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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우르슬라 Aug 29. 2022

사울의 아들 (2016)

- 타인의 인간다움을 지켜주는 것에서 나의 인간다움이 온다.

감독 : 라즐로 네메스

출연 : 게자 뢰리히


BBC 선정 21세기 위대한 영화 34위에 랭크된 라즐로 네메스 감독의 <사울의 아들>을 보았다. 이 영화는 개봉 당시 아무런 정보 없이 극장에 갔다가 10분 정도 보고 견디지 못해서 뛰쳐나와서 정말 큰맘 먹고 리뷰를 쓰기 위해 다시 본 영화이다. 큰 스크린이 아니고, 음향도 노트북 음향이고 슬쩍슬쩍 시선을 피해 가면서 보니 극장에서 느꼈던 충격보다는 덜했다. 내가 본 영화 중에 가장 보기 힘들고 끔찍한 영화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보기는 힘들어도 훌륭한 영화라는 평을 많이 보아서 얼마나 잘 만든 영화일까 기대했는데, 뭐랄까. 아우슈비츠의 극한 상황과는 별개로 주인공 사울을 이해하기가 어려운 부분도 있어서 좀 답답했다. (볼 때는 그랬지만 리뷰를 쓰면서 이해되는 부분이 있다) 나무위키를 보면서 알게 된 사실인데 라즐로 네메스 감독은 벨라 타르 감독의 조감독이었다고 하며, 주연 사울 역을 맡은 게자 뢰리히는 유대계 헝가리인으로 감독의 친구이고 시인 겸 유치원 교사였는데, 처음에는 조연을 맡으려고 했는데 감독과 대화하면서 주연을 맡기로 했다고. 그러니까 이 영화가 그의 데뷔작인 것이다. 아무런 경력이 없어도 이렇게 잘할 수도 있구나 싶어서 놀랐다는. 


아우슈비츠의 존더코만도(시체처리반)인 사울. 이 날도 죽을 줄 모르고 속아서 수용소에 들어온 한 무리의 유대인들. 남녀노소 할 것 없이 홀딱 벗겨져서 가스실에 집어넣어진다. 존더코만도들은 그들이 절규하며 죽어갈 때 그들이 벗어놓은 옷가지에서 금품을 찾아 숨긴다. 급작스레 찾아온 침묵. 가스실 문이 열리고 한 덩어리가 된 시체 무더기를 틈에서 아직 숨이 붙어있는 소년 하나를 발견하게 된다. 그런데 독일 군인은 그 소년의 입을 막아 질식사시킨다. 소년의 시체는 마루타가 되어 부검의에게 보내진다. 사울은 의사에게 그 소년이 자신의 아들이라며 부검을 하지 말아 달라고 부탁하지만 부검의 역시 포로이기 때문에 그의 부탁을 들어줄 수는 없다. 다만 시체를 소각하기 전 애도할 시간을 마련해 주겠다고 약속한다.

그러나 그때부터 사울은 이 소년의 장례를 치러주겠다는 단 하나의 목표를 향해 온 몸을 내던진다. 유대인들은 장례를 치를 때 랍비를 모셔 기도를 하게 하는가 보다. 소각이 아닌, 매장. 그리고 진짜 랍비의 기도가 있는 제대로 된 장례를 치르는 것. 사울 스스로 만든 미션을 수행하기 위해 자신의 온 신경을 집중한다. 존더코만도 중에 랍비가 있었는데 가장 먼저 그에게 찾아가 기도를 해달라고 하지만 거절당한다. 이후, 수용소 창고 문을 수리한다는 이유로 수용소 밖 시체 소각장에 가게 될 기회가 생기자 사울은 자신이 시계 수리공을 했었다며 거짓말한 후 밖으로 나가 다른 랍비를 찾는다. 랍비인 것처럼 보이는 그리스인 랍비를 찾아내 다른 사람의 시선은 아랑곳 않고 자기 아들의 장례를 부탁한다. 말을 못 알아듣자 토라를 암송하는 사울. 그는 사울의 입을 틀어막고, 부탁을 거절하는 의미로 강물에 들어가는데, 그 모습을 본 독일군은 그가 탈주하는 것으로 착각해 총살한다. 아무런 수확 없이 수용소로 돌아온 사울, 아들의 시체를 보러 부검실에 갔다가 시체가 사라진 것을 확인하고 망연자실한 사울 앞에 헝가리인 부검의는 시체를 숨겨 놓았다고 말한다. 사울은 앞뒤 가리지 않고 시체를 품고 존더코만도 숙소로 돌아와 그곳에 시체를 숨긴다. 경악하는 동료들에게 아우슈비츠의 실상을 기록한 문서를 숨겨놓은 곳을 발설하겠다고 협박하며 아들의 시체를 건드리지 말라고 윽박지른다. 



한편 수용소 내부에는 독일군에 저항하기 위해 준비하는 무리들이 존재했다. 아우슈비츠의 실상도 실상이거니와 존더코만도가 되었다 하더라도 몇 개월 죽음이 유예되었을 뿐, 그들도 곧 죽게 된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사울은 무기를 몰래 받아오는 임무를 맡아 나갔다가 다시 한 무리의 유대인들이 들어온 것을 보고 그곳에서 랍비를 찾아 헤매다가 받았던 화약을 잃어버린다. 

수용소 내 분위기가 험악해져 존더코만도들도 불려 가고, 시신을 수습하러 들어간 존더코만도들은 먼저 불려 간 존더코만도들의 옷을 보자, 그들이 죽었음을 알고 흥분해 봉기한다. 상황이 어지러운 틈을 타 사울은 숨겨뒀던 랍비(가짜)와 아들의 시신을 챙겨 탈출하고, 땅을 파 장례를 치르려 하지만 가짜 랍비는 기도문을 몇 마디 읊다가 도망쳐 버린다. 뒤쫓아오는 독일군들 때문에 다시 시체를 들쳐 매고 도망치는 사울. 사울을 시체를 데리고 강물에 뛰어들지만 곧 시체는 놓치고 만다. 어떤 폐가에 숨어든 도망자들. 망연자실한 사울 앞에 한 금발 소년이 나타난다. 사울은 소년을 보고 지금까지 한 번도 보여준 적 없는 미소를 짓는다. 소년은 곧 뛰어가고 한 명의 독일군과 마주친 소년의 입을 그가 틀어막고, 다른 독일군들이 그곳을 지나가자 소년을 놓아줘 도망치게 한다. 




홀로코스트를 다룬 영화들을 보면 인간의 악이 어디까지 갈 수 있는가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아이히만 쇼> 라는 영화에서 나온 그 당시 아우슈비츠 영상이나 사진들을 보고도 경악했었는데, 내가 본 홀로코스트 영화 중에서는 이 영화 <사울의 아들>이 가장 참혹하다. 감독은 4:3 화면 비율에 주인공 외에 뒷부분을 흐릿하게 처리하고, 시종일관 핸드헬드 기법으로 촬영해서 주인공 사울에 몰입하게 만들었다. 거기에 이 영화는 시각보다 청각으로 참혹함을 표현했는데, 극장에서 봤을 때 눈으로 들어오는 것도 충격적이었지만, 가스실에 사람들이 들어간 후 문을 두드리며 절규하는 그 아비규환이 그대로 귀에 들어오는 것이 정말 정말 고통스럽고 견디기 힘들었다. 

히틀러라는 한 사람에게 '유대인=악'이라는 명제가 새겨진 단 하나의 사실이 어떻게 이렇게 세상을 초토화시킬 수 있는가. 사람이 상상할 수 있는 악을 훌쩍 뛰어넘는 절대악. 그 악이 존재했음을 결코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잊지 않는다는 것은 히틀러가 악하다. 독일군이 악하다. 전쟁은 나쁘다. 이런 나이브한 명제들이어서는 안 될 것이다. 나 스스로, 내 안에 있는 자기 중심성과 악한 본성을 경계하는 것이 곧 역사를 잊지 않는 것이다. 기록된 역사를 잊지 않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왜 그런 일이 일어났는가, 나는 어떠한가.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인가를 생각해야만 한다. 타자를 비판하는 것에서 그치는 것은 정확하게는 잊지 않는 것이 아니다.



사울은 왜 그 소년의 장례를 치르기 위해 고군분투하는가. 영화를 보다 보면 이 소년이 사울의 진짜 아들이 아님은 쉽게 알 수 있다. 그럼에도 왜 그는 다른 사람을 위험에 빠뜨리고, 협박하면서도 시신을 지키려고, (막말로 이미 생명을 잃은 시체인데 말이다) 반드시 랍비를 불러 제대로 된 장례를 치러주려고 하느냐는 말이다. 

이곳 아우슈비츠에서는 아무도 자기 의지를 가진 사람이 없다. 독일군 조차도 말이다. 유대인은 모조리 죽여야 한다는 상부의 명령을 따르는 무의지의 존재들 뿐이다. 생각은 할 수 있다. '이 일은 뭔가 단단히 잘못된 일이다.'라고. 하지만 (물론 영화 속에서 봉기를 준비하는 존더코만도들이 나오기는 하지만) 그 생각을 자기 의지를 가지고 행동으로 옮기는 사람은 없다. 몇 날이라도 더 살기 위해서 사람들을 가스실에 집어넣고, 한 순간에 주검이 된 시신들을 처리한다. 


사울이 소년의 장례에 집착하는 이유는 '소년'이었다는 것보다는 그 소년이 가스실에서 죽지 않고 살아 나온 것을 목격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죽음을 뚫고 생명을 부지한 어린 소년이 단 몇 분 동안 살아있다가 죽임을 당하는 것을 본 것. 그것이 사울을 뭔가에 씌이게 한 것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지금 나는 걷고, 자고 또 먹기도 하지만 이것을 살아있다고 말할 수 있는가. 나를 인간이라고 할 수 있는가. 자신의 집착 때문에 다른 사람이 위험에 처하거나 죽게 되는 것도 사울에겐 중요하지 않다. 여기에선 정말 '살아있다'라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이 그에겐 아무도 없으므로. 이 삶이 과연 죽음보다 나은가. 며칠 더 사는 것이 의미가 있는가. 지금 죽지 않아도 곧 죽게 될 것이고, 살아있다한들 죽음보다 낫다고 할 수 없으므로 그는 다른 누군가를 살리는 일보다 살 수 있었던, 살아남았던 소년의 마지막을 마무리해주는 것. 인간이라면 죽어서 소각되는 것이 아니라, 한 사람의 생명이 살았던 것을 기억하며 장례를 잘 치러 보내주는 것. 그것이 사울이 생각하는 인간다움의 최후의 보루였기 때문에 그렇게 집착한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사울이 보여준 행동은 '사울 자신의 인간다움'을 지키기 위해서라기보다 '소년의 인간다움을 지켜주기 위한 것'으로 보는 것이 나는 더 맞다고 생각한다. 다른 사람의 인간다움을 지키는 것이 나의 인간다움을 지키는 것과 자연스레 연결되지만, 사울이 '자신의 양심' 따위를 생각했을 것 같지는 않다. 내가 이 정도는 해야 인간이지, 이런 생각으로 보여준 행동은 아닐 것이다. 그저 '살아남았고, 살 수 있었던 한 소년'의 마지막 가는 길을 최소한의 인간답게 마무리해주는 것을 원했을 것이다. 그것이 자신이 할 수 있는 한 인간의 인간다움을 지켜줄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었고, 끝까지 그것을 포기하지 않았기에 역설적으로 그 역시 마지막 인간다움을 지켜낸 사람이 되었다. 


내가 굉장히 좋아하는 드라마 <왓쳐>에 주인공들이 쫓는 범인 '거북이'가 범죄를 저지를 때마다 피해자에게 묻는 질문이 있다. "인간다움은 어디에서 오는 걸까요?"


여기에 하나의 답이 있다. 타인의 인간다움을 지켜주는 것. 나의 인간다움은 그곳에서 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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