곱게 단장한 우리가 오빠의 디너쇼에서 조우하는 꿈. 이제는 서 있을 기력이 없는 우리의 테이블 사이를 돌며 손을 잡아주는 오빠. 춤출 기력이 없는 오빠는 댄스 곡 대신 가창실력을 뽐낼 잔잔한 선곡을 하겠지. 한창시절 우리를 설레게 했던 그 음악들. 호흡 하나라도 놓칠까 숨 쉬는 것도 잊고 오빠의 발음 하나하나에 귀 기울였던 그 노래들. 우리의 시간을 쏟고 지갑을 열게 했던 그 목소리. 어머님들이 나훈아 콘서트 티켓에 울고 웃듯 우리도 그렇게 되리라 생각했지.
그런데 오빠 왜 그랬어.
처음 한 번은 실수라고 생각했어. 기자들 앞에서 얼굴을 푹 숙이고 연신 죄송하다고 사과하는 오빠를 어떻게 미워할 수 있었을까. 누구나 내가 왜 이러지 하는 그런 시간들이 있잖아. 내 인생이 내 마음대로 되지 않는 순간들. 내가 나를 이끄는 게 아니라 어떤 거대한 힘이 나를 휩쓸어 가는 듯한 날들. 순간의 충동과 한 때의 치기가 두고두고 이불킥 하는 결과를 만들어 내는.
지금 생각해 보면 부처님도 아닌 주제에 오빠를 이해해 보려 한 것이야 말로 이불킥감이었지. 그때 끝냈으면, 내 덕질 인생도 1n 년으로 끝났을 것을.
그 후로도 몇 번쯤 오빠는 우리의 자비심을 시험했어.
오빠의 모습이 담긴 cctv가 뉴스에 오르내리고 나의 덕질 역사를 아는 이들이 ‘너네 오빠’ 소식 들었냐고 연락해 올 때, 아직도 오빠의 이름과 나를 연관 지어 생각하는 지인들이 있다는 사실에 얼굴이 화끈해졌어. 나에겐 완고한 낭만이었던 그 시간들을 어떤 이들은 어리석은 순정이라 조롱했겠지.
영화 <성덕>에는 나처럼 실패한 덕후가 된 팬들이 나와.
사랑했던 스타가 연예면이 아니라 사회면 뉴스에 나오는 꼴을 봐야 했던 사람들.
쏟아지는 플래시에도 눈 하나 깜빡 않고 카메라를 향해 유유히 손 흔들어주던 그 인간이 후드 티셔츠와 모자, 마스크를 뒤집어쓰고 자신의 존재를 지우기 위해 발악하는 몰골을 봐야 했던 이들.
영화 <성덕> / 오세연 감독
공부 열심히 하라는 내 스타의 한 마디에 죽을힘을 다해 전교 1등을 했던 경험. 더 열심히 살고 싶은 원동력이 되었던 매일매일. 그들은 마음 깊이 분노하고 배신감 느끼면서도 한 편으론 삶의 많은 부분을 차지했던 존재를 부정할 수 없어 착잡해하기도 해.
한때 우리의 이름은 누군가의 빠순이였어. 연예인을 넘치게 좋아하면 비웃음의 대상이기도 했기에 주변에 쉽게 정체를 밝히지 않았지. 그 나이 먹고 딴따라나 따라다닌다는 한심한 시선. 당당하게 취향을 드러낼 수 없었어. 온라인의 한 공간에서, 진짜 이름이 아닌 닉네임으로 서로를 만났지. 나만 알 수 있는 의미가 담긴 문자와 기호의 조합으로 이루어진. 오빠의 노래, 말투, 미소, 손짓, 발짓 하나하나까지도 그곳에서는 새로운 의미로 피어나곤 했지.
콘서트장도 혼자 갔어.
가장 예쁜 옷을 차려입고 간, 아는 이 하나 없는 공연장에 앉아 환호하며 야광봉을 흔들어도 전혀 어색하거나 부끄럽지 않았어. 혼자이지만 혼자가 아닌 경험. 낯선이 들 사이에서 느끼는 친근감. 오빠의 이름 석자로 이루어진, 가장 큰 연대였어.
빠순이라는 표현으로 비하되던 우리를 부르는 말이 어느 순간 '덕후'라는 명칭으로 바뀌더라. 어떤 분야에 몰두해 전문가 이상의 열정과 흥미를 가지고 있는 사람이라는 긍정적인 의미도 포함됐어. 이상하지. 어떤 애정이 추잡한 끈질김으로 비난받던 시대에서 올곧은 집념으로 인정받는 시대가 왔다는 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더 이상 그 애정을 이어갈 수 없다는 게.
10대의 끝자락. 처음으로 오빠에게 스며들었던 때를 기억해. 친구들이 주고 간 과자 봉지에 들어있던 오빠의 얼굴 스티커. 야간 자율학습 시간, 선생님 몰래 끼고 있던 워크맨 이어폰에서 흘러나오던 목소리. 지루한 밤 시간을 순식간으로 만든 마법 같은 음악들. TV에서 본 수줍은 미소가 좋아지고. 부끄럼 많은 성격이 좋아지고. 그렇게 매일 노래를 듣고 얼굴을 떠 올리고 스케줄을 체크하는 게 일상이 됐던 시간들. 처음처럼 뜨겁지는 않지만 20년이 넘도록 잔잔하게 익숙하게. 그렇게 영원한 팬으로 남으리라 생각했는데.
너무 아끼고 좋아하던 흰 셔츠가 있었어. 세상에 하얀 셔츠는 많지만 이렇게 찰떡같은 건 다시는 만날 수 없을 것 같았지. 오래오래 아껴 입고 싶어서, 닳을까 봐 세탁에도 손질에도 공을 들였어. 그러던 어느 날. 그 옷을 꺼낸 순간, 셔츠색이 묘하게 달라진 것을 느꼈어. 모양도 핏도 변하지 않았지만 누렇게 변한 색상. 흰색 특유의 화사함을 잃은 난처한 상아빛. 사회면에 실린 오빠를 보는 기분이 이랬을까. 아끼던 셔츠가 황변 된 것을 발견했을 때의 황망함. 그렇게 애지중지했는데도 변색을 막을 수 없었다는 허무함. 야속함.
더 이상 예전 같은 꿈을 꿀 수는 없겠지.
하지만 오빠의 존재로 위로받았던 그 시간들마저 부정하진 않을게. 그 시간이 습관이 돼 마음을 쏟는 이들에겐 고지식한 사랑을 주는 사람이 될 수 있었다는 것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