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비 들어왔냐?”
“아뇨, 새벽같이 축구한다고 나가서 연락도 안되네요. 술 마시나 봐요. ”
“아이고 걘 또 술을 마신다냐. 차 갖고 갔냐? 여태 안 들어가고 뭐 한다냐. 집에서 기다리는 사람 생각을 해야지 어째 또 그런다냐."
팔순을 앞둔 시어머님의 탄식이 이어진다. 시계는 오후 5시를 넘어서고 있다.
일요일 새벽 6시부터 조기축구에 나간 남편은 연락이 두절됐다. 12시쯤 점심만 먹고 간다는 기별이 왔다. 1시간 후, 취기 오른 목소리로 '딱 한 시간만 더'를 외친 게 마지막으로 더 이상의 연락은 없다. 술이 들어가면 쉽게 자제를 못하는 남편을 알기에 초조한 마음에 여러 번 그의 번호를 눌러보지만 역시나 전화는 연결되지 않는다.
'Let it be~ Let it be~'
평범한 통화 연결음 대신 십 년 넘게 컬러링으로 설정해 둔 비틀스의 'Let it be'가 연신 내 고막을 때린다. 그 인간의 마음 같아서 약이 바짝바짝 오른다.
위치 추적 앱을 열어보았다. 남편의 위치가 옆 시의 축구장 근처 번화가 쪽으로 잡힌다. 12시부터 움직임이 없는 걸 보니 점심 반주가 여태껏 이어지나 보다. 그의 휴대폰 배터리가 12프로밖에 남지 않았다. 곧 전화가 끊길 것 같다. 충전이라도 하라는 카톡을 연신 보내보지만 1은 사라지지 않는다. 심호흡을 하며 마음을 가라앉히려고 노력한다. 관세음보살 관세음보살. 에이씨. 불심으로도 극복이 안된다.
결혼 12년 차. 많게는 한 달에 두세 번, 적게는 두세 달에 한 번. 남편은 술을 마실 때 연락이 되지 않는다. 그나마 위치추적 앱을 깔고 나서는 위치라도 대강 파악이 돼 마음을 어느 정도 내려놓을 수 있었는데 충전하지 않는 습관 때문에 이럴 때는 위치추적앱도 내 마음을 진정시키지 못한다.
"아비 아직 연락 없냐?"
남편은 여전히 묵묵부답. 심지어 전화는 꺼져버렸고 쉰이 넘은 아들을 걱정하는 노모의 연락만 줄기차게 이어진다. 저녁 6시가 넘은 시각. 겨울의 짧은 해가 어둠 속으로 숨었다. 무슨 일이라도 있으면 어떡하지. 길에서 잠들면 어떡하지. 화는 점차 불안한 마음으로 바뀌어 간다.
그로부터 30분쯤 후, 시어머님은 옆 팀에서 축구를 하는 작은 아들에게 연락해 기어코 큰 아들의 행방을 알아내셨다. 00동에서 여태껏 술을 마시고 있단다. 둘째 친구가 그 자리에 있단다. 그 애 시켜서 형 대리 불러 보내랬단다. 곧 들어갈 거다. 네가 고생이 많다. 미안타.
연신 창 밖을 내다본 지 40분쯤 지났을까. 아파트 월패드에 '차량이 도착했습니다' 안내음이 울린다. 하지만 아직 긴장의 끈을 놓을 순 없다. 2년 전쯤인가 대리기사가 우리 동 지하주차장에 자리가 없어 다른 동 지하 주차장에 주차를 해 준 적이 있었다. 그날 남편은 우리 집으로 오는 입구를 찾지 못해 한참을 헤매다 나를 호출했다. 또 작년에는 새벽 한 시반쯤 남편의 차가 입차 한 것을 확인하고 깜박 잠이 들었었다. 그리고 30분 후 퍼뜩 눈을 떴는데 남편이 아직 집에 안 들어온 것을 확인하고 혼비백산하여 울면서 남편을 찾으러 내려간 적도 있었다.(그는 밖에서 이 사람 저 사람에게 전화 중이었다)
나이 어린 자식도 아니고 쉰 줄에 접어든 남편의 귀가를 두고 왜 이리 노심초사냐고 하겠지만 그즈음 만취한 남편이 미워 차에서 자는 걸 내버려 뒀다가 다음날 차에서 심장마비로 죽은 남편을 발견했다는 미망인의 괴담인지 실화인지 모를 이야기를 들은 터라 덜컥 겁이 났었다.
초조하게 월패드의 엘리베이터 호출 버튼을 눌러본다. 지하 2층에서 멈춘 엘리베이터의 위치가 우리 집과 가까워 온다. 23층에 멈췄다. 띠, 띠 띠, 띠이, 띠, 띠아 도어록을 누르는 소리에서부터 술냄새가 진동을 한다. 새벽 6시에 두 발로 씩씩하게 걸어 나간 인간이 14시간 만에 사족보행으로 귀가했다. 마지막 이성을 발휘한 흔적인지 손에는 휴대폰과 지갑을 꼭 쥐고 있다.
"마누라 미안!"
전혀 미안하지 않은 얼굴로 잘못을 비는 남자의 등짝을 후려친다. 으이그 화상아. 30년 전 드라마에서나 들어봤을 구태의연한 대사가 내 입에서 절로 흘러나온다. 찰싹찰싹 내려치는 박자에 맞춰 손 끝에 절로 힘이 실린다. 축구를 하러 갔으면 공이나 찰 것이지 술은 또 왜 마시고 오냐.
남편이 만취하게 된 이유는 수도 없이 많다. 게임에서 이긴 날은 이겨서 한 잔, 진 날은 져서 한 잔, 주는 술을 거절 못해 한잔. 딸이 귀여워서 한 잔, 홀로 되신 어머님이 자식 말을 안 들어서 한 잔, 돌아가신 아버님 생각이 나서 한 잔. 술로 의리와 동맹을 다지는 낭만의 시대가 저물었건만 이 남자의 시곗바늘은 아직도 20대 청춘 그 어느 자락에 멈춰 있다.
남편과 나는 선을 통해 만났다. 결혼은 30이 넘어야 해야 한다는 점쟁이 말을 철석같이 믿던 엄마는 막상 딸 나이 30이 넘자 초조해하셨다. 엄마는 여기저기 소개자리를 알아오셨지만 아버지는 선자리에 나가는 것을 허락하지 않으셨다. 그러던 어느 날 본인만의 확고한 사윗감 기준이 있으셨던 아버지에게서 전화가 왔다.
'누구 하나 만나봐라. 네 번호 줬으니 연락 갈 거다.'
아빠 말씀에 따르면 궁합도 안 본다는 8살 차이. 축구를 할 때도 직진으로만 공을 찬다는(그렇게 성품도 곧을 거라는) 남자. 전교생이 한 반인 분교를 다닌 깡시골 출신이지만 공부를 아주 열심히 한 성실한 남자. 그렇게 남편과 만나게 됐다.
선을 본 후 2~ 3주에 한 번 만나 영화를 보고 밥을 먹었다. 부모님도 선 본 지 4번 만에 결혼하셨다는 히스토리가 있었기에 나 역시 그와 결혼하게 될 거라고 생각했다. 그는 밥을 아주 잘 사줬고, 나는 그때쯤 세상에 특별한 놈 없다, 부모님 말 들어 손해 볼 거 없다, 웬만하면 엄마아빠 뜻대로 해 주자 하고 자기 주도적인 인생에 대해 회의를 느낌 참이었다.
나..ㄹ ㅆ ㅣ 살ㅇㅎ요 곰ㅏㅇ ㅝ요
문자로만 연락을 이어가며 뜨뜻미지근하게 만나고 있었던 어느 날 밤 그에게 두 번의 주재중 전화가 와 있었다. 그리고 곧바로 이어진 카톡. 암호 같은 글자를 해독해 보건대 '사랑해요 고마워요' 뭐 이런 내용인 듯했다. 아니 손도 안 잡은 사이에 무슨 사랑씩이나. 술 먹고 오버하네. 시골 사람이라 감정표현이 서툴러서 그런가 보다 했다. 술 먹은 날마다 전해오는 급발진 문자는 그때부터 시작이었다.
ㅅㄹ행 ㅛ ㅁ ㅣ안 ㅎ ㅇ ㅛ 울 리 겨 ㄹ혼 하 ㅄ다
사랑해요 미안해요 우리 결혼합시다.
아니 뭐 이런 인간이. 잊을만하면 날아오는 알코올 내음 가득한 문자에 난감함을 느끼던 차였다.
우리 식구들은 술이 아주 약하다. 맥주 한 캔을 부모님과 나 셋이 나눠 먹으면 얼굴이 빨개지고 알딸딸해지는 전형적인 알쓰(알코올쓰레기) 집안이다. 어려서부터 한 번도 아버지가 술을 드시고 귀가하신 적이 없다. 오빠와 나도 사회생활을 하며 어쩔 수 없이 술을 마시기도 했지만 술을 즐기지도 않았고 자기 한 몸 가누기 바빠서 주사 부릴 틈도 없었기 때문에 이 남자의 이런 모습이 거북스럽기만 했다.
그래서 나는 남자의 연락을 받지 않았다. 문자도 전화도 무시했다.
‘우리는 안 맞는 거 같아요. 좋은 인연 만나세요.’
작성해 둔 문자를 전송할까 말까 고민하며 일주일이 지났다. 하지만 미안하다며 제발 연락 좀 받아 달라는 남자의 애타는 사과에 마음이 흔들렸던가, 궁합이 괜찮다는 엄마 말에 혹했던가. 그날 나는 결별을 고하는 대신 일주일 만에 그의 연락에 답을 했다.
"마누라가 예뻐서 마셨지!"
등짝을 내려치는 손길을 피하며 실실 웃는 인간이 내민 개소리 같은 변명에 어이가 없어 코웃음이 쳐진다.
그때 그 문자를 전송했으면 이 꼴을 안 봤을 것을.
같은 후회를 12년째 읊조리며 작은방에 따로 깔아 둔 이부자리로 남편을 이끈다. 자꾸 거실로 나와 딸아이에게 말을 걸려는 인간을 방에 가둬두고 숙취해소제를 따서 내민다. 술만 마시면 여기저기 전화하는 버릇을 알기에 휴대폰은 집 문턱을 넘자마자 압수했다. 숙취 해소제 두 캔과 물을 한 사발 마시고도 괴로운지 누웠다 앉았다 쉽게 잠을 못 이루는 남편. 그러게 작작 좀 마시지. 영양가도 없는 잔소리는 덤이다.
저녁 10시쯤. 아이를 재우고 나와봤더니 몇 번이나 화장실을 들락이던 인간의 기척이 잠잠하다. 작은방 문을 열고 남편의 숨소리를 확인한다. 살았나. 손가락으로 그의 등을 쿡 찔러본다. 푸흐. 술냄새 진동하는 거친 숨소리가 어이없게도 반갑다. 그래도 뭐. 오늘도 무사히 왔으니 됐다. 이 인간을 죽여 살려 살기 등등 했던 몇 시간 전의 분노는 온데간데없다. 쉰을 넘기고도 아직 청춘의 끝자락에 머물러 있는 남자가 밉기보다는 살짝 걱정스러운걸 보니 이제야 내 눈에 콩깍지가 씐 것도 같다.
아기처럼 웅크리고 자는 남자의 등에 이불을 툭 덮어준다. 투박한 사랑을 덮어준다. 이게 나의 낭만인가 보다. 그날 밤 받았던 문자들에 대한 답인 듯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