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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우르슬라 Jul 04. 2022

아무르 (2012)

- 시작은 사랑이었으나 그 끝은 알 수 없는 것

감독 : 미카엘 하네케
출연 : 장-루이 트린티냥, 엠마누엘 리바, 이자벨 위페르, 알렉상드르 타로


BBC 선정 21세기 위대한 영화 42위에 랭크된 미카엘 하네케 감독의 <아무르>를 보았다.  미카엘 하네케 감독의 <피아니스트>를 우연히 본 이후 팬이 되어서 감독님의 영화를 여러 편 챙겨 보았다. 보기 쉬운(여러 측면에서) 영화를 만드는 분은 아니지만 이 영화의 결말이 상당히 충격적이어서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곰곰이 생각한 후 리뷰를 쓴다. 

먼저 노배우 두 분께 박수를 보내 드리고 싶다. 섬세하지만 절도 있고 깊이 있는 연기 내공 두 분의 연기를 본 것만으로도 충만하게 채워지는 느낌이 있다. 거기에 이자벨 위페르가 더해지니 연기에 대해서는 더 설명할 말이 필요 없을 것 같다. 


교양 있고 사이좋은 노부부 조르주와 안느.
여느 때처럼 아침 식사를 하고 있던 어느 날, 식사 도중 안느는 갑자기 눈이 풀리고 멍한 상태로 조르주의 말을 하나도 알아듣지 못하며 남편의 가슴을 철렁하게 만든다. 그러다가 다시 정신이 돌아왔을 때는 자신이 그런 상태였다는 것을 전혀 기억하지 못하고 안느는 곧 뇌졸중으로 수술을 받게 되나 잘 되지 않는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건강하게, 그리고 다정하게 안느의 제자의 리사이틀에 다녀온 그들이었는데, 갑자기 반신 불수가 된 안느가 병원에서 집으로 돌아온다. 그리고 이제 남편 조르주의 병시중 생활이 시작된다. 도도한 안느는 자신이 이런 꼴이 됐다는 것을 받아들이기가 힘들고 남편에게 의지해야만 하는 자신의 처지에 화가 난다. 그래도 이 부부는 초반에는 이 어려움을 잘 극복해 나간다.



그러나 안느에게 2차 뇌졸중이 발생하고, 안느의 상태는 현저히 나빠진다. 따라서 돌보기도 현저히 힘들어진다. 그런데 남편 조르주는 주 3일 몇 시간씩 간병인을 불러 도움을 받는 것 외에는 일체 누군가와 안느에 대해 상의하거나, 힘들다는 내색을 하지 않고 안느를 돌보는 일을 오롯이 홀로 감당하려고 한다.

딸이 가끔 찾아와 어머니의 상태를 확인하고, 이런저런 제안들을 하지만 조르주에게는 그 말들이 다 공허하게 들리는 것이다. 왜냐하면 이 노부부는 부부 둘이서 매우 독립적으로 살아온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다른 사람에게 폐 끼치지 않으려는 태도, 가능한 자신의 힘으로 해보려는 태도는 상당히 긍정적이긴 하다. 그런데 무엇을, 왜 혼자서 감당하려고 하는가를 생각해 보지 않을 수 없다. 자녀로부터도 완전히 독립적으로 살고 있었고, 둘 만으로 충분했었다고 하더라도 아픈 엄마를 보러 온 딸에게조차 아내를 보여주지 않으려는 조르주의 태도는 어딘가 이상하다. 아내의 회복이 목표라면 그 목표를 위해서라면 누군가에게 말할 수도, 도움을 요청할 수도 있어야 한다. 그것이 평범한 것이고 상식적인 것이다. 하물며 딸에게 못할 말이 뭐가 있을까.



말도 안 되는 이런저런 핑계를 대가면서 딸에게조차 안느를 보여주지 않는 조르주. 혼자 감당하는 것이 힘에 부치긴 하지만 그래도 한 번 화내지 않고 인내심을 가지고 아내를 보살핀다. 혼자 누워서 계속 괴성을 지르고 있는 안느에게 다가가 손을 잡고 조곤조곤 이야기를 하는 걸 보고 있자니 정말 대단하다는 생각이 든다. 


그러나 곧 조르주는 베개로 안느의 얼굴을 덮어 눌러 안느를 죽인다.
그리고 고운 옷을 입히고 화관을 씌워주고 이제 그녀가 누워 있는 방문을 봉쇄한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는지는 알 수 없으나 홀로 남은 조르주는 안느의 환영을 본다.



건강했던 때의 안느를, 그리고 그녀를 따라 문 밖을 나선다. 그리고 이후에 그가 어떻게 되었는지는 알 수 없다. 더 시간이 흐른 후에 이미 부패한 안느의 시체를 경찰이 발견할 뿐이다.




이 영화의 결말과 영화의 제목인 '아무르'가 과연 상응하는가. 생각해 보았다.

제목은 분명 '아무르' = 사랑인데, 조르주의 행동이 정말 사랑이었나는 의문이 든다. 남편인 조르주가 힘든 것은 잘 이해할 수 있다.( 더군다나 안느는 착한 환자가 아니었다. 밥도 잘 먹지 않고, 병원엔 다시 보내지 말라고 협박을 하고) 그렇다고 그가 한 행동이 용납받을 수 있는 것인가.


심정적으로는 이해가 가면서도 결국 그의 최후의 행동에는 수긍하기가 어렵다. 이 나라에 사는 평범한 소시민의 입장에서 대입해서도 생각해 보았다. 분명 우리나라 정서와 많이 다르다는 것도 알겠다. 자녀가 결혼하면 어쨌든 거리가 멀어지는 것이 사실이지만 우리나라의 경우 일반적으로 부모의 질병은 가족 모두의 문제가 된다. 함께 의논하고 해결할 문제이지 수발을 들어야 하는 부모에게 모든 것을 결정하라고, 알아서 하라고 하지는 않는다. 죽어가는 부모를 보며 또는 배우자를 보며 절대 병원에 보내지 말라는 얘기를 들어줄 분위기도 아니다. 그러나 노년의 조르주는 혼자서 이 모든 일을 결정하고 해결해 나가고, 가족뿐 아니라, 이웃이나 친구들과 이 일을 상의조차 하지 않으니(그게 그 나라의 보편적 정서인지도 모르겠으나) 소통의 부재가 그를 더 답답하게 얽어맨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든다.

이러한 폐쇄성은 공간적인 측면에서도 동일하게 드러난다. 영화는 초반에 부부가 공연장에 있는 모습 외에는 시종일관 그들이 사는 집에서만 이야기가 진행되는데 병원에 다녀왔다는 것을 인물의 대사를 통해 알 수 있을 뿐 병원에 있는 안느의 모습조차 볼 수 없다. 그들은 내내 집안에만 있는다.

뜬금없는 그림 몇 장이 영화 내에 삽입된 것은 그런 숨 막힘을 잠시나마 해소하기 위한 장치가 아니었나 생각이 든다.


병원에 다시는 가지 않겠다고 우기는 안느를 보며, 이 사람은 '집'에서 돌보는 수밖에 없구나 생각했을 테고, 피아니스트로서의 커리어가 여전히 형형히 빛나는 자신만만하고 고고했던 그녀의 마지막 자존심을 지켜주고 싶은 생각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또 한편으로는 조르주가 자신과 아내를 동일시한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든다. 안느가 마치 자신처럼 느껴지기 때문에 누구에게도 그녀를 보여주고 싶지가 않은 것이다. 특히 그녀가 어떻게 살아왔는지 잘 아는 사람에게는 더더욱.

안느의 상태에 대한 것이 전적으로 조르주의 책임이어서 그랬는지, 안느는 자신의 이런 모습을 누구에게도 보이고 싶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해서 그랬는지는 모르겠으나 무엇이든지 간에 안느가 느낄 수치심을 조르주 역시 고스란히, 동일하게 느끼고 있는 것만은 분명해 보인다. 이것이 완벽해 보이는 이 부부의 결정적 문제였다. 겉으로 보기에는 존중과 독립으로 보이지만 사실 이 부부는 서로에게 상당히 유착되어 있었던 것이다. '우리'라 함은 둘이면서 하나라는 개념일 텐데 둘은 사라지고 하나만 남아 조르주와 안느라는 덩어리로 존재했던 것. 본인들은 전혀 눈치 채지 못한 이런 역기능적인 관계가 두 사람을 결국 막다른 골목으로 내몬 것이다.


안느를 그렇게 죽인 후, 조르주가 그녀의 환영을 보는 것은 어떻게 해석할 것인가. 죽여 놓고 죽음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그녀가 아직 살아있는 듯 행동하며 예전처럼 뚜벅뚜벅 걸어 문밖으로 나가는 그녀를 따라 집을 나선 그가 최후에 도착한 곳은 어디였을까. 그는 남아 있는 자신의 삶을 어떻게 처리했을까.


언제부터인가 그의 무의식은 서로의 죽음을 결정했던 것일까? 이렇게 계속 사느니 같이 죽는 것이 낫겠다고. 그래도 확실한 것은, 조르주가 병시중이 힘들어서, 안느가 죽으면 내가 편할 것 같아서 그런 동기로만 안느를 죽인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확실하게 안느를 죽이고 나도 죽자!라는 명확한 시나리오를 쓰고 옮긴 행동은 아닐지라도, 안느의 죽음과 자신의 죽음을 한 덩어리로 놓고 생각한 것은 틀림없어 보인다. 그렇다면 이런 조르주의 선택은 과연 '아무르'인 건가. 나는 아무리 생각해도 이게 '사랑'이라는 확신이 들지는 않는다. 그렇다고 '사랑이 아니다'라고 단언할 수도 없다. 인간이란 사랑이란 이름으로 믿을 수 없는 강인함을 보이다가도, 인생 자체의 불완전함을 안고 살아가기에 한없이 나약해지기도 하는 복잡한 존재이구나.라고 말할 수밖에 없을 것 같다. 그래서 어딘가에 사랑이다, 아니다고 단정 지을 수 없는 어떤 감정도 존재하는 것이라고. 


처음엔 사랑이었다.
사랑하는 마음으로 성심껏 돌보았다.
그러나 그 끝은 알 수 없는 것이 우리의 인생. 


불완전하다고 해서 아니라고 할 수 있단 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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