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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꿀잠 Mar 14. 2019

ㅌㅅ 후 제주도의 한 달 #17

21일 ~22일 차 - 혼자서도 잘 

 3일 전에 함덕 해변 앞 동네 마트에서 경미한 차 사고가 났었다. 주차장 크기에 비해 매번 손님이 별로 없어서 애용하는 마트였다. 평소와 같이 주차하려고 후진 기어를 넣고 브레이크에서 발도 떼지 않았는데, 갑자기 후방 경고음이 삐---- 하더니 뒤에서 살짝 쿵 하는 소리가 났다. 3초 정도 멍 했다가 아 이게 사고구나 하는 생각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2011년 면허 취득 이후 처음 사고였다.

 지금 생각해보면 나만의 과실은 아니었던 것 같다. 그쪽도 너무 급하게 들어와서 사고 직후 사과하려던 것 같은데, 경황이 없던 나는 그냥 무조건 내 잘못인 줄 알고 싹싹 빌었다. 내 차는 뒷 범퍼에 약간 흠집, 상대방 차는 앞 범퍼에 금이 갔는데 아마 교체를 해야 할 것 같은 상황이었다. 어찌 됐든 수리하시고 견적 보내달라고 한 뒤, 상대방 차는 보내드렸다. 새삼스레 블랙박스조차 없는 이 렌터카가 미워졌다.

 문제는 내 차 수리비, 상대방 차 수리비까지 모두 부담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렌트할 때 완전 자차로 하면 차 값이랑 보험료랑 비슷해서 일반 자차로 들었었다. 그러면 수리비가 어찌 되든 최소 30, 최대 50까지 내가 부담해야 한다. 그 날은 상대방 차 범퍼 값, 내 차 수리비를 이곳저곳 알아보느라고 다른 것은 아무것도 못했다. 정말 다른 사람의 사고라면 그냥 해프닝이다 하고 넘어갈 만한 수준의 사고지만, 내 일이 되니 엄청 여러 생각이 들었다. 이제 백수 된 입장에서 돈도 돈이지만, 퇴사부터 제주에 온 결정까지, 나름 용기 있는 선택이라고 위로했던 내 선택들이 비웃음 당하는 기분이었다. 

 '갈 곳도 안 정하고 너무 성급한 결정 아니야?'부터 '그 돈이면 해외에서도 떵떵거릴 텐데 왜 꼭 제주도야?'까지. 대수롭지 않게 여겼던 그런 조언 아닌 간섭들이 스쳐 지나갔다. 그렇지만 크다면 크고 작다면 작을 수리비 몇십만 원으로 아직 시작도 안 한 이 길을 부정하고 싶지는 않았다. 사고 이후 제주도에서 많이 갔던 카페, 바닷가, 식당 등만을 전전했다. 이제는 몇 번 만나 아는 척해주는 사진 찍으시는 분, 말 안 해도 알아서 커피를 주시는 카페 알바분, 말도 이것저것 걸어주시는 식당 주인 분들을 만나며 그래도 내가 꽤나 열심히 여기에 드나들었구나 하는 기분이 들었다. 

 결국 제주에서 받은 것은 제주로 해결된다.



 

이번 주부터 재 취준을 시작했다.  

 똑같은 길인데도 처음 갈 때는 그렇게 길지 않은 길이었는데, 또 가면 되게 길게 느껴질 때가 있다. 마찬가지로 힘든 일이라도 앞에 무엇이 있을지 모를 때는 어떻게든 해내지만, 그 과정을 한번 다 알아버리면 두 번째니까 나름 요령이 있을 텐데도 시작도 하기 전에 그 지단 한 과정이 떠올라 미리 지쳐버리고는 한다. 그래서 군대도 한 번은 가도 두 번은 못 간다는 것 같다. 군대야 두 번 갈 일 자체가 거의 없겠지만, 아득하면서도 어쩔 수 없이 또 그 지단 한 과정을 거쳐야 하는 것이 있다.

 수능이 그렇겠고 누군가에겐 결혼도 그렇겠고, 지금 나에겐 취준이 그렇다. 서류에 인적성에 1차 면접에 최종 면접까지 어느 것 하나 만만한 게 없는 그 과정들에 3월 말, 4월 중, 5월까지 하루하루 힘을 쏟을 생각 하면 한 것 없는 벌써 한 서류 5 연탈 한 느낌이다. 그래도 지금은 푸른 바다와 하늘을 보면서 쓰는 것에 감사해야겠지.

 같은 길을 간다고 꼭 같은 것만 보지는 않을 것이다. 이미 지나온 길이지만 그 안에 못 보고 지나친 길이 있었으니 다시 출발선에 선 것일 테니까.




  어젯밤에는 오랜만에 '제주'스러운 것을 해보기 위해 별 촬영을 떠났다.

코스는 '나 홀로 나무' -> '1100 고지' -> ('이호테우 해변') -> '산지등대'로 정했다. 은하수는 4월 초부터 관측이 가능하다 하여 포기하고, 처음 별 촬영하는 것이니 별이라도 담아보자는 소박한 목표를 세웠다. 그렇지만, 그 소박한 목표마저 처참하게 깨졌다.

 별 촬영은 혼자 가지 말아야 한다. 밤은 어마어마하게 추울뿐더러 무섭다. 아무도 안 올 비수기 평일이라서 그런지 몰라도 '나 홀로 나무'와 '1100 고지'는 정말 불빛 하나, 사람 하나 없었다. 그래도 1시간씩 걸려서 간 곳인데 나 홀로 나무와 1100 고지의 사슴 동상이라도 보려고 했으나, 빽빽한 숲 속에서 오가는 차 하나 없는 곳을 달리다가 노루 한 마리를 마주치고는 무서워서 그대로 도망쳤다.

 이미 물 건너 가버린 별 촬영. 그렇지만 밤에 큰 마음먹고 멀리 나온 김에 그래도 조금 밝은 곳이라도 가서 야경을 찍어보기로 했다. 

떠나갈 듯이 바람이 불던 산지등대. 추워서 그런가 사람들이 다 차 안에서 보고 있다.

그래도 좀 덜 무섭고 밝은 곳에 도착한 기쁜 마음에 카메라와 삼각대를 꺼내 들었다.

 여기서, 제주도가 나를 버렸다는 확신이 들었다. 구매한 지 1달도 안 된 삼각대가 고장 난 것이었다. 카메라를 올리고 위치를 고정하는 나사가 푹 빠져버려서 삼각대는 지 몸뚱이만 세울 수 있을 뿐 카메라를 고정시킬 순 없었다. 카메라를 올리면 무게 때문에 계속 고개를 푹 숙일뿐이었다. 그러나 장장 4시간의 이 여정에 사진 하나 안 남길 순 없었다. 위 사진 3개는 애써 ISO는 최대한 낮추고 셔터 스피드를 1 ~ 2초로 해서 이렇게 저렇게 찍어 본 사진들이다. 1초는 어떻게 손에 힘 꾹 주면 대충 보면 안 흔들린 것처럼 찍히는데, 2초부터는 아무리 해도 역부족이었다. 그렇다고 ISO를 높여서 노이즈가 끼고 싶진 않았기 때문에.. 저 등대는 생각보다 이뻐서 눈으론 만족했었지만 사진이 이따구인 것에 정말 탄식만 나왔다. 처음 출발할 때 삼각대를 한 번만 체크를 했었더라면 혼자서 라디오가 2개가 끝날 때까지 차를 타고 다니진 않았을 텐데 말이다. 지금 생각해도 계속 차에 두고 한 두 번만 꺼냈던 삼각대가 어쩌다 이 지경이 됐는지 알 수 없는 노릇이다.


 그렇게 야간 외출을 마치고 3시쯤 되어 집으로 돌아왔다. 역시 집이 최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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