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윤그늘 Jun 24. 2022

회고(回顧)1

소녀의 결혼

이따금씩 뒤를 돌아본다.

특별히 어떠한 계기가 있다기보다는 그냥 그러곤 한다. 굳이 계기를 꼽자면 특정한 날씨나 특정한 문구에 전혀 상관없는 옛 기억이 불현듯 스치는 식이다. 


오늘도 같은 맥락에서였다. 짬을 내어 보던 소설 속에 '결혼식'이라는 단어 하나가 나왔을 뿐인데 괜한 기억이 끄집어졌다. 그 기억은 정확히 말하자면 기억보다는 어떠한 생각에 대한 기억이었다.


한참 돌잔치 사회를 알바로 하고 다닐 때 일이다. 

신풍역이라고 생소한 역에서 내려, 사회를 볼 장소에 도착했다. 한눈에 봐도 이전에 다녔던 곳에 비해 조금 허름한 것이 연식이 꽤 된 듯 보였다. 내부의 풍경도 별반 다르지 않았다. 인테리어 자체도 90년 중반에나 볼법한 모습이었고, 분위기 자체가 올드한 느낌이었다. 작동은 되지만 언제 어떻게 될지 모르는 불안감을 가진 빔 프로젝트가 이 모든 걸 설명해줬다. 


이곳은 돌잔치와 같은 행사와 더불어 결혼식을 하기도 하고, 그 결혼식의 피로연까지 이어서 할 수 있는 곳이었다. 이곳에 위치한 사람들은 다 그런 것은 아니었지만, 중국 분들과 조선족 분들이 꽤 많이 있다는 걸 느낄 수 있었다. 물론, 그것이 일을 하는데 어떠한 지장이 있거나 문제가 되진 않았다. 다만, 낯설었을 뿐. 행사는 그리 특별할 것이 없었다. 걱정되던 빔프로젝트는 다행히 문제를 일으키지 않았고, 사고 없이 행사는 마무리가 되었다. 그리고 무사히 집으로 돌아온 것이 다있다. 첨언하자면 이후로 그 행사장에는 내가 반고정급으로 자주 가게 되었다 정도이다. 낯설었던 것들이 서서히 눈에 익고, 그곳에서 일하는 직원 분들과는 내적 친밀감을 서서히 쌓게 되었다.


신기했던 점은 이 얘기를 엄마에게 했을 때의 일이다. 

엄마, 아빠가 결혼했던 곳이 그 행사장이라는 걸 알게 되었다. 이제 서서히 눈에 익어 익숙해진 그 공간에서 결혼식을 올렸다는 것이다. 시간이 조금 떳을 때, 그곳의 결혼식장을 한번 본 적이 있다. 앞서 말했듯 90년대 중반에 아마 많이 있지 않았을까 싶은 식장이라는 생각을 했었다. 그런데 그곳이었구나.


물론, 옛날 많은 사람들이 그랬듯 우리 부모님도 모든 일을 순서대로 진행하진 않으셨다. 쉽게 말해 결혼식은 내가 이미 태어나고, 내 동생이 태어나고 나서 몇 년이 지나서야 이루어진 셈이다. 그러니 아마 그 장소에 나도 있었을 것이다. 유치원쯤 되지 않았을까 싶다. 부모님은 당시 경제적으로 매우 힘들었던 때라고 했다. 사실 결혼식을 할 형편이 되지도 않았는데 지금이 아니면 영영 못할지도 모른다는 외할머니에 의해 어떻게 어떻게 해서 추진되어 진행이 되었다고 한다. 그 당시 부모님의 나이가 많아보야 아빠는 30대 초반에 엄마는 20대 중후반이었을 텐데, 사실상 지금의 나와 비슷하거나 더 어렸을 때이다. 이러한 얘기는 대체로 아빠는 기억하지 못하시거나, 기억하지 않으려 하시거나 둘 중 하나이기에 엄마에게 들은 얘기가 다이다. 그러다보니 몰입도 엄마에게 더 많이되곤 한다.


그 시절, 젊은 날의 엄마는 무슨 생각을 하고 있었을까.

지금의 엄마를 볼 때면, 나이만 먹었지 참으로 소녀 같다는 생각을 한다. 사소한 칭찬 한 마디에 부끄러워하면서 좋아하고, 명품이나 반짝이는 걸 좋아하면서도 빠듯한 생활고에 습관이 되어 눈을 반짝일 뿐. 사는 거 자체를 두려워 한다. 벌써 한 몇 년 전 결혼기념일이었던가. 생일이었던가. 아빠가 준 돈으로 가방을 사러 함께 백화점에 갔을 때, 엄마는 기쁘면서도 불안해했다. 적지 않은 돈이었으나, 백화점이라는 거대한 이름 앞에서는 사실 그리 큰 돈도 아니었기에 엄마는 매장에 들어가서 물건을 만지는 것조차 조심스럽기만 했다. 익히 이름을 들어본 브랜드 매장에서는 말 그대로 구경만을 했다. 사고 싶어도 살 수 없었고, 구경하는 것조차 왠지 부담이 되는 곳이었다. 그렇게 돌고 돌아 도착한 곳은 사실 잘 들어보지 못한 브랜드였다. 그래도 한 가방이 이쁘다며 이리도 들어보고, 저리도 들어보고 마음에 든다면 결제하던 모습이 눈에 선하다. 사실 그리 비싼 물건은 아니었는데... 생전 처음 사보는 가방이라며 보물이라도 되는 듯 집에 모시고 온 그 모습이 왜인지 나는 소녀 같다 느껴졌다. 여전히 순수함을 잃지 않은 자태에 괜히 슬프기도 했다.


그리고 그녀가 진짜 소녀였을 시절, 아리따운 20대의 여인이었을 시절.

나와 동생을 낳고, 겨우겨우 결혼식을 올리게 된 그곳을 발견하게 된 나는 감회가 새로울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신기한 사실이 아닌가. 난 그곳에 일하는 직원들에게 과거 이곳에서 부모님이 결혼을 하셨다는 얘길 했지만 다들 그렇구나 하고 말았다. 하긴 그럴 수밖에. 그게 뭔 대수겠는가. 이것은 오로지 나이기에 신기한 일이었다. 90년대 중반에서 나아가지 못한 인테리어가 결혼하던 그 날을 더 잘 떠올리게 만들어줬다.


결혼식 당일. 

그 날에 대한 기억은 오로지 엄마에게 밖에 의존할 수 없었기에 사실 여부는 잘 모르겠다. 하지만, 그 날도 순탄하진 않았다고 한다. 그리고 내가 겪어온 우리 가족의 삶을 돌아본다면 대다수의 엄마의 말은 틀리지 않았을 거다. 

아빠에게는 형제와 남매가 있다. 그 중에서 형들은 모두 결혼을 했지만, 모두 결혼식을 하지 못했다고 한다. 가난이라는 같은 이유에서였다. 그러니 친가 집안에서 아빠는 유일하게 결혼을 하는 아들이었다. 그래서였을까. 너무나도 기쁜 나머지 술을 좀 많이 마신 듯 하다. 당일 친가쪽 가족들은 모두 약속 시간에 나타나지 않았다. 동네 사람들을 모두 데려온 외가쪽과는 다르게 가족과 몇 명의 친구밖에 초대하지 않았던 아빠쪽 하객석은 도저히 진행할 수 없을 만큼 차지 않았다. 울며 겨자 먹기로 기다렸지만, 한참을 오지 않았고 고육지책으로 우선, 식사를 먼저 했다고 한다. 그래도 오지 않는 식구들. 주례해주시는 분이 가겠다는 걸 1시간만 더 기다려달라고 겨우겨우 사정한 끝에 다급한 모습의 친가쪽 사람들이 나타났고, 그렇게 겨우겨우 결혼식을 할 수 있었다고 한다.

엄마 말에 의하면 그래서 그 당시 결혼식 사진을 보면 다들 표정이 그리 좋지 않다고 한다. 이런 일로는 화를 잘 안 낼 것 같은 아빠도 표정이 상당히 굳었었다는 말에 아빠에게서 꽤 인간적인 면모를 느끼기도 했다. 


시작이 그랬듯, 이 글은 회고이다. 이미 오래전 행사 알바를 하면서 떠올렸던 기억 중 하나이다. 

그때, 느꼈던 감정을 회고하는 셈이다. 마지막으로 그 행사장을 찾은 날이었을 것이다. 앞으로 이곳에 오지 못할 거라는 생각에 행사가 끝나고 한참을 둘러보다 그곳을 나왔다. 그 날은 결혼식 스케줄이 없던 터라 문이 열린 채 결혼식장이 보였다. 자그만한 내부. 지금까지 다녀던 결혼식장들에 비하면 정말 작은 공간이었다. 

나서기 전, 괜히 한번 상상을 해보았다. 저곳에서 친가쪽 사람들을 기다리고 있었을 엄마, 아빠의 심정을 그리고 말은 못했어도 결혼이라는 것에 대해 굉장히 설레어했을 드레스를 입은 소녀는 어떤 하루를 보냈을까.


결혼식 사회도 꽤 다닌 터라. 식순을 잘 알고 있었다.

그 순서대로 이어지는 결혼식. 주례 선생님 말씀에 따라 진행되는 그 시간속에서 엄마는 무슨 생각을 했을까. 하고 많은 결혼식 장소 중 왜 이곳을 결혼식장으로 골랐을까. 드레스는 몇 개나 입어봤을까. 웨딩 사진을 찍을 땐, 좋았을까. 아침에 메이크업을 받으면서는 결혼을 하는구나 하고 생각을 했을까. 

왜일까. 사실 우습게도 나는 그 결혼식장 안을 들여다보면서 괜히 눈물이 나는 걸 참을 수 없었다. 

아마도 내 마음 깊숙한 곳에서 차마 상상으로 밖에 물을 수 없는 질문이 떠올라서였을 것이다.


 









매거진의 이전글 '노력'과 '재능'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