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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꿀잠 Nov 08. 2020

현실과 이상 사이, 그 어딘가

브람스를 좋아하세요? - 후기

* 이 글은 드라마 '브람스를 좋아하세요?'의 약간의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콘텐츠의 트렌드라는 것은 가늠조차 하기 어렵다.

 짧고 자극적인 것들이 득세하는 유튜브, 지상파 방송조차 유튜브용 콘텐츠를 별도로 만드는 세상이라지만 또 그 안에서도 다시금 그런 것들과는 거리가 먼 콘텐츠들이 계속해서 만들어진다. 내가 그 채널의 편성 책임자라면 내 개인의 취향과는 별개로 도저히 요즘 시대에 허락하지 않았을 것 같은 콘텐츠들이 그래도 다시 채널에 자리 잡고, 작게나마 입소문이 이어진다는 것은 어쩌면 콘테츠는 시대와 장르의 문제가 아니라 다행히도 결국은 '완성도'의 영역이 아닐까 싶은 생각이 든다.

 

 나는 드라마나 영화를 많이 본다면 많이 보고 적다면 적게 보는 일반 시청층에 가깝다. '미스터 선샤인', '스토브리그' 등 한 분기 정도를 사로잡았던 드라마들을 보면서도 '부부의 세계' 같은 안 본 사람 찾기가 힘든 드라마는 또 안 봤으니 나로서도 드라마를 보는 기준을 알기 어려웠다. 

 그러던 중 '브람스를 좋아하세요?'라는 드라마가 새로 시작한다는 기사를 봤고, 그 기사에서 이 드라마는 대놓고 '정통 멜로'의 장르를 표방했다. 때마침 내가 좋아하는 박은빈, 김민재가 주연이어서 그랬는지 몰라도 아직 첫 방송을 하기도 전인 그때부터 나는 이 드라마가 종영하는 순간 몰아서 봐야겠다는 생각을 했었다. 

 그렇게 힘겹게 3달여를 참아 드라마는 드디어 종영을 맞이했고 어떠한 스포를 보기 전에 정주행을 시작했다.


 '브람스를 좋아하세요?'는 여러모로 요즘 콘텐츠의 트렌드와는 거리가 멀다. 3분만 넘어가도 한 영상을 보기 힘들다는 요즘 시대에 롱테이크와 대사 없는 인서트 샷이 수없이 많으며, 등장인물들의 대화는 답답하다 싶을 정도로 공백이 길고, 그 공백 끝에 나오는 대사 조차 매우 짧다. 위트 있는 대사들에서 나오는 유머조차 찾기 드물며, 클라이맥스 씬에서조차 배우들의 감정선은 최대로 절제되어 있다. 뚜렷한 악역조차 없어서 이 드라마의 가장 큰 갈등은 인물 간의 갈등이 아니라 주인공의 내적 갈등이 아닌가 싶을 정도다.


 위 내용들로만 보면, 이 드라마는 '재미없을 수밖에' 없는 드라마다. 그러나 이 드라마는 자극적인 소재나 빠른 템포가 없이도 온전히 1시간을 몰입하게 하는 힘을 가지고 있다. 그 몰입력은 아마도 이 드라마가 애매하게 여러 장르를 혼합한 것이 아니라, 청춘들의 성장과 사랑에 온전히 집중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그 몰입은 우리들이 항상 이야기하는 '현실과 이상'의 묘한 갈증을 채워준다.


 드라마는 드라마답게 이상적이면서도 나와 대입할 수 있는 현실감을 지켜준다. 경영대를 졸업했지만 바이올린이 좋아 늦깎이 음대생이 된 채송아(박은빈 역)가 10년, 15년 동안 바이올린만 보고 살아온 음대생들 사이에서 살아남는 것은 현실적으로 매우 어렵다. 그런 그녀가 타고난 재능으로 어린 나이에 세계적인 피아니스트가 된 박준영(김민재 역)을 질투하면서도 동경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일지도 모른다.

 이미 출발과 현재가 너무나도 다른 두 명이 사랑에 빠지는 것은 너무 드라마적인 요소이지만 모두가 말려도 자신이 좋아하는 꿈을 좇는 채송아를 보며 피아노에 재능이 있지만 한 번도 자신이 피아노를 좋아하는지는 몰랐던 박준영이 자신이 좋아하는 음악을 깨닫게 되고, 마냥 부러워만 했던 그 재능 때문에 너무나 힘들었던 박준영을 보며 다시 일어서게 된 채송아가 서로에게 위로를 얻은 것은 또한 그만큼 현실적이었다. 


 딱 드라마는 우리가 꿈꾸는 정도의 이상적인 스토리를 보여준다. 진짜 말도 안 되는 이상은 우리도 바라지 않지만, 그래도 내 인생이 이 정도만 빛날 수 있다면 좋겠다. 하는 정도의 이상.


 내가 이 드라마에서 본 빛나는 인생은 채송아였다. 요즘 버릇같이 말하는 것이 있다. 그냥 내가 못하던 잘하던 상관없이 하는 것만으로도 즐겁고 행복한 것을 찾고 싶다. 짧게 말하면 취미. 힘들고 지칠 때 '아 빨리 그걸 하고 싶다.'라는 생각이 드는 것. 제일 좋아하기에 제일 큰 상처를 줄 수 있는 거라고, 그런 대상인 바이올린이 있는 채송아가 안쓰러우면서도 부러웠다.

 좋아하는 것을 찾는 것조차 자격이 필요한 시대다. 이것도 욕심일 수 있지만, 좋아하는 것을 찾고 그 좋아하는 것을 잘하기 위해서 온전히 그것에 몰두하는 시간을 갖고 싶다. 그 결과가 혹시나 실패더라도 그 당시에는 너무나도 힘들겠지만 나중에는 그때만큼 살아있음을 실감하는 시간 또한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브람스를 좋아하세요?'는 '정통 멜로'를 표방했지만 개인이 살아가는 힘을 얻는 소소하지만 전부인 이야기를 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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