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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우르슬라 Dec 07. 2021

파 프롬 헤븐 (2002)

- 편견이 진리로 대접받는 시대에서 편견 없는 사람이 살아가는 법

감독 : 토드 헤인즈

출연 : 줄리안 무어, 데니스 퀘이드, 데니스 헤이스버트


BBC 선정 21세기 위대한 영화 86위 토드 헤인즈 감독의 <파 프롬 헤븐>을 보았다. 이 감독이 어떤 종류의 영화를 찍는다는 것을 알고 있어서 개인적으로는 그의 영화를 별로 보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토드 헤인즈 감독의 영화로는 첫 번째로 보게 된 영화이다. 영화는 오프닝부터 시선을 확 사로잡는다. 59년 미국의 부자 동네 코네티컷의 가을 풍광이 너무나 아름답게 펼쳐진다. 주인공 캐시(줄리언 무어)의 패션, 집안의 인테리어 등, 알프레드 히치콕 감독의 <현기증>을 떠올리게 할 만큼 아름다운 미장센을 자랑한다. 영화 음악도 히치콕 영화스럽게 고전적이다. 

사실 동성애와 흑인 인권이란 소재는 이제는 진부하다 느껴질 만큼 자주 다루어진 이야깃거리여서 심심한 듯 흘러가는 듯한데 캐시가 맞이하는 결말이 짠해서 꽤나 마음이 쓰인다. 


59년의 미 북동부 코네티컷이면 동성애와 흑인 인권이 어떻게 받아들여지는 때인지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주인공 캐시는 능력 있는 기업가 프랭크와 결혼해 슬하에 아들과 딸 하나를 두고 남들의 부러움을 사며 행복한 가정을 꾸려가고 있었다. 그녀는 흑인 인권 개선을 위한 단체에 후원을 하며 사람들이 어떻게 바라보든지 신경 쓰지 않고 흑인 남성 (정원사) 레이먼드와 친구처럼 잘 지낸다. 그런데 어느 날 야근하는 남편을 위해 도시락을 싸서 회사에 갔는데 남편이 다른 남자와 키스를 하고 있는 모습을 목격한 이후로 그녀의 삶의 기반이 뿌리부터 흔들린다. 여기서 캐시가 보이는 하나의 독특한 특징이 있는데 캐시는 자신에게 일어나는 일을 굉장히 라이트하게 받아들인다는 점이다. 이런 면이 '편견 없음'과 연관이 되는가? 생각해 보게 된다. 왜냐하면 내가 매우 그런 편에 속하기 때문이다. ENTP의 특징 중 하나가 '사람 아래에 사람 없고, 사람 위에 사람 없다.'라고 생각하는 것인데 내가 정말로 그렇다. 윗사람이라고 딱히 어렵지 않고, 어린아이들과도 친구처럼 재밌게 대화할 수 있다. 내 생각은 분명하고 그것을 표현하는 것도 힘든 일이 아니나, 다른 사람의 생각도 '그럴 수 있다.'라고 진짜로 그렇게 생각한다. 얘기가 약간 삼천포로 빠진 것 같지만 물론 이 영화의 주인공 캐시는 나와 결은 아주 다르지만 그녀의 관대함이 진지하게 다루어져야 할 문제들도 '그럴 수 있다'로 쉽게 넘어가게 하는 면이 있다는 것이다. 

함께 아이를 둘이나 낳은 남편이 자신이 모르는 남자와 키스를 하고 있는 모습을 목격하고도 캐시는 울지 않는다. (물론 놀라서 도시락을 집어던지고 나오긴 한다) 프랭크와 진지하게 대화하는 대신 얼마든지 고칠 수 있는 병으로 취급하고 그를 병원에 데려간다. 그때는 지금과 다르기 때문에 프랭크 본인도 그냥 캐시에게 끌려간다. 전시회에서 우연히 만난 레이먼드와 스스럼없이 대화한다. 이것이 문제가 되는 이유는 레이먼드가 이 전시회를 보런 온 유일한 흑인이기 때문이다. 그와 그녀의 딸 외에는 모두 백인이다. 그리고 그 자리에 있는 백인들은 레이먼드와 캐시를 이상한 눈으로 쳐다본다. 한 사람도 예외 없이 말이다. 캐시의 친구 엘리노어가 눈치를 줘도 캐시는 아무렇지 않게 생각하고 넘어가 버린다. 프랭크와 크게 싸우고 그를 어떻게 해야 할지, 자신은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할지 막막해서 캐시는 그제야 눈물을 흘린다. 그리고 또 이 모습을 레이먼드가 보게 된다. 레이먼드는 자신이 어차피 교외로 나가야 하니 함께 나가지 않겠느냐고 제안하고 캐시는 그와 동행한다. 이 일은 부풀려져서 온 동네에 소문이 나게 된다. 남편 프랭크도 듣고 와서 캐시에게 추궁하는데 그때 캐시는 그런 적이 없다고 거짓말할 수밖에 없다. 


남편의 문제도 노력하면 해결할 수 있다고 믿는다. 그런데 그녀가 생각하는 노력이란 고작 그와 여행을 가는 것이다. 그 여행에서 그가 캐시에게 보여준 친절함이란 말 그대로 친절함일 뿐이다. 미안하니까, 노력해보자고 했으니까, 사업도 놓을 수 없으니까 그러는 척할 뿐이다. 그러나 캐시는 그걸로 다 됐다고 믿는다. (프랭크는 그 여행에서 진짜 연인을 만난다) 함께 화려한 파티를 즐겼던 백인들에게 캐시는 절대로 자신의 고민을 털어놓지 못한다. 백인 미인에게도 주눅 들지 않고 편하게 대화할 수 있는 레이먼드에게서만 위로를 얻을 수 있다. 고민도 쉽고, 위로도 쉽다. 모든 것이 잘 풀릴 것 같은 감상에 사로잡힌 그녀는 활짝 웃으며 딸의 발레 발표회를 보러 가지만 자신이 이미 동네 사람들한테 이상한 여자로 찍혔다는 것만 확인할 수 있다.  레이먼드와 다시는 볼 수 없겠다고 먼저 얘기한 캐시이지만 그녀가 다시 손을 내밀면 레이먼드가 당연히 그녀의 손을 잡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레이먼드는 딸과 함께 코네티컷을 떠나기로 결정한다. 엘리노어에게 뒤늦게 프랭크의 일을 털어놓지만 엘리노어는 프랭크의 일은 이해를 해도(캐시가 피해자이기 때문에) 레이먼드에게서 위로를 얻었다는 것은 이해를 못 한다. 그렇게 캐시는 남편도 떠나보내고(결국 이혼한다) 연인이 될 수도 있었던 친구도 떠나보내고 널 위해선 뭐든 할 수 있다던 절친과도 멀어지고 동네에서는 고립된다. 


어떤 문제는 누군가에게 매우 엄중하고 진지할 수 있다. 

프랭크에게 있어서 남자를 좋아한다는 것이 그렇다. 

코네티컷 주민들에게 있어서 흑인과의 완전한 평등의 문제가 그렇다.

레이먼드에게 있어서 우정이 그렇다. 


그러나 캐시에게는 프랭크의 문제도 동네 주민들의 사고방식도 레이먼드의 다정함도 너무 쉽고 가볍다. 물론 이런 식으로만 캐시를 표현하는 것은 그녀에게 불공평하다는 것을 안다. 캐시 역시 참 다정하고 선한 사람이다. 그리고 결국은 그들의 선택을 존중하는 성숙한 사람이다. 그러나 그들이 엄중하고 진지하게 생각하는 문제들에 대해서 캐시는 그들과 엄중하고 진지하게 대화하지 않는다. 자신의 감정 따라, 자신의 생각대로 가볍게 처리한다. 그 결과 그녀는 그들 모두를 잃는다. 

내 생각이 옳아도 내 생각과 다르게 생각하는 사람을 속에서 나는 그들이 왜 그렇게 생각하는지를 진지하게 고려할 필요가 있다. 당신들이 틀렸다면, 그럼에도 틀린 것을 계속 고수한다면 왜 그런 것인가. 그렇다면 나는 이 속에서 어떻게 살아가야 할 것인가는 엄중하게 생각할 문제이다.

위로받고 싶어 올라탄 트럭이 울트라급 소문을 불러올 수도 있다는 것을, 그 소문은 나 자신에게뿐 아니라 레이먼드에게도 피해가 될 수 있다는 것을, 자신이 피해자라는 생각에 빠져 다른 남자와 둘이 바람 쐬러 나가는 행동이 얼마나 이기적이고 위험한 것인지를, 원치 않게 놓을 수밖에 없던 그 손을 다시 잡을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것을 그녀는 생각하지 못했다. 


뭐든지 가볍고 쉽게 생각하기 때문에 편견이 없는 것이어서는 안 된다. 오랜 숙고 끝에 내린 결론이 그것이기 때문에 그렇게, 편견 없이 살기로 결심해야 한다. 아직 편견 속에 갇혀 있는 자들을 우습게 생각해서는 안된다. 왜냐하면 그들에게는 매우 중요한 문제이기 때문이다. 아직까지는 말이다. 

편견 없는 사람이 편견으로 만들어진 세상 속에서 살아가려면 아이러니하게도 편견을 고집하는 이들을 진지하게 생각해야 한다. 내 생각과 감정으로 쉽게 그들을 재단하고 모든 것이 결국은 내가 원하는 대로 될 것이라(내가 옳기 때문에, 어쩔 수 없었기 때문에) 믿어서는 안 된다. 


카메라는 레이먼드를 배웅하고 홀로 걸어 나오는 캐시를 원거리에서 잡는다. 앞으로의 그녀의 삶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듯이. 


그녀의 다정함과 선함과 편견 없음이 언젠가는 사랑받을 수 있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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