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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우르슬라 May 30. 2022

사랑을 카피하다 (2010)

- 아름다운 것을 향유하는 너와 나의 스타일

감독 : 압바스 키아로스타미

출연 : 줄리엣 비노쉬, 윌리엄 쉬멜


BBC 선정 21세기 위대한 영화 46위에 랭크된 이란의 압바스 키아로스타미 감독의 영화 <사랑을 카피하다>를 보았다. 압바스 키아로스타미 감독은 개인적으로 참 좋아하는 감독님이시고, 가능한 이 분의 작품을 다 보려고 한다. (이제 새 작품을 볼 수 없다는 것이 너무 슬픈 일이지만) 영화를 보기 전에 평점을 봤는데 꽤 높아서 기대를 하면서 봤는데 영화를 보면서는 특별한 것을 느끼지는 못했다. 다 보고 나서 한참 생각을 해보니 굉장히 많은 이야기를 할 수 있는 영화라는 생각이 들었다. 키아로스타미 감독님이 이란을 떠나서 이탈리아에서 프랑스 배우와 영국 배우를 데리고 촬영했다는 것도 참 신선했다. 누구와 어디서 작업한들 실력은 어디 가지 않는구나 하는 생각도 들었다. 


제임스 밀러(윌리엄 쉬멜)는 영국의 작가로 '기막힌 복제품'이라는 에세이를 썼는데 자국에서와 달리 이탈리아에서 최우수 외국어 에세이상을 수상하면서 이탈리아에 와서 독자들을 만나는 시간을 가진다. 엘르(줄리엣 비노쉬)는 프랑스인이지만 이곳에 와서 산 지 5년이 되었다. 그녀의 직업이 정확히 무엇인지는 모르겠는데 개인 점포를 가지고 있고, 골동품을 모으는 취미가 있어 제임스 밀러의 책과 자연스레 접하게 된 것이다. 골동품이란 쉽게 말해 예술작품을 본떠서 만든 것들이다. 진품과 비슷한 느낌을 주는 물건들. 그런데 이 제임스 밀러라는 잘생긴 영국 남자가 '복제품을 통해 원본의 미에 접근할 수 있다면 다분한 가치가 있다'는 취지의 글을 쓴 것이다. 자신의 애호가 인정받고 있다는 생각에 그의 책도 사고, 그를 만날 수 있는 출판 기념행사에도 참여하는 엘르, 그러나 12-3살쯤 되어 보이는 그의 아들이 기어코 그녀를 밖으로 끌어낸다. 배가 고프다고. 끌려 나가기 전 엘르는 옆에 앉는 이 책의 번역자에게(아는 사이처럼 보인다) 자신의 연락처와 사는 곳을 알린다. 어떤 이유에서인지는 모르겠으나 제임스 밀러는 그녀를 찾아간다. 이탈리아에까지 와서 초대를 거절하는 것이 도리가 아니라고 생각한 것인지, 맨 앞자리에 앉아서 자기를 향해 웃고 있다가 중간에 나가버린 그녀에 대한 호기심 때문이었는지 그는 그녀가 기다리고 있는 그곳을 찾아가는 것이다.



인생의 달고 쓴 경험을 그럭저럭 해 본 나이들이어서 그럴까? 그녀가 수집해 둔 골동품이 잔뜩 있는 어두운 그 공간에서의 첫 만남이 지나고 나자 둘 사이에 서먹함은 금방 사라진다. 날씨가 좋아 바깥에 나가고 싶다는 제임스를 엘르는 자신의 차에 태우고 어디론가로 향한다. 둘이 나누는 첫 대화는 이렇다. 엘르는 자신의 여동생과 제부를 흉본다. 엘르의 눈에 제부는 우스꽝스럽기 짝이 없고 이상하고 멋도 없다. 그런데 여동생은 그런 남자를 다 괜찮다고 하며 좋아한다고 이해할 수 없다고 말한다. 제임스는 당신 여동생의 남편은 그 나름대로 가치가 있다. 당신이 말하는 것처럼 이상하지 않다고 한다. 자신의 말에 맞장구쳐주지 않는 제임스가 못마땅한 엘르. 그에게 잘 보이고 싶고, 그와 연애를 해보고 싶음에도 맘에 들지 않는 것은 그대로 표현한다. 

그녀가 제임스를 데리고 간 곳은 한 박물관인데, 그녀는 전시되어 있는 한 작품(회화)을 보고 '진품'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가이드의 설명을 듣다 보면 이 작품은 수세기 동안 진품으로 여겨졌는데 불과 50년 전에 위작으로 판명 났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위작임에도 사람들에게 감동을 주고 오리지널이라고 믿게 할 만큼 강한 힘을 가진 작품이라는 것을 말한다. 이 작품이 제임스의 책을 대표적으로 설명해주는 작품이라고 생각하고 일부러 데려왔건만 어쩐지 제임스는 시큰둥하다. 제임스의 말은 이렇다. 원본이라는 것도 실제로 존재하는 인물을 복제한 것 아니냐. 진짜 오리지널은 이 작품의 모델이 된 사람, 또는 장소, 어떤 것이지 않겠느냐는 것이다.


제임스의 생각이 이러하기에 이 남자는 오히려 복제품에 대해 관대했던 것이다. 네가 베낀 그 작품도 실상은 어떤 것을 모델로 삼아 만들어낸 카피본이라고. 그래서 이 남자는 엘르처럼 골동품을 모으지 않고, 생활에서는 실용적인 것을 추구한다. 작품과 거리를 두고 너무 빠지려고 하지 않는다. 소유하려 들지 않는다. 그런데 항상 모든 것과 일정 거리를 두고 있기 때문에 제임스는 오히려 그것과 붙어 있는 사람의 실상은 이해하지 못한다. 말도 더럽게 안 듣는 아들이랑 매일매일 부대끼며 살아야 하는 고충, 꼴 보기 싫은 애정행각을 지켜봐야 하는 답답함. 엘르가 느끼고 있는 불편함과 힘듦은 실상인데 제임스는 그렇게 생각할 것만은 아니라고 말한다. 아들은 아들의 입장이 있는 것이고, 동생이나 제부도 그들만의 입장이 있는 것이라고.

그래서 이 커플은 겉으로 보기에는 여자가 낭만을 추구하고 남자가 무뚝뚝한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남자인 제임스가 훨씬 이상적이고 낭만적이다. 자신 외에 모든 것과 거리가 있어 하이퍼 리얼리즘의 세계에는 무지하기 때문이다. 

이들의 이런 라이프 스타일의 차이는 영화의 초반 '골동품'의 소유 여부에서 전면에 드러난다. 엘르는 아름다운 것을 소유함으로 향유하려고 한다. 제임스는 아름다운 것에 너무 빠지지 않으려고 거리를 둠으로써 향유한다. 그래서 엘르는 복제품을 자기 집(가게)에 두는 것이고, 제임스는 그에 관대하지만 자신이 소유하지 않는다. 



그래서 감독은 '거울'을 이용한다. 거울에 비친 엘르의 모습을 보여줌으로 지금 그녀의 말과 행동이 실제인가 그녀의 모습이 투영된 허구인가, 질문을 던진다. 영화의 중반부에 들어서면 두 사람이 하는 말이 진실인지 아닌지 헷갈리기 시작하는데 먼저 제임스가 이 책을 쓸 때 영감을 받은 한 모자의 이야기를 하면서부터이다. 피렌체 시뇨리아 광장에서 다비드상(복제품)을 하염없이 바라보던 모자(엄마와 아들)에게서 영감을 받았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 이야기가 전부는 아니고 제임스가 머물던 숙소 맞은편에서 엄마가 먼저 걷고 아이가 따라 걷고, 아이가 어느 정도 오길 기다렸다가 또 먼저 걷는 모자 이야기를 먼저 했는데 그 모자가 시뇨리아 광장에서 만난 모자였다는 것. (영화 초반에 엘르와 그녀의 아들이 이와 같이 걷는 장면이 나온다)

엘르는 그 이야기를 들으며 눈물을 흘린다. 나의 이야기라고 한다. 그때는 힘들었었다고. 그리고 제임스는 미안하다고 사과를 하는데 제임스의 말도 엘르의 말도 사실인지 아닌지는 알 수가 없다. 그리고 전화를 받으러 잠깐 자리를 비웠을 때 카페 주인은 그녀에게 말을 건다. 말의 내용은 중요하지 않고 주인이 두 사람을 부부로 착각한 것이 중요하다. 엘르는 아니라고 말하지 않고 결혼한 지 15년 되었다며 주인과 대화를 주고받는다. 제임스도 뭐하는 짓이냐고 면박을 주지 않고 그 나름의 방식으로 그녀의 연기에 맞추어 준다. 

작은 광장에서 조각품을 보며 갑론을박을 벌이고, 우연히 만난 다른 부부와 대화를 하고, 영원한 사랑을 가능케한다는, 신혼부부에게 인기 폭발인 특별한 장소도 가고, 식사하러 식당에도 들어가고, 부부였다가 아니였다가의 연기를 반복하는 두 사람. 자신의 마음을 몰라주는 제임스가 야속해 눈물이 핑 돌면서도 자기를 완전히 밀어내지 않고 자기의 부부 연기에 맞춰주는 제임스에게 완전히 희망을 놓을 수도 없어 엘르는 마지막으로 두 사람이 첫날밤을 보낸 호텔이 근처에 있다며 데리고 간다. 그때 이러이러하지 않았냐고 혼신의 연기를 펼치지만 제임스는 아무것도 기억나지 않는다고 말한다. 이런 방식으로 애정을 표현하는 엘르에게 맞춰줌으로 제임스는 관대함을 보여주지만 여기에서도 마찬가지로 거리를 확실하게 두는 것이다. 


최후의 거절을 한 제임스는 9시 기차에 늦지 않기 위해 매무새를 만진다. 화장실에서 손을 씻으며 거울 속에 비친 자신의 얼굴을 본다. 아주 약간의 미안함은 있지만 아무것도 원하지 않는 얼굴. 그 얼굴 뒤로 8번의 종소리가 울리면서 이 둘의 로맨스는 여기에서 끝날 것임을 알린다. 



진품을 가질 수 없어도, 그와 비슷한 것은 가질 수 있었다. 어쩌다 보니 이곳에 두게 된 것이라고는 말했지만(엘르가) 분명 그녀가 직접 구해서 그곳에 둔 것이다. 이미 위작으로 밝혀졌지만 그녀는 그 작품을 'original copy'라고 말했다. 수세기 동안 그렇게 여겨졌고, 위작도 이렇게 큰 감동을 줄 수 있다는 점이 카피본만을 가지고 있는 그녀를 얼만큼은 위로했기 때문일 것이다. 자신과 제임스를 부부로 착각했다는 것이 싫지 않았다. 오히려 좋았다. 그래서 부부 행세를 하며 어떻게든 그와 가까워지려고 노력했다. 여자가 남자에게 기대어 있는 모양의 조각상을 보고 말할 가치도 없다고 폄하한 제임스에게 언성을 높이며 자신의 의견을 피력했다. 막 결혼식을 올린 부부들이 모여 있는 낭만적인 장소에도 데려가 거기에서도 두 사람을 부부라고 소개해 어떻게든 에피소드를 만들려고 했다. 그러나 제임스는 처음부터 9시 기차를 타야 한다고 말했다는 분명하게 고한다. 나는 당신이 원하는 것을 줄 수 없다고.




카피본을 보고도 진품에서 느끼는 듯한 감동을 느낄 수 있었고, 그와 꼭 닮은 복제품도 소유할 수 있었다. 그러나 사랑만큼은 뜻대로 되지 않았다. 남들 눈에 부부로 보여도, 그것을 기회 삼아 부부 행세를 해 보아도 그것은 어디까지나 카피일 뿐 진품이 아니다. 

엘르는 처음부터 제임스에게 호감이 있었다. 그래서 그와 어떻게든 만나고 잘해보려고 기회를 만들었다. 그러나 제임스는 달랐다. 애초에 출발이 다른 두 사람이 하루 낮 동안 함께 시간을 보내며 마치 부부인 듯 대화도 해보고 거짓말을 해보아도 출발이 다르고 목적지가 다르기에 종착점도 다를 수밖에 없다. 그녀가 소장한 골동품이나 박물관에 걸린 위작이나 시뇨리아 광장의 복제된 다비드상과 좀 전에 봤던 남녀 조각상을 보며 엘르는 어떤 감정을 느꼈다. 그리고 그녀가 느낀 감정만큼은 진짜였다. 적어도 그녀 스스로 생각하기에는. 그래서 사랑도 그런 방식으로 접근했다. 일단 흉내 내어 보았다. 나에게 맞춰주는 상대방의 말과 행동이 진심이라고 믿어버렸다. 그러나 제임스가 <기막힌 복제품>이라는 책을 쓴 것은 우리가 원본이라고 말하는 것조차 어떤 것을 본뜬 것일 수 있기에, 복제품 그 자체도 가치가 있다고 생각한 것이다. 원본 조차도 일종의 복제품이라고 믿는 그가 다른 누구의 손을 거치지 않은 어떤 존재만이 원본이라고 생각하는 그가 복제품을 사 모으며 거짓 부부 행세를 해서라도 자신을 소유하려는 엘르에게 마음이 갈 수 없었다. 


내 생각에 압바스 키아로스타미 감독은 자신의 작품의 오리지널리티에 대한 의심과 고민 때문에 이 영화를 만들게 된 것이 아닐까 한다. 그의 작품 성향이 리얼리즘을 지향하기 때문에 더욱 그렇다. 내가 지금 찍고 있는 이 영화는 저 사람들을 카피한 것인데 그렇다면 내 영화는 original copy라고 말할 수 있을까? 하는 의심과 고민. 그것을 사람과 사랑으로 투영해 새로운 영화를 만든 것도 참 대단하다는 생각이 든다. 그리고 모국어인 프랑스어와 영어, 이탈리어를 유창하게 구사하며 완벽한 연기를 보여준(이 영화로 줄리엣 비노쉬는 칸 영화제 여우주연상을 수상했다) 줄리엣 비노쉬와, 영국 오페라 가수로서 카메라 앞에서는 처음 연기했다는 모국어인 영어와 프랑스어를 역시 유창하게 구사한 윌리엄 쉬멜의 연기에도 박수를 쳐주고 싶다. 


최근 들어 가장 힘들게 쓴 리뷰이다. 처음 볼 때는 보이지 않았던 것들이 다시 보면 보이고 영화에 대해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심오한 철학을 담고 있어 생각을 정리하기가 쉽지 않아 몇 번을 돌려 보았다. 이 리뷰 역시 이 영화에 대한 작은 부분만을 담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내 친구의 말처럼 넘사벽은 존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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