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수라> 후기
<아수라>는 한국에서 두번째로 잘 만든 느와르 영화임에 틀림없다. 물론 첫번째는 이 영화를 제외한 나머지 전부이다. 출연진 명단만 봐도 충분히 기대되는 영화였다. 그러나 아수라는 딱 진수성찬이 부실한 상다리를 견디다 못해 엎어져버린 꼴이다. 온갖 것들이 뒤죽박죽이 되어버려 맛은 고사하고 형체조차 알아볼 수 없다. 등장인물은 하나같이 분노만을 발산하고 결국에는 그 분을 이기다 못해 서로 엉겨붙는다. 그리고 모두가 녹아내린다. 영화의 완성도도 이와 다를 바 없다. 도무지 이 이야기가 뭘 말하고자 하는지 알 수가 없다. 외국인 노동자, 부패 경찰, 검찰의 강압 수사, 마약 등 온갖 부조리함들은 다 끌고오면서 지옥문을 열어두는 데는 성공했으나 그 문을 닫지 못한 채로 이야기가 끝난다.
애초에 영화의 목적이 아비규환의 모습을 묘사하는게 다 였다면 변명은 된다. 그러나 이렇게 간단히 생각하기에 아수라는 뭔가 의미있는 결말로 귀결될 것처럼 스토리를 전개했다. 원래 이렇게 끝날 이야기가 아니었다. 한도경(정우성)은 안남 시장 박성배(황정민)와 공생하는 부패 경찰이다. 그가 시키는 나쁜 짓들은 모두 수행한다. 그러던 중 한도경을 박성배를 수사하는 김차인 검사(곽도원)에게 덜미를 잡힌다. 한도경은 내부자가 될 것을 종용받고 갈등을 거듭한다. 한편 자신이 박성배의 수행원으로 추천했던 경찰 후배 문선모(주지훈)은 박성배 아래에서 살인을 자행하며 미쳐간다. 어찌 됐든 한도경은 그 생지옥에서 선택을 내리고 무사히 빠져나와야 한다. 듣기만 해도 그의 선택이 어떤 결과를 불러올지 궁금해지지 않는가.
놀랍게도 이 이야기는 망했다. 기둥 몇 개를 뺀 채 날림공사를 진행하니 천장이 그대로 허물어져 바닥까지 무너진다. 한도경은 고민하는게 아니라 자신이 왜 이런 처지가 됐는지 분노하고 욕설만 반복한다. 심지어 욕도 어색하다. 박성배와 김차인 중 어느 편에 설지를 선택하는게 아니라 선택지를 안고 자폭한다. 그 결과로 보여지는게 장례식장에서 벌어지는 아수라장이다. 최선은 바라지도 않는다. 어디에도 한도경이 차악의 선택을 내린 흔적은 없다. 그가 보여주는 건 이리 끌려가 맞고 저리 끌려가 맞으면서 악에 받혀 양 쪽 모두를 들이받는 장면 뿐이다. 한도경은 이 이야기에서 분노 조절 장애자 쯤으로 소모될 뿐이다.
말이 나온 김에 더 짚고 넘어가보자. <아수라>는 훨씬 더 유용하게 써먹을 수 있는 한도경과 문선모라는 인물을 다른 인물과 함께 믹서기에 넣고 갈아버렸다. 입체적으로 쓰여야만 하는 인물을 평면에 뭉개버린 것이다. 개인적으로 결말의 황폐함과 공허함을 도저히 납득할 수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비슷한 상황에서 전혀 다른 방식으로 이야기를 풀어낸 영화를 살펴보자.
<신세계(2012)>는 대립하는 두 집단 속에서 끊임없이 갈등하는 '이자성'이라는 인물을 그리 간단히 소모하지 않는다. 오히려 신세계에서 이자성은 극의 흐름을 주도하는 인물이며 그가 갈등 끝에 내린 결정은 누구나 납득할 만 하다. 인물에게 입체감을 부여한다는 것은 곧 판단에 근거를 쥐어준다는 것과 같다. 그는 자신의 약점을 쥐고 협박하는 '강 과장'과 수 년간 의리를 지켜온 '정청' 사이에서 갈등한다. 그러던 그가 어느 한 쪽을 선택하게 된 이유는 자명하다. 환멸감을 느꼈기 때문이다. 범죄를 소탕하겠다는 명목으로 스스로 악을 자행하는 경찰을 보며 이자성은 차라리 자신이 속해 있는 세계에 물들어버리기로 작정한다. 적어도 그는 에라 모르겠다는 심정으로 양쪽에 맞불을 놓고 자신도 타죽는 선택을 하지 않는다. 그래서 <신세계>의 끈적함은 <아수라>의 찝찝함과는 확연히 다른 것이다.
<아수라>에서 온통 휘감는 그 찝찝함에 대해 이야기를 더 하자면, 분명히 '과정을 보여주고 싶었다'와 '결말을 내리지 못했다'는 엄연히 다른 이야기이다. 물론 가장 이상적인 상황은 '과정을 보여주면서 명확한 결말을 내리는 것'일테지만 여튼 과정에 집중해야 한다면 그렇다. 감독의 비전이 뭐였는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아수라>는 전자라고 하기에는 결말의 부재로 인해 놓쳐버린 것들이 너무나도 많다. 그리고 무엇보다 이 영화는 결말을 희생해가면서까지 과정에 집착할 이유가 없다. 선이라고는 없는 악인들의 대결 사이에서 벌어지는 비현실적인 일들을 더 묘사해 누가 덜 혹은 더 나쁜 놈이라고 외쳐본들 달라지는 게 있는가. 차라리 그 시간을 어떠한 결론에 도달하게 되는 이음새에 투자했으면 더 낫지 않았을까. 그래서 나는 이 영화가 등장인물들의 에너지를 담아내지 못한 채 터져버린 거라는 결론을 내릴 수 밖에 없다.
나는 개인적으로 현실에서 <아수라>와 같이 참혹함의 끝을 묘사하는 영화는 최소한 인물들이 그 생지옥에서 보여주는 생존방식을 관객에게 남겨야 한다고 생각한다. 현실감 없는 이야기가 아니라 실제 사회 안에서 미덕이나 공존보다는 부조리함과 혈투를 더 자주 볼 수 밖에 없기 때문에 더욱 그렇다. 어쩌면 우리가 좀 더 유심히 들여다봐야 할 것은 선한 사마리아인들의 미담이 아니라 악귀처럼 세상에 엉겨붙는 이들의 묵시록일지도 모른다. 요컨대 '살 만한 세상'이라는 건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 아니라 최소한의 것들이 지켜지는 사회 아래서 시작될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지옥도를 보며 그 최소한의 것들을 가려낼 수 있다. 그래서 이런 아수라를 그려내는 영화는 몸서리 처질 정도의 암울함을 관객에게 선사하고 그 상황에 대해 일정한 입장이나 자세를 가지게 만들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아수라>는 그럴 수 있었으나 실패한 영화이기 에 더 아쉽다. <아수라>는 말 그대로 아수라장일 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