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에 지속적으로 나오는 '인디언'이라는 용어에 대한 양해를 미리 구합니다.
영화 <늑대와 춤을>은 개봉 당시 제 63회 아카데미 시상식과 제 41회 베를린 국제 영화제 수상은 물론 미국 내 흥행 수익만 약 1억 8,500만 달러를 기록하며 전문평단의 호평과 함께 대중적 흥행까지 거머쥔 작품이다. 이 영화는 인종·성 차별적 요소로 많은 비판을 받았던 기존 서부극에 대한 수정주의 서부극의 형태를 취한다는 점에서 기존의 불합리한 역사 서술을 극복했다는 호평을 받았다.
긍정적인 반응의 주류는 이 영화가 헐리우드 영화의 기본 아메리카니즘을 벗어나 인디언의 시각에서 이야기를 전개하면서 진정한 휴머니티 정신을 그려냈다는 것이다. 또한 과거 70년대 서부극의 향수를 아름답게 재현하면서 인디언에 대한 미국인의 원죄의식을 다뤄 미국인들의 역사관에 큰 영향을 준 작품이라는 평가 속에 미국국립영화보존국이 미 국회도서관에 보관하는 국립영화등재목록에 선정되기도 했다.
대략적인 영화의 내용은 지속되는 남북전쟁에 지쳐 초원 개척지로의 발령을 지원한 군인 존 덴버(케빈 코스트너)가 인디언 ‘수’족을 만나 서로 감정을 교류하고 그들에게 동화되면서 진정한 나를 발견하지만, 백인의 잔인한 침략에 의해 인디언 사회가 사라지는 것을 바라 볼 수밖에 없었다는 장엄한 이야기이다. 여기에 서부 대자연의 아름다운 풍경과 3,500여 마리의 버팔로가 실제 동원된 사냥 장면, 존 배리의 탁월한 OST가 어우러지면서 당시 관객을 매혹시켰던 자연과 문명에 대한 장대한 서부극이 완성된 것이다.
할리우드 영화에서 서부극은 ‘미국 서부 개척 신화를 대중에게 확인시킨' 장르이자 ‘미국 영화와 함께 발전하며 할리우드 스튜디오 제작 시스템의 기본 토대를 만든' 장르다. 초기 서부극은 문명을 대표하는 카우보이와 야만을 대표하는 원주민의 싸움을 통해 문명의 힘을 관객에게 각인시키고 짧은 역사 속에서 부재했던 미국 신화와 전설을 대체해 자긍심을 드높이는 기능을 수행했다. 선과 악의 극적인 대립을 통해 주인공의 영웅성과 정의로움을 강조했다는 점에서 현재 프랜차이즈 히어로 영화의 원조 격이라 볼 수도 있을 것이다. 이렇듯 서부극은 현재 미국의 정체성 줄기를 형성했다는 점에서 역사적으로 그 의의가 있다.
하지만 다양한 서부극 중에서도 특히 <늑대와 춤을>이 큰 주목을 받았던 이유는 역사적 사실의 고증보다 미국인, 특히 백인 남성의 판타지를 그려내는데 열중했던 서부극이라는 장르를 반성적인 시선에서 다시 풀어냈기 때문이다. 고전 서부극의 기저에 깔린 차별적 시선, 즉 백인 중심의 인종주의와 남성우월주의, 문명과 야만의 이분법적 구분 등에 대한 성찰과 반작용을 거친 작품인 것이다. 하지만 영화를 통해 과거 백인들의 무자비한 살상 행위를 반성하고 속죄하고자 한 의도와는 달리 영화 곳곳에는 여전히 백인 남성들을 위한 판타지적 요소가 남아있다. 또한 역사적 사실의 왜곡 이외에도 이 영화는 바람직한 ‘역사 영화’로 평가받기에는 부적절한 측면이 존재한다.
영화에서 가장 눈에 띄는 점은 주인공이 여전히 전형적인 백인 남성이라는 것이다. 그는 건방짐, 호전성으로 대표되는 카우보이적 기질을 조금 희석시켰을 뿐 여전히 야만을 길들이려는 미국 개척자의 태도를 견지하고 있다. 그는 인디언 ‘수’족이 위험에 처할 때마다 권총의 위력을 강조하며 ‘구원자로서 백인’의 면모를 맘껏 뽐낸다.
또한 주인공 존을 연기한 배우 케빈 코스트너가 고독하게 자신의 꿈을 위해 정진하는 미국 남자의 이미지를 가지고 있었다는 점 역시 관객들에게 성조기를 휘날리며 인디언을 이끄는 주인공의 리더쉽을 강조하는 데 일조했을 것이다. 하지만 존이 인디언 ‘수’족과 있을 때는 모든 사건의 중심에서 우두머리의 역할을 수행하지만, 원래 백인 사회에서는 특별한 능력을 보여주지 못하는 평범한 사람에 가까웠다는 점도 주목해볼만 하다. 영화 초반, 다리를 자를 바에는 차라리 죽음을 택하겠다며 전장으로 돌진했지만 의도와 다르게 아군을 위해 솔선수범하는 것으로 비춰져 엉겁결에 전쟁 영웅이 되는 모습은 진중한 리더의 모습보다는 웃음을 유발하는 가벼운 캐릭터에 불과하다.
영화에서 인디언을 다루는 방식 역시 평등한 방식이라고는 볼 수 없다. 영화에서 인디언 사회는 주인공 존이 개척지에 대한 ‘낭만’과 ‘호기심’으로 인디언 지역을 자원하면서 처음 언급된다. 인디언 사회를 제시하는 첫 과정부터 지극히 백인중심적인 시각으로 다가서는 것이다. 과거 학살의 역사를 사죄하려는 의도의 영화임에도 굳이 초반부터 백인들의 인디언에 대한 낭만적이고 신비로운 기호성을 강조할 필요가 있었을 지에 대한 의문이 든다.
인디언의 첫 시각적 등장도 같은 맥락에서 문제가 된다. 인디언을 만나기 전까지 존은 인디언을 야만적이고 잔인한 부족으로 이미지화했지만 처음 그가 만난 인디언 캐릭터는 겁 많고 허술한 성격으로, 영화 전개 속 하나의 웃음유발 장치로 기능한다. 다가오는 존에게 겁을 먹고 도망가다 넘어지는 인디언의 장면은 인디언에게 잔인한 살인마의 이미지는 벗겨냈을지 몰라도 다시금 그 자리에 순진한, 다소 멍청한 야만인의 이미지를 씌우는 연출이었다. 또한 존이 인디언과 친해지기 위해 커피와 설탕을 대접하고 그들이 단 맛이 나는 설탕을 통해 경계심을 풀게 되는 모습은 서양 제국주의의 상징, 초콜릿을 떠올리게 하는 클리셰다.
게다가 영화는 애써 벗겨낸 무자비한 폭력적 인디언의 이미지를 그대로 ‘수’족과 대비되는 ‘포니’족에 대입한다. 두 부족의 대립이 심화될수록 관객에게 ‘수’족은 ‘인디언답지 않은’ 순하고 비폭력적인 종족이며 ‘포니’족은 인디언의 미개함에 대한 기존 편견을 강화하는 ‘역시 인디언다운’ 인디언으로 인식되는 것이다.
인디언 사회가 다소 비현실적일 만큼 행복한 대자연의 모습처럼 그려진 것도 진실한 역사에 대한 고민을 방해하는 요소 중 하나다. ‘대평원에서의 생태주의적 삶’, ‘완전한 공동체의 유지 능력과 전사의 전통’과 같이 신화적으로 그려지는 인디언 종족이 불러일으키는 향수들은 과거 잔인한 학살의 사건에 대해 백인들이 자행한 인디언 문명의 파괴로 비춰지게 하기 보다는 어렴풋이 추상화된 문명과 자연의 대립으로 받아들이게 하기 때문이다.
또한 인디언사회가 당시 서양에서 그리던 이상향과 완벽히 일치되도록 표현한 점도 영화가 진정한 인디언에 대한 이해가 부족했음을 알려준다. 당시 90년대 미국사회는 극적인 경제성장을 겪으며 서부의 전원생활과 자연속의 자유로운 삶에 대한 사람들의 동경이 큰 시기였다. 이에 감독은 사람들의 환상과 일치하도록 인디언 부족사회를 이상화함으로써 진정한 인디언에 대한 이해를 차단한 것이다. 사람들은 영화의 아름다운 시각 이미지를 통해 머리가 아닌 가슴으로 그들을 응원했고 그들처럼 되길 꿈꿨다. 하지만 분명 실체를 가린다는 점에서 타자를 이상화하는 것은 타자를 부정적으로 왜곡하는 것만큼 위험하다.
주인공 존과 ‘수’족의 백인 원주민 ‘주먹 쥐고 일어서’가 보여주는 사랑 이야기도 마찬가지다. 영화의 연출적 측면에서 두 백인의 사랑 이야기는 아름다운 장관과 더불어 영화의 서정성을 더하는 전개이지만 역사영화의 측면에서 감정적 개인사는 과거 사건에 대한 이성적 분석을 방해하는 걸림돌에 불과하다.
보다 자세히 본다면 ‘주먹 쥐고 일어서’의 캐릭터 설정도 문제가 다분하다. 그녀는 백인으로 어릴 때 가족이 인디언 ‘포니’족의 습격을 받으면서 ‘수’족과 함께 살게 된 인물로 ‘수’족 내의 유일한 백인이다. 그녀는 존이 ‘수’족과 친밀해지도록 매개하는 보조자의 역할을 담당한다. 그와 유일하게 심오한 감정적 교류가 가능하고 그의 깊은 고민을 진정으로 이해해둘 수 있는 인디언인 것이다. 존이 그녀와 함께 인디언 부족을 떠나가려 할 때 “나는 당신의 친구다. 그대도 항상 나의 친구인가?”라는 다소 순진하고 어린아이 같은 질문을 통해 그를 잡아보려는 인디언 ‘머릿속의 바람’은 이해하지 못할 심오한 고민과 이성적 판단을 백인인 두 인물만은 선천적으로 가지고 있다. 하지만 당신의 친구이지만 이 곳을 떠나야만 하는 백인들의 그 모순, 문명을 ‘머릿속의 바람’은 이해하지 못한다.
<늑대와 춤을>은 과거 인디언의 잔인성만을 부각했던 인종주의적 서부극과의 차이를 강조하며 영화 서술자의 한계로 지적됐던 ‘백인’의 문제를 드디어 극복했음을 강조한다. 하지만 여전히 영화에서 서술자는 서술자 자신의 한계에 매몰되어 문제의 본질에 접근하지 못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어설프게 인디언을 미화하려는 그 중립적 시도가 오히려 진실을 가려버린 것이다. 이는 역사영화가 자기반영성, 즉 자신의 입장을 드러냄으로써 논란·논쟁의 여지를 창출하고 담론의 장을 구성해야 바람직한 역사영화의 역할을 다 할 수 있음을 간과한 것이다.
영화의 감미로운 이야기 구성은 관객이 주체적으로 인디언의 아픈 역사를 상기하고 자신을 되돌아볼 기회를 잡지 못하게 방해할 뿐만 아니라 사건 자체를 이미 종결된 것으로 바라보게 한다. 이미 인디언 사회가 해체되고 그들의 목소리가 사라진 시점에 미국의 ‘너그럽고 양심적인’ 사과는 인디언에 초점이 맞춰지기보다는 미국의 인도주의적 미덕에 초점이 맞춰져있을 뿐이다.
영화는 마지막으로 “13년 후, 그들의 집은 파괴되고, 그들의 버팔로는 사라졌으며, 마지막 남은 ‘수’족은 네브라스카 주 로빈슨 요새에서 백인에게 항복했다. 평원의 위대한 기마민족 문화는 사라지고, 서부 개척지 또한 그렇게 역사 속으로 조용히 사라져갔다.”는 자막으로 끝이 난다.
이는 역사적 사실을 객관적으로 기록한 것이라는 점에서 언뜻 긍정적으로 보이지만 사건의 종결을 의도적으로 강조했다는 점에서 역사영화라 평할 수 없는 두 번째 이유다. 영화는 인디언의 비극적 삶을 통해 백인들의 반성을 유도하는듯 하면서도 현대 사회에서 인디언이 앞으로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 현대사회에서 인디언사건의 의미와 의의는 무엇인지에 대해서 함구한 것이다.
그러면서도 이 영화는 수정주의 서부극이라는 형식을 내세워 시간의 흐름에 따른 발전과 이상적 미래를 전제한다. 초기 서부극의 단순하고 통념화된 이야기가 시대를 지나면서 자기반영적 관계를 거쳐 복합적, 반성적 이야기로 변화했다는 것이다. 역사학에서 주로 사용되던 ‘수정주의’라는 단어를 빌려 단순히 ‘수정’의 의미가 아닌 ‘발전·우월’의 의미로 사용하면서 담론을 더욱 복잡하게 만들었다. 하지만 젊은 남성이 원주민 여성과 사랑에 빠지고 영적인 각성에 이르면서 원주민 편에 서서 싸우게 되는 이야기가 수정주의 서부극의 전형적인 서사구조였던 점을 생각하면 백인 중심의 우월주의는 여전히 ‘수정’되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한계에도 불구하고 과거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영화 <늑대와 춤을>이 평론가로부터 진정한 대자연속의 원주민과 백인 문명의 충돌을 다뤄냈다는 평을 꾸준히 받는다는 점은 역사영화의 진정한 의미에 대한 심각한 재고가 있어야 함을 의미한다.
타자에 대한 수탈, 학살의 역사 영화를 다룰 때는 더욱 그렇다. 아프리카인, 원주민, 인디언, 피지배자라고 하는 것의 의미는 그들 자신 안에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인디언이 지니는 의미는 인디언으로부터 멀리 떨어진 곳에 위치하고 있다. 그 모든 사건과 의미는 가해자, 학살자에게서 나온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역사 영화를 통해 기존에 쓰여진 역사에 대한 도전을 수행해야 한다. 기존의 불합리한 사고방식에 대한 도전을 영화 속에 그려내고 그를 통해 담론화해야 한다. 그래야 비로소 영화는 쓰여진 역사, 죽은 역사가 아닌 새로운 과거를 제시하고 그 것이 다시 우리의 미래일 것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