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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꿀잠 Mar 06. 2019

ㅌㅅ후 제주도의 한 달#13

15일 차 - 반환점.

일어나자마자 미세먼지부터 확인하는 것이 일상이 된 요즘.

 자그맣게 들리는 빗소리에 비몽사몽 확인한 미세먼지는 무슨 일인지 노랑도 아닌 파랑이었다. 한 밤 사이에 "최악"에서 "좋음"으로 바뀐 것이다. 아직 비가 물러가지 않은 흐린 하늘이었지만, 주저 없이 창문을 열어젖혔다. 쌀쌀한 바람에 잠이 확 깨면서 느껴지는 상쾌한 공기에 기분이 좋아졌다.

 

오랜만에 보는 선명한 수평선과 푸른 하늘. 구름이 하늘과 구분되서 보이는 것조차 감사하다.

 이 푸른 하늘을 육지의 친구들에게 자랑했는데, 싸늘한 욕설만이 날아왔다. 1주일쯤 지속되는 미세먼지에 인간성마저 상실한 것인가...라고 생각을 했다가 3일 지속된 제주도 미세먼지에 나도 우울했었으니 그럴 만도 하다 싶었다. 

 거짓말같이 이렇게 자랑하고 있는데 그새 미세먼지 '최악' 경보가 울렸다.


오늘은 그간 제주도에서 즐긴 문화생활에 대해 곱씹어 본다




* 영화 - 스포 없이 주관적 감상을 씁니다만, 본의 아닌 스포가 될 수 있습니다.


 1) 사바하


 3일인가 4일 전쯤, 삼화지구에서 본 제주도 첫 번째 혼영이다. 사실 그리 당기지 않았지만 영 볼 게 없는 요즘인지라 울며 겨자 먹기로 선택했다. 영화회사에서 일하기 시작하면서부터는 이상하게도 상업영화가 아닌 독립 예술영화를 보고 싶었지만 상영관을 찾기는 하늘에 별따기다.


 다행히 '사바하'는 생각보다 볼 만한 영화였다. 단순한 오락성 오컬트 영화가 아닌, 볼 수록 심오한 메시지를 반복적으로 던지고 있었다. (몇 장면은 무서워서 자체 스킵했다.) 감독의 전작인 '검은 사제들'을 보지는 않았지만 어떤 리뷰를 보니 장르만 비슷할 뿐 메시지나 연출 방식은 상당히 다른 면이 있다고 한다. '사바하'를 보면 감독이 각종 종교들에 대해서 얼마나 심오하게 공부를 하고 제작했는지 얕게나마 짐작할 수 있다. 동방 밀교, 불교, 기독교 등 온갖 종교들을 망라하고 있다. 영화는 어떤 종교를 등에 업은 악, 그 악을 없애기 위한 천적, 그 악과 천적을 잘못 믿고, 그 잘못을 해결하려는 목사 등의 빠른 엎치락 뒤치락으로 전개된다. 어려운 종교적 내용에도 친절한 서사와 후반부 반전이 영화의 상업적 오락성을 꽤 괜찮게 보장해주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화의 궁극적인 메시지는 이정재의 반복적인 대사로 드러난다. ‘정말 신이 존재하는지 모르겠다 존재한다면 어떻게 우리 인간들의 힘든 삶을 그냥 보고만 있는지 모르겠다'는 영화 중반부 지인의 이야기와 신을 찾는 마지막 장면의 대사에서 볼 수 있듯, 단순히 신의 존재 여부를 떠나 선과 악의 구분까지 논하고 있다.


 너무나 심오하고 여러 해석이 가능한 상징들로 인해 인터넷에도 다양한 해석이 오가고 있다. 각 해석들이 다 일리가 있지만, 나는 왠지 또 다른 주인공인 박정민이 반복적으로 엄마로 보이는 존재의 따뜻한 무릎을 찾고, 마지막에 '춥다'라고 하는 것으로 보아, 어쩌면 종교라는 것은 인간 사이에서 온정을 찾지 못해 따르게 되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2) 스파이더맨: 뉴 유니버스


 작년에 개봉한 뒤 선풍적인 인기는 못 끌었지만, 관람객 사이에서의 꾸준한 입소문으로 올 초까지도 장기 극장 상영한 애니메이션이다. 나도 지인의 추천으로 꼭 보고 싶었지만 결국 극장에서는 기회를 놓쳤고 어젯밤에 IPTV로 구매했다.


 먼저 말하자면 기대치가 너무 높았던 탓인지 기대만큼 즐기지는 못했다. 그 연출과 영상미, 음악의 앙상블에 비해 스토리가 상당히 가벼운 느낌이었다. 다중 우주라는 광활한 개념을 사용했음에도 결국 영화는 여느 히어로 물이 채택하듯, 영웅의 탄생, 고난, 각성을 아주 무난하게 이어가고 있다. 그럼에도 이 영화는 미국 애니메이션 계에서 매우 혁신적인 위치를 차지함은 분명하다. 애니메이션 영상미의 대가로 불리던 일본과는 완전히 다른 형식으로 입이 떡 벌어질 만한 영상미를 보여준다. 중간중간 만화에서 대사가 들어가는 것과 같은 연출과 감각적인 음악에 맞춰 진행되는 액션씬은 그야말로 스토리와는 아무 상관도 없이 관객을 몰입하게 한다. 특히 후반부에 주인공이 각성하는 부분의 장면과 음악은 압권이니 꼭 한번 보길 바란다.


 이 영화는 모두가 잘 아는 피터 파커의 이야기에서 이어지는데, 추후 이 영화의 후속이 나올지, 나오더라도 현재 어벤저스에 나오는 스파이더 맨과 어떻게 이어질지는 미지수다. 이미 이 영화만으로 봤을 때는 뉴 유니버스인 만큼 독자적인 스파이더 노선을 타야 하지 않을까 싶은데.. 두 방향 다 가능성이 있는 이야기라 후속작을 간절히 기다려 봐야겠다.




* 책 - 역시 본의 아닌 스포가 될 수 있겠네요.


 1) 파도가 바다의 일이라면 - 김연수


 다분히 연애소설 같은 제목, 감성적인 표지로 구매를 결정한 장편소설이다.

 '파도가 바다의 일이라면, 너를 기억하는 것은 나의 일이었다.' 라는데, 연애소설이 아닐 거라고 누가 짐작이나 했겠는가. 하지만 여기서 너는 딸이고 나는 엄마였다. 거기서 이미 충격을 받아버렸다.


 소설은 아기 때 미국으로 입양된 한국인 딸이, 양어머니가 돌아가시면서 남긴 친어머니에 대한 단서를 가지고 한국으로 오면서 시작된다. 단순히 친어머니에 대한 궁금증으로 방문했으나, 친어머니에 대해 하나씩 알아가면서 주인공 딸은 얼굴도 기억나지 않는 친어머니가 겪은 아픔들을 알게 된다. 그리고 그 아픔들의 진실을 알아가면서, 지금의 자신보다 훨씬 어린 나이에 그 많은 어려운 선택들을 해야 했던 친어머니의 심연에 다가간다.

  

 사람은 결국 자신이 아는 것만이 온전히 느낄 수 있다고 했다.

그런 의미에서 나는 이 소설이 이끌어가는 이야기에 대해, 그 안에서 주인공들이 느끼는 감정에 대해 절반도 느끼지 못했을 것이다. 비록 친어머니지만 사람이 타인의 심연에 다가가고 그 깊이를 온전히 감당하는 것은 지금의 나로서는 상상도 못 할 일이다. 나 스스로의 심연조차 제대로 바라보기 무섭고 부끄러운데 말이다. 그런 무게 때문인지 이 책은 제주도에서 비가 왔던 4일에 걸쳐, 비가 오는 날만 골라 드문드문 읽어 나갔다. 비가 오는 날에 매우 잘 어울리는 만큼 날이 좋을 때는 집어 들기 어려웠다.



 2) 쇼코의 미소 - 최은영


 이 책은 어떤 문학평론에서 처음 접했다. 미소라는 단어에서 드러나 듯 책은 온몸으로 순하고 맑은 힘을 뽐내고 있었다.

 "이 책 전체를 통해 가장 두드러져 보이는 것은 서사를 감싸고 있는 순하고 맑은 힘이다. 비유하자면 그 힘은 추운 겨울에 따뜻한 실내로 들어갔을 때 갑작스럽게 몰려오는 온기와도 같다." - 문학평론가 서영채


 이 소설은 총 7개의 중, 단편 소설들로 이뤄져 있다. 각 소설들은 매우 다양한 인간관계와 다양한 사회적 배경을 다루고 있지만, 다 읽고 나면 매우 비슷한 형태의 감정이 남는다. '공감'과 '위로'. 이 책만의 이야기인지, 요즘 한국문학의 전체적인 분위기인지, 모든 이야기들이 상처 받은 개인에 대한 개인의 무게, 역할, 위안 등을 이야기하고 있다. 개인이 사회적으로 얼마나 많은 상처를 받는지, 그 많은 상처들이 한 개인만으로도 얼마나 많이 치유가 되는지. 사회에서 살아가기 위해 그렇게 많은 일들을 하고, 많은 사람들을 만나면서도 한 개인으로 인해 그 무엇보다 강인해질 수도, 한 없이 나약해질 수도 있는 모순.


 한번 집중하면 끝날 때까지 긴 호흡으로 즐길 수 있는 장편소설에 비해 소설집이 가지는 가장 큰 매력은, 그 여러 이야기 중에 나와 꼭 맞는 이야기를 만날 확률이 높다는 것이다. 마치 솔로 가수보다는 그룹이 팬이 많듯이.

 이야기의 매력도를 떠나, 이 책에서 내가 가장 오래 머문 글귀 하나를 소개하겠다.


 "시간이 지나고 하나의 관계가 끝날 때마다 나는 누가 떠나는 쪽이고 누가 남겨지는 쪽인지 생각했다. 어떤 경우 나는 떠났고, 어떤 경우 남겨졌지만 정말 소중한 관계가 부서졌을 때는 누가 떠나고 누가 남겨지는 쪽인지 알 수 없었다. 양쪽 모두 떠난 경우도 있었고, 양쪽 모두 남겨지는 경우도 있었으며, 떠남과 남겨짐의 경계가 불분명한 경우도 많았다."

 - 쇼코의 미소 中 씬짜오, 신짜오 - 

 

 솔직히 말해 책에 몰두하여 읽는 것이 아직은 조금 낯설다. 책에 대한 감상에 내 이야기를 넣을 수 없는 것도 그 때문일 것이다. 고등학교 때는 도서관에서 몇 시간씩 책을 읽는 것이 마냥 좋았는데, 어쩌다가 이젠 이 먼 제주도까지 와서도 1시간이라도 아무하고도 연락을 안 하면 조바심을 느끼게 되었을까. 아직도 제주도에서 해나가야 할 것이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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