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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꿀잠 Mar 10. 2019

ㅌㅅ후 제주도의 한 달 #15

19일 차 - 겨우 찾은 아지트

 일기예보는 정확하다. 

잠들 때까지도 내리던 비는 아침까지도 시원하게 내리고 있었다. 문득 어젯밤이 제주 들불축제의 클라이맥스인 새별오름 불 놓기 행사가 있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제 지나가면서 문득 봤을 때는 엄청 크게 준비해 놨던데, 갑자기 내린 비 때문에 잘 마무리됐는지 궁금했다. 

 마치 서울의 자취방처럼, 허기가 져 냉장고와 선반을 뒤졌다. 첫날 가득 구비해 둔 라면이 아직 남았지만 아침부터 라면으로 시작하기 싫어 저번 주에 사둔 파스타면을 찾았다. 사실 영양적으로는 파스타나 라면이나 뭐 크게 다르겠냐만, 조금이라도 더 음식 같은 기분이 드는 파스타를 먹기로 했다. 그렇게 간단한 알리오 올리오라지만 제주도에 와서 생전 처음 시도해봤다. 오늘이 두 번째, 처음 시도는 보기 좋게 말아먹었다. 올리브유를 분명 듬뿍 넣으라 그랬는데 도대체 소금 말고는 무엇으로 간을 하는 건지 알 수가 없다. 오늘은 그래도 처음보단 나아야지 하는 마음에 레시피를 좀 더 열심히 찾아봤는데, 알리오 올리오는 생각보다 이 집 저 집에서 다양한 형태로 조리되고 있었다. 나도 그래서 내 마음대로 하자는 마음으로 냉장고에 조금씩 남아있는 재료들을 이것저것 볶고, 면을 넣고, 다시 올리브유를 더 넣고 하여 만들어냈다. 나름 만족스러운 아침이었지만 당분간 알리오 올리오는 나 혼자 먹어야겠다.

 



 걷기도 힘들던 다리가 조금씩 풀려왔다.

풀리는 다리가 반가운 것도 잠시, 아직 10일이나 남았음에도 벌써 제주도 생활이 거의 끝났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젠 조금씩 이 환상에서 벗어나서 다시 돌아갈 준비를 해야 한다고, 누구도 그런 말을 하진 않았지만 마치 월요일을 앞둔 일요일 오후의 직장인 같은 느낌이었다. 시간이 줄어갈수록 더욱 열심히 보내야 할 시간에 상념에 젖어 더욱 우울해지는 건 내 안 좋은 습관 중에 하나였다. 한번 생각을 시작하니 처음으로 그런 생각도 들었다.

 제주도 한 달 살이는 오만이었나? 그냥 한 순간의 어린애의 투정 같은 거였을까?

내가 이 한 달 살이로 무엇을 얻고 무엇을 잃을지 짐작도 가지 않는 것이 초반에는 가늠할 수 없는 희망이었는데, 이제는 깊이를 알 수 없는 불안감으로 다가왔다. 이렇게 한 없이 우울함에 잠길 것 같아 밖으로 나왔다. 어제저녁에 우리 집 호스트 분께 집 근처의 숨은 카페에 대한 정보를 얻었다.


  겨우 600m 거리에 있는 이 카페를 못 찾고 맨날 함덕으로 갔다니 어이가 없었지만, 지금이라도 알아낸 게 어딘가. 이름부터 확 당기는 '바람벽에 흰 당나귀' 카페다.

간판도 없고 쾌적한 것이 아지트 삼기 딱 좋은 '바람벽에 흰 당나귀'

 비바람 치는 날씨 때문에 약간 휑해 보이는 건 기분 탓이다.

사진과 같이 주차장도, 카페 내부도 매우 넓고 쾌적하지만 간판이 없다. 내부 어디에도 카페 이름을 밝히고 있지 않아 '바람벽에 흰 당나귀'도 누가 붙인 이름인지 알 수 없다. 말차 빙수가 시그니처라는데 혼자 와서 그 큰 빙수를 시키긴 좀 그래서 카페 비엔나 한 잔을 시키고 앉았다. 주말이라 그런지 오늘은 손님이 많아서 혼자 테이블 하나 차지하고 있기가 눈치 보여서 예정보다 조금 일찍 나섰다. 아침 9시부터 문을 여는 부지런한 카페라고 하니 내일부터는 아침에 방문해봐야겠다.


 저번 주부터는 여자 친구의 권유로 코딩 공부를 시작했다. 물론 이 또한 너무 이것저것 잡다하게 하는 느낌이 없잖아 있지만, 나름 재미도 있고 아무것도 안 하는 것보다야 훨씬 낫다는 생각이다. 배우는 언어는 Python과 Ruby. 이렇게 인터넷으로 혼자 두들긴다고 프로그램을 뚝딱 만들 수야 없겠지만 그래도 어디 가서 그게 뭔지는 안다! 정도라도 익혀둘 생각이다. 카페에서 혼자 글을 쓰고, 책을 읽고, 코딩을 하다 보면 4~5시간이 순식간에 지나간다. 아니 순식간은 좀 거짓말이지만 지루하지 않게 지나간다. 다만 약간 입이 심심한 것은 있어서, 좀 자주 오면 일하시는 분들이랑 간단한 대화 정도는 할 수 있지 않을까. 내일 평일이 돼서 사람이 좀 줄어들면 꽤 여유 있게 카페에 죽치고 있을 수 있겠지. 약간 제주도 살이를 마무리하기에 꽤나 적합한 장소다.


 오늘은 이렇게, 아니 아마도 또 다른 동료들이 방문하는 금요일까지는 이렇게 지내지 않을까 싶다. 큰 이동 없이 집-카페-마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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