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앗싸! 소확행 재테크와 떠돌이 인생 시작

휴먼테크로 돈이 몰린다 비용은 아끼고 투자 패러다임 변화의 길목을 지켜라

by 손창규


주제 : 학생 시절 공부 할 때는 빨리 취업해서 돈만 벌면 만사 해결 될 줄 알았는데 막상 회사 생활을 하니 희망과 고통이 동시에 시작 된다. 믿을 사람 없듯이 믿을 회사도 없다, 회사가 잘나가도 그게 다 내것이 아니고 월급만 가지고는 살아 갈 수 없는 세상에서 또다른 수입처 재테크에 관심을 갖고 스스로 노력 해야 한다. 70~80년대에는 부동산이 그 역활을 했고 아직 부동산도 끝나지 않았지만 앞으로는 주식이 대세다.

인공지능과 자율 주행 시대에 당신의 미래를 어디에 맡기시겠습니까? 투자의 패러다임이 변한다

회사에 투자하지 말고, 떠오르는좋아하는 제품에 투자하라!

앗싸! 돈도 벌고 취미도 살리고 너무 좋네


저자 : 손 창규, 1961년생

약력 : 서울대 조선공학과 학사 / 고려대학교 경영대학원 석사

기아자동차 상품기획 / 기아자동차 미국 법인

자동차 부품 명화 공업 / 토요타 자동차 본사 컨설턴트

한국 토요타 자동차 / 포드 PAG 재규어, 랜드로버 한국 대표

중국 닛산 마케팅 총괄 / 수입자동차 임원 재직

“ 좋은 자동차 고르기와 좋은 회사 투자하기 “ 블로그 운영중


시작하는글

시골에서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중학교는 무작정 서울로 올라왔다. 당시 대통령 아들이 고등학교를 입학하는 해부터 속칭 뺑뺑이추첨제로 바뀌었고 고등학교별 경쟁입학시험이 없어지면서 이왕이면 서울에서 고등학교를 가겠다는 생각에 새로고등학교에 입학하는 3살 많은 형과 같이 중학교를 서울로 전학을 온 것이다

지금 생각하면 단칸방에서 형과 같이 자취를 하면서 밥도 하고 연탄불도 갈면서 중학교 생활을 하게 되었는데 고생이 많았지만 가장 힘든 것은 형과 같이 남자들끼리 밥하고 자취를 한다는 것이 왜 그리 창피 하였던지...
학교 친구들이 우리 집에 한번 놀러 가보자고 할 때는 가슴이 두근거리고 어찌 할 바를 몰랐다

그래도 시골에서 6시간 이상 걸리는 완행 열차를 타시고 서울역에 도착 하시면 서울역에서 서대문까지 버스비가 아까우셔서 쌀을 손수 짊어지고 배달 해 오신 아버지를 생각하면 가슴이 저려 온다
하늘 나라에서는 편히 쉬고 계실는지...

다행히 오늘도 꿈에서 아버지를 만났다, 먼 외출에서 집으로 돌아오신 모습은 밝으셨다

그렇게 3년을 보내고 고등학교는 지방에는 아직 추첨제가 아니고 시험제가 계속 되고 있어서 지방 명문고를 가겠다는 생각에 다시 시험을 보고 지방 고등학교로 내려 가게 되었는데 나름대로 지방 명문인 D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운이 좋게도 서울공대에 합격했다.

지금이야 합격자 통보를 인터넷으로 직접 즉석에서 확인이 가능하지만, 내가 살던 지역은 전화도 없던 시골이라 직접 합격자 통보를 확인하고자 혼자 서울로 올라올 수밖에 없었다.
서울역에서 버스를 타고 서울대학교가 있는 관악까지 가서 교문 앞에 붙여 놓은 벽보를 보고 합격을 확인할 수 있었는데, 지금도 그 당시 합격자 명단에 내 이름이 있는 것을 보고 느낀 그 기쁨과 놀라움은 내 평생 결코 잊을 수 없다. 고등학교 3학년 때도 혼자 자취하고 하숙을 하면서 불면증과 몸이 쇠약 해져서

시골집에서 한 달 이상 요양하면서도 합격한 것이라 그 기쁨이 더 컸는지도 모른다.

당시는 과학강국을 꿈꾸고 산업화 시대에 기술자를 우대하는 시절이라 동경하던 서울공대의 입학은 더 큰 기쁨이었다. 혼자 나름대로 내가 한번 노벨상을 기대하기도 ......
요즘은 지방의대까지 다 보고 안 되면 서울공대에 간다고 하니 학생들의 의식과 사회 인식이 많이 변화한 것 같다.

힘들게 대학을 합격했으니 대학 와서는 미팅이나 하고 노는 줄 알았다. 물론 실제로 공부를 어지간히 제대로 안 하긴 했다. 미팅할 시간도 돈도 없었고 아르바이트로 생계를 책임 져야 했다
그런데 공학 계열로 입학한 것이라 2학년 올라 가면서 학과 선택이라는 중요한 고비가 있었기 때문에 인기있는 좋은 학과에 가기 위해서는 대학교 1학년 때에는 다들더 열심히 공부해야만 하는 시기였다.
그런데 나는 그것도 모르고 학점을 거의 바닥으로 깔아서 전자공학과를 가겠다는 꿈은 일찌감치 포기하게 되었다. 그래서 본의 아니게 지원자가 없어서 미달인 조선공학과를 전공으로 삼게 되었는데, 그러니 학과에서 공부를 제대로 했겠는가? 당시 공학 계열에서는 거의 바닥으로 과에 대한 열등감도 있었고 KAIST로 대학원이나 간다고 오히려 기계과 수업을 들으면서 전공이 이것도 아니고 저것도 아닌 것으로 대학을 보냈던 것 같다

서울 공대 조선공학과를 나오고 KAIST 기계과 대학원 시험은 도저히 실력이 안 될 것 같아서 포기하고
갑자기취직해서돈이나 벌어야 갰다는 생각이 들어서 병역특례로 조선공사에 입사를 하고자 전형을 마쳤는데
생각지도 않았던 자격 요건인 대학교 졸업하면 거의 합격하는 기사 시험에 떨어지면서 그것마저 물거품이 되어 버렸다 어정쩡하게 어영부영 보낸 대학 생활의 결과였다 어쩔 수 없이 군대를 가야 하는데 다행히 OCS 해군장교 시험에는 합격이 되어서 장교로 군 복무를 마쳤다.


군에서는 해군전력 증강 사업 일환으로 현대 중공업에서 건조중인 군함의 해군 감독관 근무와해군 본부에서 신형 군함 건조 사업 부서에서 근무하게 되었다. 해군 중위 제대후에는 당연히 조선관련 회사에 대리 경력직으로 갈 수 있는 상황이었는데, 촌놈이 서울에서 살겠다고 기아자동차에 신입사원으로 입사지원을 했다.


면접 때 왜 조선공학과를 나와서 자동차 회사에 지원 했느냐는 질문에는 “수륙 양용 자동차를 만들고 싶다“라고 임기응변을 발휘하여 적당히 둘러댔는데, 사실은 서울 아가씨랑 연애도 하면서 서울 사람이 되겠다고 방향을 확 변경한 것이었다.

그런데 오너 없는 회사에서 나중에 사장이라도 한번 해 보겠다는 꿈을 갖고 입사했지만
누가 기아자동차가 망할 줄 알았겠는가? 한때는 보너스도 최고로 많이 주고 직원이 주인이라는
자부심으로 잘 나갔던 대기업이었는데.......

선생님 소개로 운명적인 사랑하는 아내를 만나서 결혼도 하고 자식도 같게 되었지만 회사는 망하고 갈곳은 없고 당장 가족들 끼니까지 걱정하게 되어서 몇달 처가 살이를 하게 되었지만 이것 또한 더 만만하지 않았다

뚜렷한 직장과 수입도 없이 눈치 보면서 온 가족이 신세지고 있었으니 오죽 했으랴 빨리 새로운 직장을 구해야 했지만 당시 IMF때라 쉽지 않은 시절이었다


처음 직장 생활은 상품기획부에서 승용차 개발도 시작하고 최초 미국 시장 진출을 위해 초기 멤버로
기아 아메리카에서 열심히 일 하고 있었는데, 회사도 망하고 나도 잘리면서 몇 달 실업자 생활을 하고 있다가
IMF 이후에 해외 수출을 추진하던 부품회사에서 수출 부장으로 일하기도 했다. 그 후 수입차 시장이 확대되면서 토요타 자동차의 한국 시장 진출, 포드 자동차의 프리미엄, 디비젼의 재규어, 랜드로버의 한국 대표, 창립 멤버로닛산 자동차의 한국 진출과 한국인 최초로 인피니티 중국 마케팅 책임자 역할을 하면서 다양한 자동차 관련 회사 일을 맡는 등 오히려 회사에서 잘리면서 누구보다도 다양한 글로벌 자동차 회사에서 경험을 쌓게 되었다. 지나고 보니 주어진 역경과환경에서 순간순간 현실에 최선을 다하다 보면 그곳에 생각지도 못한 새로운 길이 있는 것이다


이제는 그동안의 노하우와 경험을 일반 사람들과 공유하면서 매일 이용하고 사용하는 제품이 새로운 투자 개념이라는 관점으로 많은 사람들이 인식의 전환을 하는데 조금이나마 일조할 수 있도록 이렇게 나름대로의 생각을 정리해본다.

많이 부족하고 이해가 다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렇지만 끊임없이 변화하고 발전해 나가는 경제 문화 환경에서

다시 한 번 새로운 관점에서 생각해 보고 잘못된 길을 발견하는 가운데 함께 고민하면서 좀 더 나은 삶과 마음의 평화, 경제적으로 조금이라도 이익을 얻을 수 있기를 바라면서 여러분과 같이 그 길을 모색해 보고자 한다.

하루 하루의 싦이 힘드시지만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시고 이 글이 더 재미있고 친근하면서 즐거은 날이 되시기를 기대해 본다


1. 대기업 상품기획부에서 좌충우돌 세월 보내다가 나는 없었다

사회에 첫발을 내 딛는 회사에 들어가는 것은 새로운 세계에 대한 호기심과 낮선 사람들과의 만남과 일을 해야 한다는 두려움이 공존한다. 산업화의 태동기로 기업들이 성장하고 새로 탄생하던 시절이라 지금처럼 취업이 힘들지 않았던 것은 다행이었지만 평생 직장 개념이 강한 때라 순간의 선택이 평생을 좌우 할 수 있어서 신중하게 선택해야 했다. 대학에서의 전공과는 달랐지만 자동차 회사에 가고 싶었다. 길에서 쉽게 만나는 자동차가 달리는 것이 신기 했고 더 많은 사람들에게 도움을 줄 수도 있을 것 같았다. 몇년있다가 그 회사가 망할 줄은 꿈에도 몰랐지만,..

서울공대 조선공학과를 나와서 자동차 회사에 입사하고자 면접을 하니
“ 왜 조선공학과를 나와서 중공업 조선소를 가지 않고 자동차 회사에 입사하고자 하냐?” 는 질문이 나왔다.

사실은 당시 시골 촌놈 어린 생각에 지방에 있으면 장가도 못 갈 것 같아서 서울에 있는 자동차 회사에 입사하고자 했는데, 면접관의 질문에 답은 “바다와 육지를 다 다닐 수 있는 수륙양용차를 만들고 싶어서 왔다”고 했다. 실제 답을 그렇게 하고 나니 내가 생각 해도 잘 한 것 같다

다행히 합격이 되어서 신제품을 개발 기획하는 상품기획부에서 일을 시작했다.

갓 대학 졸업한 놈이 무엇을 알겠는가?

대학 생활은 80년대 초 군부 독재와 민주화 운동으로 휴업이 일상이었고 군대 생활에서는 해군 함정을 설계했으나 그것도 고참이 시키는 대로 줄만 그었으니 자동차는 더욱 몰랐다


그래도 말은 상품기획이 멋있어 보였다 그래서 1지망을 상품기획으로 하고 인사 과장하고도 면접을 잘해서
원하는 상품 기획에 배치될 수 있었다. 대부분 공대 출신들은 연구소나 공장으로 배치되었지만

상품기획으로 가고 싶다는 나의 소신과 애원에 인사과에서 예쁘게 보아준 것 같다.


80년대 후반 현대는 승용차만 기아는 상용차만 생산하게 하는 자동차 합리화 조치가 해제되고 기아자동차도

승용차를 개발 생산할 수 있는 법적 조치가 이루어 지면서 상품기획부에 새로운 제품 개발을 위한 인원 확충과 신입 사원이 필요 했던 것이다. 그렇지만 대부분 상경 계 출신인 기획 부서에서 공대 출신이라는

열등 의식이 있었고 이는 나중에 MBA 과정을 거쳐 마케팅 석사를 획득한 동기 부여가 될 수 있었다

조선공학과를 나와서 면접에서는 그럭저럭 잘 대답해서 서울에 있는 기아자동차에 합격하고 원하는 부서에 배치되었지만 실제 업무는 복사부터 시작했다. 층마다 한 대 씩 있는 복사기 앞에는 항상 입사 동기나 1년 입사 선배 등 신입 사원들이 줄서 있었고 줄을 서 있다 가도 입사 선배가 복사를 하러 나오면

슬쩍 자리도 비켜 주면서 선후배 서열이 확실했고 복사를 하고 나서도 서로 잡담도 하면서 시간을 보내는 나태함도 있었다. 여직원이라도 복사하러 나오면 은근히 더 시간을 보내기도 했다

복사기 옆 흡연실에는 더 많은 직원이 모여서 잡담을 하는데 회사의 많은 고급 정보(?)가 여기서 유출되기도 하고 유언비어도 만들어 지기도 하고,,
복도의 복사기와 흡연실, 이제는 아득한 옛날 이야기이다
지금은 개인 노트북이 공급되면서 각자 복사 보다는 바로 프린트하거나 회의 자료도 파워포인트로 바로 보여주고, 이메일로 자료를 전달하다 보니 하루 일과의 대부분을 복사하는 일에 보내는 것은 생각 하기가 힘들 것이다. 당시 개인 PC가 보급이 안된 시절이라 타이프는 부서별 한 명 정도 있는 여직원 옆에서 눈치 보면서 부탁하고 혹시 오타라도 생기면 화이트로 지우고 다시 타이프를 치곤 했다.

부장이 내일까지 일을 마무리하라 하면 타이핑치는 여직원한테는 저녁밥을 사주면서 야근을 부탁했고

그 와중에 썸을 타서 결혼하는 사례도 있었으니 일은 고달팠지만 낭만도 있었든 것 같다.

퇴근 시간도 따로 정해진 것이 아니라 부장님 퇴근 시간이 내 퇴근 시간이고

퇴근 5분전에 부장님 한마디 하면 그게 바로 부서 야근이고 회식으로 이어진다

일과 업무 후에는 거의 매일 회식에 술 월급은 이미 다 써 버리고 늦은 날은 사우나나 여관에서 같이 술을 기울이면서 밤을 새고 다음날은 출근해서 옷만 의자에 걸쳐 놓고 슬쩍 다시 사우나에 가서 자기도 하고, 그래도 소비는 왕성하고 산업도 고도의 성장기라 취업난은 별로없었지만 하루 하루가 힘들기는 마찬가지였다

청춘은 항상 힘든 가 보다

같이 어울려서 흥청망청, 1,2차는 기본이고 보통 3,4차를 같이 하면서 밤을 새는
그런 시절은 가고 이제는 취업도 힘들고 취업 되면 언제까지 버틸 수 있는지?
인생의 기본 생계인 결혼과 집은 사치가 되어 버렸고 아기를 가지면 양육비와 노후 걱정도 해야 한다
남녀간 애틋한 사랑도 보기 힘들고, 사랑은 즐기지만 아기는 낳지 않고
아기를 너무 많이 낳아 "하나도 많다"라는 구호는 역사 고전이 되어 버렸다

여자도 집에서 살림만 하는 시대는 갔다 같이 벌어도 막막하기만 하다, 금수저 가 아닌 이상
부모만 잘 만나면 되는 것이 아니고 할아버지까지 돈이 있어야 한다

우리 세대는 어릴 때는 배고프고 여유가 없었지만 직장과 사회 생활은 원만 했는데
지금 젊은 세대는 어릴 때 배고픈 사람은 별로 없었지만
현실과 미래까지도 쉽지 않다고 생각 하니 마음이 아프다..

기계 문명은 발달해서 손에 있는 핸드폰으로 모든 것을 해결 할 수 있게 되면서 협동 보다는
개인 주의가 강해 지는 것도 어쩔 수 없는가 보다 혼밥, 혼술 여기에도 적응해야 하고
혼자 아기까지 낳는 시대는 오지 말아야 할 텐데...


상품 기획 말은 거창 했지만 지나고 보니 복사와 상사 눈치, 술과 동료 친구 들과 어영부영 몇 년을 보낸 것 같다. 나 자신의 존재는 없었고 신입 사원의 고달픔과 좌충우돌 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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