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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꿀잠 Mar 11. 2019

ㅌㅅ후 제주도의 한 달#16

20일 차 - 어느 제주도민의 일상

회사를 다니던 시절 나의 아침은 항상 SBS 모닝 와이드와 함께 했다. 

 아마도 6시 30분?부터 시작하는 이 아침 뉴스는 무려 3부까지 있다. 나는 매일 7시 20분에 일어나 일단 이 뉴스를 켜고, 방을 나가는 8시까지 이것저것 준비하면서 힐끗힐끗 봤더랬다. 이게 중독성이 엄청난 것이, 내가 그나마 많이 주워 보는 3부는 월~금까지 매일 코너가 달라서 매일매일 내 발걸음을 잡았다. (토, 일은 그 시간에 일어나질 않으니 토, 일요일도 하는지는 모르겠다.)

 보통 7시 50분쯤 대충 준비를 마치고 TV 앞에서 멍 때리다가 57~58분경에 신발을 신으러 갔는데, 이쯤이면 제일 재밌는 코너가 하고 있을 때라 회사 다니던 시절의 내 소원은 모닝와이드를 끝까지 보는 것이었다. 물론 이 소원은 퇴사하고 바로 다음 날 성취했다. 약간 학창 시절에 시험기간에는 신문 보는 것조차 재밌던 그런 느낌이었다. 퇴사하고 보니 어찌나 지루하던지.

 그러나 그것은 아직도 묘한 습관이 되어 큰 무리 없이 잠든 날이면 딱 7시 30분쯤 날 깨워서 멍 때리고 쳐다보게 한다. 제주도도 서울도 SBS는 5번이고 잠에서 깨면 무의식적으로 005번을 누르고 있다. 오늘도 그렇게 모닝와이드로 상쾌한 월요일을 시작했다. 


 원래 일어나면 배가 고파서 아침을 먹게 하려고 그간 저녁을 비교적 일찍 먹었는데, 오늘은 어쩐지 배가 고프지 않았다. 그러다 문득 꽤 전에 다운로드하여둔 '어느 가족'이 생각나서 노트북만 침대로 가져와 다시 누웠다. 작년 5월, 난 회사 출장이라는 이름으로 생전 처음 유럽을 방문했다. 그것도 듣기만 해도 낭만적인 '깐느'였다. 운 좋게도 입사 3개월 만에 칸 국제영화제에 출장을 가는 행운을 누렸다. 지금 생각하면 나 같은 애 보낸다고 그 출장비를 써 준 회사에 감사하다. 물론 안타깝게도 공식 부문에 진출한 우리 회사의 영화는 없었지만, '공작'이 미드나잇 스크리닝에, '버닝'이 경쟁부문에 진출해서 우리나라에서도 꽤나 화제가 된 71회 칸 국제영화제였다. 나는 당시 운 좋게도 '공작'의 미드나잇 스크리닝에 참석했는데, 보타이와 구두를 안 챙겨가서 쓸데없는 지출에 눈물을 흘린 기억이 있다. (칸 국제영화제의 공식 상영회에는 남녀노소 모두 정장을 착용해야 한다. 그리고 여기서는 딱 규칙인진 모르겠지만 넥타이가 아닌 보타이를 착용한다.) 그리고 길고 길었던 약 2주간의 출장이 끝날 때쯤 '어느 가족'이 이번 영화제에서 최고상인 황금종려상을 수상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당시 영화제에서 제목은 '만비키 가조쿠', 즉 좀도둑 가족이었다.)

 많은 사람들이 알겠지만 '어느 가족'은 국내에서도 꽤 팬덤이 두터운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의 작품이다. 이 분 작품을 하나도 본 건 없지만 워낙 명성은 여기저기서 많이 들어와서, 아 이런 감독은 그냥 툭 만들면 칸이든 어디든 인정을 받는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돌아와서 IPTV에 풀리기를 그렇게나 기다렸는데, 한 달 전쯤에나 풀렸던 것으로 안다. 

 일본 영화는 내가 그런 것들만 봐서 그런 걸 수도 있지만, 대체로 '나는 오늘 어제의 너와 만난다' 식의 영화와 '조제 호랑이 그리고 물고기들' 같은 영화로 나뉘는 것 같다. 순수함과 잔잔함의 갈래랄까. '어느 가족'은 후자에 가까우면서도 후반부에 나는 반전 같은데 남들이 볼 땐 반전이 아니었겠다 싶은 묘한 장치들을 많이 설치해 두었다. 이 영화의 개인적, 가족적, 사회적 의미에 대해서는 수많은 훌륭한 분들이 자세히 분석해 두었을 테니 이 영화의 메시지에 대해선 따로 적지 않겠다.

 단지 개인적인 감상으로는 아들내미인 쇼타가 말한 '스위미'가 참 부럽다는 생각이 들었다. '스위미'란 조그만 물고기들이 참치 같은 큰 물고기에 대항해서 각자의 포지션을 잡고 더 큰 물고기 인양 행세해서 위기를 이겨내는 행위이다. 어릴 적 이 이야기를 들었을 때는 어휴 약한 것들이 살아남으려고 머리 잘 썼구나 정도로 생각했는 데, 이 영화에서 접하니까 문득 그 큰 참치가 불쌍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저 조그만 애들은 자기들끼리 그렇게 끈끈히 의지하는데, 나는 왜 혼자일까' 하는 생각에 슬퍼지지 않았을까.

 물론 그렇다고 내가 큰 참치 역할은 절대 아니지만, 가끔 아무리 친하고 오랜 사이라도 왠지 완전 타인보다도 더 낯설게 느껴질 때가 있다. 오랜 친구보다도 그냥저냥 아는 사람이 더 나를 잘 알아주는 것 같은 느낌. 그것 또한 오랜 우정의 증거라지만 그럴 때면 혼자가 된 기분은 지울 수가 없다.

 


어제 아지트 삼은 '흰 당나귀 카페'. 쿠바 느낌이 나는 담벼락이 감싸고 있다.


 '어느 가족'을 보고 늦은 아점을 하고 새 아지트를 찾았다. 제주 생활 20여 일 만에 찾은 아지트. 역시 어제는 주말이어서 그랬던 것인지 부쩍 한산했다. 음악까지 내가 좋아하는 인디 혹은 옛날 음악만 틀어주는 것이 완벽했다. 비는 그쳤지만 아직도 바람이 많이 불어서 위에 옥상은 올라가 보지 못했다. 내일도 혹은 모레도 와서 꼭 한 번은 올라가 볼 생각이다. 

 제주도에 한 달 있는다 그러면 대부분 제주도의 구석구석 안 가본 곳이 없을 것이라 생각한다. 그렇지만 지금까지 거의 절반은 이렇게 하루의 절반을 집 근처 카페에서 보내고 나머지 절반은 집에서 보냈다. 나의 귀찮음, 혹은 그냥 앉아서 하루하루 해야 할 일이 많아서도 있겠지만, 기본적으로 나는 제주도를 '탐험'혹은 '관광'하러 온 것이 아니다. 조금 과장하자면 서울에 10년 20년을 살아도 모르는 명소가 많은 것이 당연한 것 같달까. '관광'을 안 한 것은 물론 아니지만 기본적으로 제주도에 '살러' 온 나는 큰 스케줄이 없는 이상 이렇게 그저 주위만 맴돌 뿐이다.

  내일은 약간의 변주를 넣어 조금 일찍 하루를 마무리 한 뒤에 밤 12시쯤부터 야경을 찍으러 다녀볼 예정이다. 야간에 별 사진을 찍는 이론은 알고 있지만 실전은 한 번도 없기 때문에, 부디 일단 날씨라도 도와주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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