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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그늘 May 04. 2021

'노력'과 '재능'

가장 최소한의 '노력'으로 최대의 '성과'를 내고 싶은 마음

생각해보면 나는 평생을 이 '노력'과 '재능'이라는 두 가지 키워드 사이에서 고민했던 것인지 모른다.

지금부터 하는 얘기는 두서 있게 짜임새 있게 정리된 글이 아닌 그저 나의 푸념이다.

현재 나의 고민과 앞으로에 대한 나의 생각을 담은 정말 짜증섞인 자조적인 푸념이다.


더 정확히 말하면 내가 가진 '재능'에 대한 고찰이다.

나는 어떤 재능을 가지고 있는가. 

좋아하는 것에 재능이 있는가. 

찾지 못한 것은 아닌가. 

재능에 맞는 일을 해야 하는가.


고1에서 고2로 넘어갈 무렵, 이과와 문과를 선택해야 할 때도. 

잠깐이지만, 그런 생각을 했다. 이 선택이 내 미래를 결정하는 요소 중 하나가 되는 것인가. 그리고 결과적으로 보면 어느정도 맞는 일이기도 했다. 인생은 선택의 연속이었다는 걸 새삼 느낀다. 물론, 그때의 선택을 후회하지 않는다. 나에겐 애초에 선택지가 많지 않았기 때문이다. 객관적인 판단으로 볼 때, 나는 이과적인 재능이 없었고, 문과적인 흥미는 있었다. 문과에 대한 재능은 모르겠으나, 어찌됐든 흥미가 동하였기 때문에 나는 문과를 선택했다.


그 다음은 대학교였다. 

이과와 문과 같은 단순 선택지가 아니었다. 수많은 학교와 학과들이 존재했다. 나만의 생각인지 몰라도. 그때 당시 대학교라는 건 왠지 세상의 전부인 것만 같았다. 서울 혹은 수도권이 아닌 대학에 가는 것은 뭔가 실패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평생을 인천, 김포, 서울에서 살았기에 다른 도시에 대한 막연한 두려움도 있었다. 지금도 그렇지만, 그때는 정말 엄청 좁은 우물 속에 사는 개구리였다. 


나름의 고민 끝에 과를 선택하고, 우연과 노력같은 시간을 들여 나름 만족스럽게 대입을 맞췄다. 남들이 보기에 어쩌면 참 운이 좋아 보일지도 모른다. 난 일평생 최선이라는 걸 해본 적은 없으니 말이다. 항상 내 기준에서 감당할 수 있는 최악의 상황을 고려했다. 그리고 결과는 항상 그러한 최악보다는 나았다. 우스운 것은 최악을 상황을 상정했다는 건 그럼에도 이 최악을 면하고자 함이였을텐데, 반대로 합리화를 하는 결과를 초래했다. 뭔가 좀 하려 하다가도 힘이 들면, 그래도 어차피 최악의 상황이 와도 그건 감당이 가능하니까 라는 마인드로 합리화 하였다. 


그 습관은 지금의 나이가 되어서까지 유지하고 있다. 

그리고 그 습관의 지금의 나를 만들었다는 건 지금에서야 깨달았다. 

대학교를 입학하고, 졸업하고 세상을 보는 시야가 넓어졌다. 1년 뒤, 10년 뒤에는 더 넓은 시야를 가지게 되겠지. 

딱 지금의 이 시야를 좀 더 어릴 때 가졌다면 좋았을 텐데. 라는 헛된 망상을 하곤 한다. 현재의 상황과 내가 지닌 시야의 갭이 항상 맞지 않다고 느낀다. 좀 더 빨리 깨달았어야 하는 게 너무나도 많은 셈이다. 


합리화하는 이 습관을 지닌 채 대학생이 아닌 생 어른이 되어 보니 난 참 최선을 하지 않은 삶을 살았구나 라는 생각이 든다. 남들이 보기엔 열심히 사는 것처럼 보였을지 몰라도 난 그저 발버둥에 불과했다. 기한이 있는 일에 그 기한을 맞춰서 업무를 수행했을 뿐. 나 자신에 대해 전혀 생각해보지도 않았다. 그리고 무엇보다 용기가 부족했다.


다시 돌아와서.

나는 '노력'과 '재능' 사이에서 많은 갈등을 하며 살아왔다. 지금까지도.

마치 가만히 앉아서 돈을 벌고 싶은 마음처럼

최소한의 노력으로 최대의 성과를 내고 싶다. 

그리고 결국 그걸 이루기 위해선 '재능'이 필요하다.


노력으로 모든 걸 해결할 수 있을 거라 생각한 적도 있다. 

노력도 재능이라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 특별히 부정하고 싶은 마음도 없다. 

그리고 분명히 노력을 꾸준히하는 것 그 자체만으로도 대단한 일이고 가치가 있다고 생각한다.


삶을 바라볼 때, 결과가 아닌 과정을 바라본다면 이러한 부분에 얽메이지 않아도 된다. 

그런데, 문제는 결과에 대한 욕심이다. 나는 최대의 성과를 내고 싶다.

매일 같이 쓰는 일기에 적는 말은 동일하다. 


화이팅 하자.

내일은 더 잘할 수 있다.

오늘은 아쉬웠지만, 내일은 더 잘할 거다.

꾸준하다보면 어떻게든 될 거다.


하지만, 놀랍게도 나의 하루는 게으르기 그지없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무언가를 계속하고 누군가 보기에 분명 열심히 산다 할 수 있는 하루를 산다.

그럼에도 결과는 없다. 한 시간을 들여 무언가를 한다치며 눈에 보이지 않는 내 노력만이 남을 뿐이다. 이것에 대한 결과는 여전히 부질 없고 객관적으로 아쉬움이 가득하다.


이렇게 한 달, 1년, 2년 쌓아가다보니 지쳐간다. 아, 그래 이쯤되면 인정할 수밖에 없다.

나는 내가 하고자 하는 일에 재능이 없구나. 그저 즐기는 수밖에 없구나.

그래, 즐기는 자가 되면 어쩌면 도움이 되려나. 

즐기는 것도 기본이 되어야 할 수 있는 게 아닌가. 결과에 대한 즐거움이 있어야 즐거울텐데

과정으로만 즐거움을 찾지 못하는 나는 속물인가. 아니면 그저 결과만을 원하는 거일까.


이 모든 것은 결국 앞으로 나는 무얼 하며 어떤 생각을 갖고 세상을 살 것인가와 연결이 된다.

삶이 우울하지도 않고, 즐겁지도 않다. 소소하게 쌓이는 즐거움은 있고, 간헐적으로 들리는 우울은 있으나.

내 삶을 흔들정도의 무게감을 지니진 못 한다. 


세상의 답은 결국 아무도 모른다.

나의 답은 아마도 나에게 있을 것이고, 나는 답을 알고 있다. 

정확히 말하면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이란 건 하나 밖에 없다.

여전히 나는 죽을만큼 최선을 다해 본 적이 없다. 반드시 그래야 한다.

지금의 내가 나의 최선으로 이루어진 거라면 앞으로의 삶도 크게 다르진 않을 테니까.


욕심이 많다. 이 욕심은 돈도 아니고, 사랑도 아니고, 온전히 나에 대한 욕심이다.

부족한 게 많다고 느끼는 나에 대한 결핍, 거기에서 오는 아쉬움이 가장 큰 나의 원동력.

오늘도 나는 내 욕심을 채우기 위해 최선을 향해 시간을 할애한다. 

주저리 주저리. 어떤 글을 쓸지 생각도 안하고 키보드 자판을 치다보니 어느새 여기.

지겹도록 외치던 화이팅이라는 말과 함께 글을 마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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