껴졌던 순례길의 하루, 한 걸음 한 걸음 또 내딛다 보니 목적지에 도착했다.


그렇다.

한 걸음씩 또 걷다 보면 도착하게 되는 것이다.


아무리 더딜지라도,

결국 도착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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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례길 위에서의 일상이 익숙해졌다. 걷고, 샤워하고, 빨래하고, 빨래를 말리고, 음식을 사 와서 다시 침낭을 꺼내는 것. 오늘도 도착하자마자 알베르게에 짐을 풀고 샤워를 한 다음, 빨래를 했다. 바람도 많이 불어서 빨래가 빨리 마를 것 같았다. 탁탁 - 손빨래를 한 옷을 집어서 집게에 매달아 빨래를 말렸다. 빨래가 말려질 동안 빨랫줄에 걸린 빨래들과 살랑살랑 불어오는 바람을 느껴보며 순례자의 여유를 누려본다.


살랑살랑 불어오는 바람과, 초록 잎들

그리고 신발에서 벗어나 시원한 바람을 느끼고 있는 고생한 두 발,

순례자 오후의 여유다.


단순한 일상 속에서 생각들이 비워진다.

단순함 속에서 사소한 기쁨들이 넘친다.

다시 오지 않을 여유를 누리자. 감사하자.


바쁘게 흘러가는 삶의 터전 속에서, 순례길을 잠시 숨을 쉬어도 괜찮다고 토닥여주었다.

모두가 함께 손을 잡고 걸어가는 이 길이, 참으로 평화롭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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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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