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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찬하 Mar 11. 2016

찢긴 현수막

서강대 성 소수자 동아리 대자보 훼손 사건

 "이 세상에 환영할 사람이 많은데 왜 그 사람만 환영하냐"라고 성 소수자 동아리  현수막을 찢은 교수가 말했다. 이어진 말은 "내가 사과할 일이 없다. 공개서한에 답변할 이유도 없다"였다. 현수막을 철거한 이유는 그 나름대로 정당하다고 한다. 기본적으로 현수막을 붙이려면 학생 문화처의 허가를 받게 돼 있는데, 그날도 가는 길목에 현수막이 무단으로 게시돼 있어 사진도 찍은 다음 지저분한 것을 뗐다는 것이 그의 설명이었다. 

 여기서 그의 말이 과연 정당한가에 대해 한 번쯤 생각해 볼 수 있다. 사실, 그가 말한 것이 전부라면, 그 행위가 정당하다고 볼 수도 있겠다. 어디까지나 그는 절차상의 적합함을 주장한 것이니까. 그런데 그 적합함 뒤에 숨어있던 의도가 무엇인가는 완전히 다른 이야기이다. 이건 기본적으로 타인에 적용되는 정당함의 기준에 대한 문제다. 

 세상에서 벌어지는 일 중 가장 참혹한 일들은 대개 '정당함'에 근거해 이루어진다. 이 때 정당함은 모두 납득시킬 수 있는 공명정대한 근거가 아니다. 강자 혹은 다수는 눈엣가시 같은 약자와 소수를 혐오하기 위해 정당함을 만들어낸다. 자신과 비슷한 부류가 하면 관용 혹은 아량으로 넘어갈 수 있는 일이 다른 누군가가 하면 절차와 과정의 문제가 따라붙고, 끝내 그 집단은 애초에 틀려먹은 것으로 간주된다. 지금 성 소수자 동아리가 학생 문화처 허가도 받지 않고 현수막을 내건, 환영받지 못할 사람들이 된 것처럼. 누군가에 대한 혐오로 이어지는 정당함은 대개, 권력, 부, 나이, 위계를 등에 업은 자가 대외적으로 선전하는 껍데기일 뿐이다. 

 역사상 가장 끔찍했던 일들은 대개 맹목적인 당위성을 이유로 일어났다. 성전을 표방한 십자군 원정이 과연 성지 예루살렘을 탈환해 신의 뜻을 따르고자 한 순수한 의도에서 일어났는가. 아니면 그 과정이나 결과가 신이 흡족해 할 만한 것이었는가. 신의 뜻을 따르는 군대는 200년 동안 무자비한 살육을 반복했을 뿐이다. 나치도 표면적으로는 게르만 족 지배의 정당성을 이유로 일어났다. 대다수가 의심 없이 그 정당함을 믿고 나치에 따랐으며,  600만명의 유대인은 그 정당함 아래 학살당했다. 이 모든 일들은 그들히 단순히 싸이코패스나 소시오패스 같은 악인이어서 일어난 게 아니다. 정당함은 꽤나 자주 누군가의 어긋남을 도금하는데 쓰인다. 

  정당함을 위시하는 자들이 항상 간과하는 것이 있다. 그들이 혐오하는 자들이  막상 그들과 다르지 않은 평범한 사람이라는 사실 말이다. 오히려 타인의 정상성을 의심하는 그들이 대개 본인의 정상성에 흡집이 나있기 마련이다. 알량한 금박지에 가려져 그 흠집이 쉽게 드러나지는 않겠지만. 사실은 사실이다. 자신과 다른 것을 비정상으로 간주하고 다른 근거를 끌어오는 이들은 보이는 것과 상관 없이 추악하다. 정당함은 만인에게 적용되는 보편적이고 타당한 것일 때, 그리고 그 뒤에 가려진 것이 없을 때만 유효하다. 

 10일까지 사과를 요구했음에도 답이 없자, 학생들은 결국 교수를 경찰서에 고소했다. 학교측은 교수가 11일 오후 세미나가 끝나고 사과하겠다고 밝히면서 사건은 일단락 됐다. 이런 일이 일어날 때마다 정당함의 기준에 대해서 다시 생각해보게 된다. 그때마다 '나와 너가 다르다'가 나는 옳고 너는 그렇지 않다는 말로 옮겨갈 수는 없다는 생각만 반복될 뿐이다. 평범함을 평범함으로 인정하면서 사는 것이, 그렇게 쉽지는 않은가 않은가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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