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inding the gap
상업영화들은 피해자 의식을 대개 가족주의에 기대어 동일화를 유도하고 우리를 울게 한 뒤에 이제 그만 슬퍼해도 되지 않나요, 라고 회유한다. 죽도록 고생한 부모 세대를 인정하고 그 세대로부터 우리도 열심히 했으니 알아주세요, 라고 한 다음 서로 붙잡고 꺼이꺼이 우는 것과 같다.
그에 반해 젊은 감독들이 만든 독립영화에서는 이런 가족주의로의 퇴행을 솔직하지 못한 것으로 받아들이고 화해와 카타르시스의 대단원을 끝내 유도하는 대신 등장인물들이 겪는 고통을 할 수 읶는 데까지 최대한 지켜보는 서사전략을 택하는 경우가 많다.
김영진의 시네마 즉설
픽션을 다루는 극영화와 달리, 다큐멘터리의 경우 스크린 위에 재현된 사건과 인물들의 삶은 스크린 내의 가상적 공간에 한정된 것이 아니라 현실 세계로 연장된다. 극영화에서의 영향은 불신을 유보시키는 것(개연성 있는 세계로 인정받는 것)으로 충분할 수 있지만, 논픽션이 주로 원하는 건 믿음을 주입시키는 것(실제 세계로 인정받는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특성 때문에 다큐멘터리라는 형식을 통해 폭력의 역사를 서사화하는 것은 위험하다. 논픽션임을 주창하는 형식 탓에 감독의 주관적 시선이 관객에게는 의심의 여지가 없는 객관적 현실로 받아들여지기 때문이다. 특히 배우들이 현실의 가해자와 피해자일 때는 더더욱 그렇다. 감독이 어떤 목소리를 택하는지에 따라 한 순간에 그들은 자신의 피해를 증언할 기회를 얻을 수도, 박탈당할 수도 있다.
하지만 <화해의 조건>은 감히 객관적이라고 말해도 될 만큼 상당히 관조적 자세를 취한다. 영화에서 세 친구들 잭, 키어, 리우빙은 각각 가장(부양자), 흑인, 가정폭력의 피해자로 등장한다. 세 가지의 위치가 각자에게 중첩되기도 하지만 결국 그들이 겪는 공통된 고통의 핵심은 '가족'이다. 가족은 나에게 끊임없이 울며 배고파하는 아이를 불시에 주어 자유로운 외출을 막기도 하고 흑인의 정체성을 대물리기도 하며 매일 이유없는 폭력을 행사하는 새아빠를 갖게 만들기도 한다. (물론 잭이 육아 분담에 대한 갈등 때문에 아내 니나에게 폭언과 폭력을 행사했다는 점을 고려한다면 잭을 가족 문제에 관한 피해자로 봐야 하는지,가해자로 봐야 하는지에 대한 논란은 존재할 수 있다. 다만 영화의 트리오 구성을 존중하여 잭을 가족주의의 영향을 받는 주 인물로 다루기로 한다)
영화에서 가장 독특한 점은 모성 신화의 탈신화화일 것이다. 보통 가족주의 하의 폭력이 가부장제의 남성주의적 폭력과 혼동되어 그려지며 그 과정에서 남성의 무자비한 폭력에 대한 해답을 모성에서 찾는 것과는 다른 방식이다.
영화에서 물리적인 폭력을 가하는 인물은 아버지이지만, 어머니는 그 폭력을 방관한다는 점에서 피해자인 동시에 또 다른 가해자다. 이는 리우빙이 새아버지에게 지속적인 구타을 당했음에도 어머니가 묵과한 탓에 지속적으로 그가 어머니와의 관계에서 어려움을 겪는 장면에서 강하게 드러난다. 이후 긴 시간이 흐른 뒤 영화의 인터뷰 형식을 통해 그때의 얘기를 꺼내며 어머니 앞에서 눈물을 쏟는 그의 모습은 작품의 주제의식과도 밀접히 닿아있다.
이는 결국 모성이 가족주의의 구원자가 될 수 없음을 명확히 보여준다. 우리사회의 저변에 강력하게 자리 잡고 있는 모성 이데올로기, 즉 '어머니의 존재는 아름다운 무엇이며, 안온한 가정은 모성의 힘으로 이룩해낸 것이다'는 믿음의 허위를 폭로하는 것이다. 우리는 모성을 통해 일그러진 부성이 자연 회복되기를 기대해서는 안된다. 이러한 무의식은 결국 파괴된 가정에 대한 책임을 어머니가 응당 지녀야 할 따뜻한 모성이 부족했음, 즉 어머니의 자질 부족으로 잘못 물을 수 있기 때문이다.
결국 영화는 전형적인 가해자-피해자-구원자의 구조를 깨뜨림으로써 가족주의에 대한 진실한 논의에 한발짝 더 다가가게 한 셈이다.
같은 맥락에서 영화가 피해자를 다루는 방식, 폭력의 피해에 대한 애도를 표하는 방식 역시 주목할 만하다. 제 3자를 통한 사건 해결로 피해자의 자력구제를 원천 차단하지도 않으며 '피해자다움'에 집착하지도 않는다. 영화는 그저 피해자에게 마이크와 스케이트 보드만을 쥐어준다. '구원자는 진정으로 존재하는가'에 대한 검토 후 이어지는 피해자에 대한 새로운 성찰이다.
영화 연출에서 큰 역할을 수행하는 스케이트 보드 근접 촬영은 관객에게 박진감과 시각적 쾌락을 선사하며 영화의 완성도를 높이는 중요한 요소 중 하나다. 물론 이는 연출적 효과 이외에도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다.
스케이트 보드는 균형감과 평형성, 민첩성과 같은 운동 기능이 복합적으로 다양하게 요구되는 운동이다. 특히 비탈에서 활강을 시도할 때나 점프를 시행할 때는 고도의 운동 기능이 요구된다. 그렇기에 상해의 위험이 큰 스케이트보드는 자신의 우월성을 나타내고 싶어하는 욕구와 한계에 도전하려는 호전적인 심리에 매우 적절히 부합되는 종목이다. 흔히 통상적으로 생각하기에 '음울함', '소극적', '비사교적' 등으로 수식되는 가정 폭력의 피해자에게 어울리는 스포츠는 아닐 것이다.
잭과 키어, 리우빙이 마이크를 통해 자신의 삶을 진술함으로써 진정한 화해에 이르게 되고 스케이트 보드를 통해 삶을 주체적으로 살아가고 있다는 안도감을 느끼는 것은 이들이 그들의 삶 내내 온전한 피해자로만 존재하지 않음을 역설한다. 그들은 실제로 자신의 삶을 보다 나아지게 하기 위해 계속해서 움직이고 있다. 누군가 구제해주기만을 기다리며 무력히 울고 있지 않다. 돌아가신 아버지의 무덤에 꽃을 놓고 어머니의 세번째 결혼식을 웃으며 축하하고 정든 보금자리를 떠나 새로운 도시에 적응하는 것은 모두 그들 자신이 이뤄낸 성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