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릴 때 살은 키로 간다고 했잖아요 (feat. 맛있는 녀석들)
하늘이 무너졌다.
“뼈 나이가 2년 이상 빠르네."
7개월 간의 기다림 끝에 얼굴을 알현한 소아청소년성장비만센터의 권위자는 진료 시작 단 10초 만에 엄마의 심장을 추락시켰다. 연륜이 느껴지는 반말이 그의 전문성에 신뢰를 더했다.
그는 손 엑스레이를 한 번 보더니 더 들여다볼 것도 없다는 듯 성조숙증 의심 판정을 내렸다. 자세한 검사를 해봐야 알겠다고 하면서도 이후의 치료 계획을 이야기하는 게 거의 확실시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125.8cm 30kg. 나이는 만 7세 7개월. 뼈 나이는 10세 추정.
이 속도로라면 성장은 또래보다 훨씬 일찍 끝날 것이며 생리 또한 감당하기 어려운 어린 나이에 시작할 거라 했다.
예정일을 훌쩍 넘기고 유도분만을 시도해도 나올 생각을 안 해 12월 끝자락에 간신이 제왕절개로 태어난 아이. 뭐 하나 시키면 세월아 네월아 결국 큰 소리가 나게 만들면서 뼈는 뭐 그렇게 급하다고 빨리 자란 건지.
심지어 예상키는 150cm 언저리.
2021년 대한민국 20대 여성의 평균 키는 161.3cm. 여자 사촌들조차 168cm 이상인 장신 집안에서 자란 나로서는 150이라는 숫자가 주는 아담함이 가늠조차 되지 않았다.
“코로나 때 1년 동안 8kg이 쪘어요.”
급 찐살이 성 조숙증의 원인이 될 수도 있다는 사전조사 지식을 바탕으로 다급하게 아이가 경도비만이 된 이유를 알렸다.
초등학교 입학식조차 치르지 못하고 집에 갇혀 있던 우리에게 한 줌 기쁨이었던 탄수화물. 쫄깃하고 매콤한 떡볶이의 매력을 알아버린 탓일까, 공원을 한 바퀴 돈 후 먹는 한국인의 맛(육개장 사발면)에 중독된 때문일까, 아니면 무료한 오후 ‘배달의 민족’에서 손쉽게 대령해주던 각종 빵들의 잘못일까.
권위자는 그럴 수도 있다며 새로운 합의를 도출해냈다.
“일단 몸무게를 더 이상 늘리지 않는 게 중요해. 운동 많이 하고 4개월 후에 다시 보자고. 줄넘기 많이 해.”
그렇게 초등 2학년, 지옥의 다이어트가 시작됐다.
전문가의 말이 바이블이기에 그날부터 바로 스케줄에 줄넘기 1000개를 추가했다.
일주일 내내 오후에는 수영, 피겨, 인라인스케이트, 음악 줄넘기, 자전거 타기를 돌려가며 하고 저녁에는 아빠의 감독 아래 줄넘기를 하는 주 7회 하루 2회 운동 스케줄. 체능단이 따로 없었다.
처음엔 1000개의 ‘모아 뛰기’를 하는데 40분이 넘게 걸렸다. 65개, 78개, 92개. 한 번에 100개를 넘기지 못하고 줄에 걸리곤 했다.
남편은 오래간만에 맡은 본인의 역할해 심취해 쓸데없이 비장했다. 마스크를 쓰고 호흡 곤란을 호소하며 바닥에 널브러지는 아이를 보고도 눈 하나 깜빡하지 않는 냉정함.
한 번 돌릴 때 50개 이하로 성공한 것은 횟수에 카운트하지도 않고 외쳤다.
“처음부터 다시.”
남의 몸 갖고 의욕이 넘쳐 1000개를 넘어 1500개씩을 매일 채우게 했다. 손흥민 선수 아버지에게 빙의라도 한 줄. 그렇게 한 달이 지나자 줄넘기 1500개를 하는 데 걸리는 시간은 15분 남짓. 마무리로 23층 집까지 계단 오르기까지 매일 더했더니 딸의 종아리는 언덕 꼭대기 학교를 3년 동안 오르내리던 고3 시절 나의 다리만큼이나 튼튼해졌다.
하지만 운동은 거들뿐. 20대 때부터 사흘이 멀다 하고 다이어트를 결심하고 있는 나의 경험상 다이어트의 성패를 결정하는 가장 큰 요인은 9할이 식이였다. 탄수화물이 주식이자 간식인 아이에게 밀가루 제한 공급 선언을 내렸다. 최애 음식 1,2위를 다투던 라면과 떡볶이는 한 달에 1회로 못 박았으며 싱크대 수납장에 가득했던 각종 주전부리들은 자취를 감췄다. 딸은 운동은 참을 수 있지만 먹는 것은 참을 수 없다며 격하게 반항했지만 미래의 키 앞에서 굴복했다. 머지않아 닭가슴살과 곤약밥이 들어간 김치볶음밥도 감지덕지하며 먹게 됐다.
습관처럼 우물 거리던 간식 대신 얼음을 씹으며 7년 7개월 인생 최대 시련을 견디던 초등학생.
그때 아이의 허기진 마음을 채워주던 프로그램이 바로 <맛있는 녀석들>이었다.
언제 시작했는지 기억조차 나지 않는 장수 프로그램이자 아직도 하루 언제 든 TV 채널을 돌리다 보면 재방송을 심심치 않게 만날 수 있는 '먹방'의 원조. 후덕한 인상의 출연자들 입속으로 음식이 들어갈 때마다 딸의 입도 따라서 벌어졌다. 눈으로 맛보는 경지. 천장에 굴비 한 마리를 걸어 놓고 밥을 먹은 ‘자린고비’의 심정이 이랬을까.
사실 나는 '먹방'이라는 것에 공감을 못 하는 사람이었다. 남 밥 먹는 걸 왜 쳐다보고 앉아 있는담.
체면치레가 중요한 선비 집안에서 자라 식탐이 품위 없다고 교육받았다. 특히 아버지가 음식을 남기는 것을 큰 죄라고 여겨 우리 집은 적정량 이상의 음식은 하지 않았다. 같은 명절 음식이 며칠씩 상에 오르기라도 하면 '딱 먹을 것만 하지 못해서 음식 낭비한다'는 아버지의 잔소리가 이어졌다. 그래서 우리 가족은 성인 넷이서 치킨 한 마리를 다 먹지 못했다. 입이 짧아서가 아니라 적은 양 때문에 서로 눈치를 보느라. 이런 가정환경 때문일까 혼밥이 유행하기 전부터도 나는 혼밥을 더 선호했다. 남의 눈치를 보지 않고 음식을 마음껏 먹는 게 편했다. 그러면서도 음식에 대한 욕구를 밖으로 드러내는 것은 추접하다는 생각에 '먹방'으로 대리만족을 하는 아이의 모습이 심란했던 것도 같다. 하지만 엄마 몰래 냉장고를 뒤지기보다 자신의 욕망을 그런 식으로라도 절제하려는 어린아이의 의지를 높이사 주말이면 슬쩍 <맛있는 녀석들>이 나오는 채널을 틀어놓곤 했다.
그렇게 4개월이 지나고 다시 소아청소년성장비만센터 권위자를 만나러 갔다. 아이의 키는 3센티 정도 자라 있었는데 몸무게는 28.5kg으로 줄어 있었다. 관리를 잘했다며 놀라워하는 전문가에게 그간의 노력을 알렸다.
“줄넘기가 좋다고 하셔서 하루에 1500개씩 했어요.”
칭찬을 바라는 장화 신은 고양이 표정으로 선생님을 보았다. 그런데 이게 웬일.
“에이 무릎 아파. 그러지 마. 5~600개만 해도 충분해.”
말 끝이 짧은 권위자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고 순간 아이의 원망스러운 눈동자와 마주쳤다.
다이어트 성공에도 불구하고 안타깝게도 뼈 나이는 더 성숙해 있었고 결국 우리는 성장억제 주사를 결정당한 채 진료실 밖으로 밀려났다. 1분 30초간의 짧은 만남에 채 묻지 못한 많은 질문들은 5개월 후 다음 만남으로 미뤄두고.
무릎의 안위를 염려당했음에도 불구하고 하드 트레이닝에 익숙해진 딸은 그 후로도 하루 1000개 이상의 줄넘기를 하며 하루를 마무리했다. 500개만 하면 개운하지가 않다며.
비가 오나 눈이 오나 하루도 거르지 않고 운동과 식이를 병행하고 1년 4개월이 지난 현재 아이의 키는 137cm, 몸무게는 31.5kg. 몸무게는 거의 변화가 없지만 키는 11cm 이상 자랐다.
그리고 다시 주 1회 떡볶이를 허가받은 그녀는 이제 <맛있는 녀석들>을 즐겨보지 않는다.
아무렴 그림의 떡보다는 내 입에 든 떡이 더 맛있는 법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