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식해서 용감 했던 시절, 그래도 그때가 좋았네
신입 사원으로 크게 하는 일 없이 몇 년을 보냈지만
그래도 상품기획은 회사의 중추적인 역할을 하고 미래를 준비
하면서 기존에 없는 새로운 제품을 기획하고 출시하는 핵심 부서이다
공장이나 다른 부서로 발령 받은 입사 동기를 볼 때에도
은근히 자부심이 있었다
그런데도 당시 주로 하는 일은 외국 회사 자료 복사나 다른 회사 동향 보고서나 만들면서 직원들간에 누가 누구랑 사귄다고 하더라, 누구 임원은 곧 잘린다고 하더라, 누구는 이혼해서 새로운 파트너를 물색한다더라등 카더라 통신에 더 관심이 많았고, 회사 차원에서도 기존 모델을 4년마다 풀모델 체인지 해야 하고 새로운 시장에 투입할 신차는 언제 개발한다는 시기적인 목표는 있었으나 어떻게 개발할 것인가는 없었다
대부분 기술을 해외에 의존하고 특히 일본 마즈다 자동차는 선생님이었다
아무리 하고 싶어도 선생님이 안된다고 하면 방법이 없었고 혼자 할 수 있는 능력이 없었다
가끔 일본 마즈다 한국 담당자가 출장이라도 오면 식당과 술집으로 접대비
예산이나 타내서 예약하는 일이 본업 보다 중요 했다
한편 국내 자동차 시장은 경쟁이 더욱 치열해지고 있었다
자동차 회사가 어렵고 힘들어 지면서 자동차 회사를 전문화하고 보호하기 위해 있었던 80년대 초반 정부의 산업합리화 조치로 현대 자동차는 승용차를 만들고 기아는 승합차와 봉고 트럭을 만드는 법이다
이것이 '86년부터 해제되면서 기아도 승용차를 개발 출시할 수 있었고
현대자동차도 봉고와 같은 1톤 트럭과 승합차를 개발 출시할 수 있으면서
경쟁이 가속화되고 있는 시절이었다, 너 죽고 나만 살아야 한다는 절박한 시기였다
기아의 첫 승용차 모델은 기아는 생산만 하고 일본 마즈다는 개발, 미국 포드는 미국 시장 판매라는
메이플 프로젝트(3잎의 단풍잎 의미)라는 3각 협력 체제로 프라이드라는 승용차를
(미국 수출명은 페스티바) 출시하였지만
기아는 한국을 제외한 해외 시장은 독자적으로 수출할 수 없었고 포드라는 브랜드로 OEM으로만 수출을 할 수 있었던 것이다. 내가 낳은 자식을 다른 사람이 자기 자식이라 하는 격이다
반면에 현대자동차는 포니라는 독자 모델 자동차로 캐나다와 미국을 진출하면서 초기 년 30만대 판매라는 경이적인 기록을 세우면서 선풍적인 인기를 끌고 있던 시기였다
이런 상황에서 기아도 내부적으로 스스로 수출 할 수 있는 독자 모델을 개발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있었고
그 첨단 역할을 상품기획부에서 주관하였지만 기술 로열티로 수익만 챙기고 기아자동차와 해외시장에서 경쟁을 할 수도 있는 일본 마즈다는 기아를 경계했고 기아는 스스로 개발할 수 있는 독자 기술이 없었기 때문에 일본 마즈다가 아닌 다른 해외 기술 제휴 업체를 물색하게 된 것이다, 살아 남기 위해선 이가 아니면 잇몸으로라도 먹어야 되는 것이다
이렇게 일본 마즈다 자동차 이외에 해외로 기술 도입을 다각화하면서
사내 교육도 일본어만 열심히 배우면 되었는데 영어를 새롭게 배우면서 기술도입과 외국어를 동시에 열심히 한 시절이 생각 난다 서강대 야간 영어 프로그램을 등록 하면서.., 이 핑계로 일찍 퇴근 할 수는 있었지만 실력 향상에는 별 도움이 없었던 것 같다. 어디서든 공부는 하기 나름이다
회사도 어떻게 독자 모델을 개발할 것인가?
여러가지 방향을 가지고 고민하다가 드디어 신제품 독자 개발 방향이 섰다
내외관 디자인과 자동차 차체인 샤시 기술을 영국 회사와 제휴를 하고 엔진은 어쩔 수 없이 일본 마즈다 기술을 도입하면서 짜 맞추기 독자 모델 개발 계획을 수립 한 것이다
개인별 PC도 없었던 어려운 시절이었지만, 복사기 만큼은 최고의 복사기를 도입하여 선진 기술의 도면을 쉴 새 없이 복사하고 Copy하면서 신차 개발을 헤나갔다
당시 연구소에 있는 도면 복사기만은 세계 최고가 아니었나 생각한다. 복사하는 양이 많아서 걱정을 하고 그동안 커피라도 한잔 하려고 했는데 빛의 속도(?)로 복사가 되는 것을 보고 놀란 기억이 난다
혼자서 모든 것을 하기에는 기술이 모자랐기 때문에 각 분야의 능력 있고 기술 제휴 의사가 있는 회사 랑
협업을 시도했던 것이다, 당연히 기술 개발비는 지불을 하고,,
이렇게 해서 세피아와 스포티지라는 기아 최초의 독자 모델을 최초로 개발하면서 가장 큰 해외 시장인 미국 시장을 스스로 개척하게 된다. 기술 도입이 다변화 되면서 유럽과 미국을 촌놈이 회사 덕택에 처음으로 비행기도 타보고 출장을 많이 다니는 행운을 누렸는데 출장가서는 인증 사진 찍는다고 카메라 하나 들고 뛰어 다니면서 사진은 많이 찍은 것 같은데 지금 다 어디에 있는지 모르겠다
본인도 상품기획 경험을 살려 90년대 중반 기아자동차의 미국 법인 초창기 멤버로 합류하여 현대 자동차의 성공과 실패를 연구하면서 어떻게 기아의 첫 독자 모델인 승용차 세피아와 SUV 스포티지를 미국 시장에 판매할 것인가를 같이 고민하고 협의하던 시절이 있었는데 그 당시 년 2만대 판매를 처음 년도에 실현하면서 고무적으로 생각 했던 기억이 주마등처럼 지나간다.
아무래도 초창기에는 품질과 기술 문제에 봉착하면서 외국 선진 업체를 찾아 가고 부탁했던 어려움이 많았다.
차가 팔려 나가는 것은 좋았지만 팔리자 마자 차에 경고등이 들어오는 등 품질 문제가 발생해서 한편으론 차가 팔릴 때 마다 불안 하기도 했던 시절이었다
미국 시장에서 젊은이들의 우상이었던 토요타나 혼다 차량을 보면서 현대가 초기에 미국에서 성공할 수 있었던 것은 발음이 혼다랑 비슷했기 때문이라는 우슷게 소리도 들으면서, 우리는 언제 그렇게 될 수 있나 동경하면서도 미국 자동차의 본고장인 디트로이트를 방문하여 딜러망을 구축할 때는 정말로 우리 한국 차가 미국 시장을 진출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지금도 생각하면 엉터리 내 영어 실력으로 어떻게 현지인과 소통하고 버텨 나갔는지 신기 하기만 하다
현대차는 캐나다부터 진출하면서 북미 시장의 특성과 제품을 먼저 확인하고 미국 시장을 진출하였지만,
당시 기아의 미국 시장 진출 전략은 캐나다 보다 먼저 진출하면서 수입차에 대한 반감이 적은 캘리포니아부터 서부, 남부, 동부로 점진적으로 시장 확대를 하면서 마지막으로 진출 한 곳이 빅3의 본거지인 중부 지역인 디트로이트였다. 미국 시장 전체를 동시에 진출하기에는 막대한 초기 비용과 광고비가 투여되고 미국 시장이 지역별, 주별 시장 특성이 차이가 있고 기아의 인지도나 투자 여력을 보았을 때 적절한 전략이었다고 평가하고 싶다
나도 주재원으로 처름 정착한 곳은 캘리포니아 어바인이었고 시카고 뉴저지로 이사하면서 미국 생활을 알 수 있는 계기가 된 것 같다. 가는 곳 마다 도저히 한국 분 보기가 힘들 거라 생각 했는데 시골에서도 만날 수 있었고 대도시에서는 한국 교포들이 많고 TV드라마도 한국에서 방영되면 다음날 바로 비데오로 만들어져서 빌려 볼 수 있어서 불편한 것은 없었지만 영어 실력에는 도움이 안 된 것 같다.
또 하나의 중요한 정책은 가격 포지셔닝과 광고 마케팅 전략이다
일본차가 품질과 인지도면에서 고객 입장에서는 확연히 뛰어났기 때문에 같은 위치에서 직접 경쟁하는 것은 무리다. 동급 일본 소형차 가격이 10,000$은 넘은 수준이었기 때문에 우리는 10,000$ 이하를 타겠으로 하고 성능은 더 앞서기 때문에 광고도 피자를 더 빨리 배달할 수 있고 차를 사고 남는 여유돈으로 럭셔리하게 캠핑도 하고 맛있는 음식을 줄길 수 있다는 켐페인 광고 컨셒이었고 전문가가 평가해서 주는 광고 대상도 받는 보람도 있었다. 예산이 부족하니 아이디어와 창의력 싸움이다. 이것은 개발 할 수록 무한정 창출되는 샘물 같은 자산이기 때문에..
그렇지만 선진시장의 고객 평가는 냉엄 한 것이다
독자 모델 개발을 위한 기술 문제에서 이제는 해외 수출 노하우와 품질이 중요한 문제로 대두되면서 딜러에서는 차팔기가 무섭다는 이야기가 나오고 있었다. 차를 팔자마자 고객이 운전을 하고 나가는 순간 경고등이 들어오면서 또다른 도전과 여정을 시작하게 되지만 '97년부터 한국에서 들려오는 기아 본사의 소식은 암울해지고
거의 부도 상태로 난파하는 배의 신세가 되면서 의욕과 열정도 식어갔지만 밤낮을 같이 고민하면서 미국에서라 도 잘해서 한국 본사에 도움을 주자는 패기가 있었다
그러면서 한국의 자동차 업체, 기아가 미국을 비롯한 세계 시장으로 수출도 확대해 나갔던 것이다
공대 출신이 상품기획을 하다 보니 좀더 큰 시장에서 공부도 하고 싶었고 미국 근무에 대한 동경도 있어서
처음 미국 법인을 원할 때 남몰래 인사과장한테 로비도 하면서 발령을 받았지만
막상 주재원 발령을 받으니 겁도 났다. 영어 실력이 모자라는 것은 말할 것도 없고
영화를 보면 미국은 도로에서 자동차가 질주하고 폭력과 총기가 난무하는 것이
일상인 것으로 보여 혹시 잘못되지나 않을까 겁이 난 것이다
그런데 막상 5년정도 주재원으로 미국 생활을 해보니 그야말로 미국은 축복받은
나라이다 동네마다 공원과 수영장을 일상으로 이용하고 넓은 집에 정원까지 있고, 먹는 것은 한국 보다 저렴해서 직장만 안정되면 정말 복 받은 나라이었다
영등포 양재동 공장지대에서 신혼 생활을 하면서 밤에도 대장간 소리에
잠도 제대로 자지 못했던 시절과 비교하니 엄청난 호화 생활이다
미국 시민권자 하나 만들어 보자고 열심히(?) 노력해서 둘째 애도 갖게 되었다
물론 미국 로스엔젤스의 밤 생활과 도심지에서의 외출은 위험하기도 했지만..
한국 조국은 IMF를 겪는 어려운 시기에도 해외 시장 개척에 몰두했고
덩달아 선진 나라에서 분에 넘치는 생활도 할 수 있었다, 회사가 인수 되면서 곧 닥칠 개인의 위험은 모른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