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 영천 사람 김영진

26)

by 최희철

26) 영천 사람 김영진


갑판원 김영진은 영천 사람이다. 나이는 36살 살짝 곰보였다.

곰보만 보면 옆집 삼촌이 생각났다. 북에서 피난 내려왔는데 시할머니 그리고 며느리인 할머니 그리고 아들 셋이었다. 막내가 나보다 열다섯 살 정도 많았으니 삼촌이라 불렀다. 그것도 막내 삼촌. 하지만 삼촌을 어른들은 ‘막동이’라 불렸다. 어릴 때 그런 게 좀 혼란스러웠다. 난 삼촌은 태어날 때부터 삼촌으로 태어나고 엄마, 아버지, 할아버지도 어른 그 모습 그대로 태어난다고 생각했다. 그러니까 난 늘 아이였던 것이다.

막내 삼촌은 어릴 적에 배를 엄청 곯았다고 한다. 학교 갔다 오면 밥 달라고 울면서 소리치는 일이 많아 옆집 우리 엄마도 그 소리를 여러 번 들었다고 했다. 위에 형들도 마찬가지였다. 막동이의 바로 위에 형(역시 삼촌) 일기장을 본 적이 있는데 학교에서 점심시간에 밥 먹으러 집에 오면 먹을 게 없으니 장독의 물만 한 바가지 마시고 갔다는 게 적혀 있었다. 난 어려서 몰랐었다. 할머니가 왜 밥을 안 해 놓았을까하는 정도로 생각했던 것이다. 우리 집도 가난하기는 마찬가지만 굶지는 않았다. 우리는 윗동네 제법 큰집(그래봐야 10평 남짓)에서 살다가 긴 장마 때문에 희마(일종의 불경기)가 져서 그 집 팔고 아랫동네 5평짜리로 이사 온 것이다. 당시 아버지는 유엔묘지에서 사진 찍던 ‘사진쟁이’였는데 오랜 장마 때문에 우리도 힘들었다. 그런데 거짓말처럼 윗동네에서 아랫동네로 이사를 오니 장마가 그쳤다고 했다. 어머니는 옆집 할머니 댁 지붕에 소쿠리가 있기에 보니 보리껍데기(등겨, 보리타작하고 남은)로 만든 떡들이 있어 하나 먹오 보았다고 했다. 그랬는데 할머니가 안타까운 표정을 지으시며 나오시더니

“야야 그거 많이 먹지 말라우”

세 아들의 밥이었던 것이다. 우린 그게 먹는 게 아니라 베게 속을 채우는 재료였다는데. 우리도 가난했지만 할머니 집은 정말 똥구멍이 찢어질 정도로 가난했던 것이다.

당시 그 집 할머니 나이가 50대 초반이었는데 전쟁이라는 난리 통에 남편은 어딜 가고 여자 혼자 힘으로 아들 셋, 거기다가 시어머니까지 모시고 남으로 내려왔는지 정말 놀라운 일이었다. 남편은 일제강점기 때 일본에서 대학을 나온 엘리트였는데, 공부를 잘해 대학에 간 게 아니라 유도를 잘해서 갔다고 했다. 그러니까 유도 특기생이었던 모양이다. 그곳에서 한의학을 배웠는데 해방되고는 북에서 교원생활을 하였다고 했다. 그러다 전쟁이 터지면서 인민군에 끌려(?) 갔었고 그리곤 소식이 끊겼다고 했다.

우리 할아버지, 작은 할아버지도 인민군에 끌려가기 싫어 북에서 내려왔다고 했다. 하지만 당신들이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나 ‘조선노동당’을 욕하는 것은 한 번도 듣질 못했다. 당신들은 그저 전쟁터에 나가 죽기 싫었던 것이다. 단 우리 아버지는 이유를 잘 모르겠지만 인민군에 들어가려고 했다고 한다. 그런데 18살이라 나이가 어리다고 징집 담당자가 집으로 돌아가라 했다는데 사실은 나이 때문이 아니라 당신의 심한 말더듬 때문이었다고 한다. 당신을 닮아 나도 고등학교 다닐 때까지 말더듬이였다. 그게 심한 콤플렉스로 작동했다. 내가 고등학교 때부터 글 쓰는 것에 대한 관심을 갖고 실제로도 글을 쓰기 시작한 것은 말더듬과 상관이 있었을 것이다.

우리 아버지 집을 보면 이상한 게 많다. 할아버지 형제는 모두 4명인데 그때 인민군에서 끌고 가려고 가장 눈독을 들였던 사람은 둘째 할아버지였다고 한다. 당신은 당시 천도교 청우당 군민위원이었다. 그리고 그 끌려감에 가장 심하게 저항했던 사람도 당신이었다고 한다. 당신은 끌려갔다가 훈련도중 도망을 쳐서 집으로 숨어들어와 천정 위에 한동안 숨어 있었는데, 도저히 안 되겠다 싶어 집 뒤에 있는 동굴에서 장기간 숨어 지냈다고 했다. 집에서는 밥을 해다가 동굴로 날랐다고 했다. 그곳에 둘째 할아버지뿐 아니라 동네 남자들이 제법 많았고 다른 집에서도 그렇게 했다고 한다. 우리의 다른 할아버지들은 그냥 집에서 처분만 기다리는 수준이었다고 했다. 결국 동굴에 피신해 있는 둘째 할아버지는 체포 되었고 기피자들끼리 엄지손가락이 묶인 채로 끌려가는 도중 야음을 틈 타 행렬에서 또 다시 도주했다고 했다. 그리곤 다시 집으로 숨어들어 지냈다고 했다. 둘째 할아버지 때문에 집안 전체의 위협을 느낀 우리 할아버지(첫째)와 아버지(아버지는 둘째 할아버지 즉 삼촌을 좋아해서) 그리고 증조할아버지 집안의 큰 아들(우리에겐 6촌 큰 아버지) 큰 아버지가 흥남부두에서 배를 타게 되었다고 했다. 그리고 막내 할아버지는 나중에 인민군에 끌려가 철원에서 총 한 번 쏘아 보지 못하고 포로가 되었는데, 포로 교환할 때 북으로 가지 않고 남에 남아 서울 미아리에 살게 되었다고 했다. 수용소에 있을 때 고향 사람을 만났는데 셋째 할아버지가 반동 집안이라고 총살당했다는 소문을 들었기 때문이라고 했다.

둘째 할아버지는 북에 딸이 있다고 했다. 그래서 남쪽의 자식들이 이산가족상봉 같은 것을 할 때 신청하려고 했으나 당신은 극구 반대를 하셨다고 한다. 지금 생각하면 그 이유를 알 수 있을 것도 같다.

우리도 ‘군대 끌려간다’고 표현하지 않는가. ‘특례보충역’으로 5년간 원양어선을 타는 이유 중엔 아마 군에 끌려가기 싫어서인 사람도 있을 것이다. 나 또한 그렇다. 전쟁 통에 자신의 신념에 따라 국방군이든 인민군이든 들어간 사람이 얼마나 될까? 그런데 우리 아버지는 남에서 군대에 들어가 5년간을 복무하고 하사로 제대하였다. 당신의 입장에서 보면 소원(?) 성취를 한 셈이다.

김영진을 보면 곰보 자국 때문에 막내 삼촌이 생각났다. 그리고 떠오른 게 천연두였다. 곰보가 천연두 후유증 때문에 생긴 것이라는 말을 들었기 때문이다. 천연두에 걸리면 죽거나 아니면 겨우 살아날 수 있었는데 그 대가가 곰보였던 것이다. 그는 여기서 돈 벌어 가면 이번엔 꼭 장가갈 거라고 습관처럼 말했다.

그 날은 유난히 가오리가 많이 올라왔었다. 가오리는 제품을 만들지 않기에 전량 렛고 시킨다. 다만 가오리 덩치가 너무 커서 처리실 렛고 구멍으론 렛고 시킬 수는 없었다. 모두 피시본드 문을 열고 데끼로 올려 선미 슬립웨이로 렛고를 시켜야 했다. 그런데 가오리의 크기가 보통이 아니었다. 가로 폭이 2미터쯤 되는 것도 많았다. 직접 재어 보진 않았지만 무게가 적어도 쌀 반가마니 이상은 되었을 것이다. 가오리를 피시본드에서 데끼로 올릴 때도 사람 힘으로 올리는 게 아니라 카고 윈치로 올렸다. 데끼에서 선미로 렛고 시킬 때도 마찬가지다. 후크 중에 ‘렛고 후크’라는 게 있다. 후크에 가오리 입 부위를 걸고 서서히 당기면 가오리가 슬립웨이까지 끌려간다. 그리고 가오리가 슬립웨이에 대롱대롱 매달려 있으면 후크 뒤(그 뒤에 작은 구멍이 있고 그곳에 로프로 연결 시켜 그걸 당기면 후크가 가오리에서 벗겨지게 되어 있음)에 연결된 로프를 당기는 방식이었다. 그러면 가오리는 슬립웨이에 떨어지면서 바다로 흘러 내려가는 것이었다.

그런데 그날의 가오리가 너무 컸던 것인가 아니면 후크 끝이 가오리 입에 너무 깊이 박힌 것인가, 슬립웨이에 대롱대롱 매달려 있던 가오리는 바다로 떨어지지 않고 상하로 출렁거리고 있었다. 문제는 김영진의 손 아니 손가락이었다. 그는 자신도 모르게 단단히 잡을 요량으로 로프를 손에다가 두어 번 돌려 감았던 것이다. 어선에서 로프를 잡을 때 그냥 손바닥으로 잡아야지 단단하게 잡기 위해 손목, 손, 손가락에 감는 것은 절대 금물이다. 더구나 그의 손은 그냥 손이 아니었다. 안에 면장갑을 끼고 그 위에 데끼용 고무장갑(표면에 마찰력을 강하게 하려고 고무재질의 바깥 면을 울퉁불퉁 즉 거칠게 만든)을 꼈던 것이다. 그러니까 손과 면장갑 그리고 작업용 고무장갑이 중층적으로 압착(壓搾) 결합되어 마찰력을 높였을 것이고 그 위에 마찰력 높은 로프(로프는 오래 사용하면 실이 풀려나와 파단력은 약해지지만 표면의 마찰력은 높아진다)를 두 번이나 감았던 것이다. 가오리가 한 번 만에 떨어졌다면 그런 마찰력들이 좋은 효과를 발휘하였을 것이나 가오리는 바다로 떨어지지 않고 육중한 무게 때문에 로프에 강한 장력을 아니 출렁거리면서 더 강한 장력을 미쳤던 것이다. 결국 몇 번만에 가오리는 바다로 떨어졌지만 김연진이 장갑들도 로프에 쫄리면서 장갑들과 함께 가오리가 떨어지는 방향으로 떨어져 버렸던 것이다. 장갑들만 떨어졌으면 다행인데 면장갑도 강하게 쫄리면서 그의 손가락 두 개를 갖고 가 버린 것이다.

김영진을 고통스러운 소리를 치면서 오른손을 움켜쥐고 뛰었다. 순간적이지만 엄청난 고통이었을 것이다. 나중에 보니 세 번째 네 번째 손가락 두 마디의 껍질이 벗겨져 버리고 두 손가락의 두 마디가 부러져 장갑과 함께 딸려 나가 버렸다. K808호에서 치료하기 어려울 것 같았다. 같은 선단에 긴급 상황을 알리니까 오로라에서 봉합이 가능하다고 했다. 바로 접선을 시도했다. 오로라로 넘어가기 전 김영진은 진통제를 맞아서 그런지 안정을 좀 찾은 것 같았다.

오로라 선장은 선단장이었다. 오로라 국장이 봉합 경험이 있다고 해서 일단 봉합 수술하기로 하였다. 난 의사가 아닌 사람이 수술하는 것을 처음 보았다. 마취제를 놓기 전에 마취 쇼크 방지제를 맞아야 한다면서 김영진의 엉덩이를 깠다. 환자의 긴장을 풀어 주려고 했던지 오로라 선장이 웃으면서 말했다.

“오입 좀 해 봤어?”

“오입은 무신 아직 총각입니더”

“야이 이 친구 오입은 총각 때 하는 거여”

오입을 많이 하게 되면 성병에 걸릴 확률이 높고, 성병이 걸렸다면 항생제주사 같은 것은 한 번쯤 맞아 본 경험이 있었을 거라는 추측 때문이다.

뼈가 부러져도 참 묘한 지점에서 부러져 버렸다. 차라리 좀 더 부러졌으면 피부 봉합하기가 훨씬 수월했을 것인데 뼈가 삐죽이 튀어 나와 피부로 남은 부위를 감싸기에 모자랐던 것이다. 그래도 어찌어찌 봉합을 하고 또 항생제 주사도 맞았다. 그리고 K808호로 넘어 와서는 거의 매일 강철 3항사가 항생제 주사를 놓았다. 선장은 책임감 때문인지 그를 집으로 보낸다는 생각은 하지 않았다. 봉합했으니 아물기만 하면 우리와 같이 계약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갈 거라는 생각을 한 것이다. 김영진은 장가도 못 갔는데 손가락까지 이렇게 되어 정말 암담한 심정이 든다고 말했다. 고향 어머니가 생각난다면서 내가 이러려고 이곳까지 왔을까를 연발하면서 울기도 했다.

한 달 후 상처가 덧나는 바람에 K808호에서의 치료만으론 완치가 어렵다는 판단이 내려졌다. 그래서 입항하는 다른 배로 무스카트에 가서 치료를 하고 돌아왔다. 하지만 그래도 그의 상처는 쉽게 낫지 않았다. 초기 대응이 늦어 버렸던 것이다. 그래서 결국 집으로 돌아가게 되었다. 집으로 돌아 간 뒤 한국에서 치료가 잘 되었다고 연락이 왔다. 하지만 두 손가락은 모두 잘랐다고 했다. 나중에 보니 최대한 빨리 한국으로 보내는 게 가장 좋은 방법이었다는 걸 알게 되었다. 적어도 정형외과 부문에선 오만과 한국은 비교 될 수 없었던 것이다. 무척 장가를 가고 싶어 했던 김영진. 장가는 갔는지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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