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망상 클럽 13>

점의 세계관

by 최희철

<망상 클럽 13>



점(占)의 세계관


가끔 점(占)도 ‘철학’이냐고 묻는 사람이 있다. 점 역시 철학이다. 왜냐하면 어떤 분기점에서 이루어지는 게 점이기 때문이다. 철학 역시 그렇다. 철학은 현상세계를 불확실하다고 여기기에 생긴 것이다. 그래서 철학은 일반을 넘어 보편을 추구한다. 점 역시 그렇다. 가령 어떤 일을 하려고 할 때 미래가 확실하다면 점을 보려고 하지 않을 것이다. 그렇다면 미래가 확실해도 점을 보는 사람은 어떤가? 그것은 확실성을 한 번 더 확인하려는 것으로 결국 확실성을 위한 것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더불어 점과 철학은 불교의 반야바라밀(般若波羅蜜)과도 비슷하다. 진리를 욕망하는 것 말이다. 욕망이 사라지지 않는 한 반야바라밀, 철학은 물론 점도 사라지지 않는다.


점의 세계에서 통용되는 언어의 특징을 보자. 점을 보고 난 뒤 100% 맞다 하는 경우가 있다. 하지만 이때 ‘맞다’의 의미는 점의 세계가 던지는 언어와 자신의 상황이 딱 맞아 떨어지는 ‘1:1’ 대응이 아니라는 걸 알아야 한다. 그걸 ‘1:1’ 대응으로 보는 것은 점의 언어를 잘못 이해한 것이다. 그것도 넓은 의미에서 ‘맞다’고 말할 순 있겠지만 ‘1:1’은 아니다.



총으로 이야기하자면 점의 언어는 한 발의 탄환이 나가는 게 아니라 ‘산탄(散彈)’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산탄총은 날아가는 새를 잡기 위해 만들어진 것이라고 한다. 그럼 왜 점의 언어는 한 발이 아니라 산탄일까? 점을 보는 사람의 삶이 날아가는 새와 같은 어떤 ‘운동성’이기 때문이다. 바위 위에 놓여 진 깡통 따위를 맞추기 위해서라면 산탄총은 필요 없을 것이다.



그럼 점의 언어가 부정확하거나 틀렸단 말인가? 그건 아니다. 점의 언어가 본래 그렇다는 것이다. 그걸 근대 수리학적 관점으로 받아들이려는 게 문제라는 말이다. 그렇게 받아들이려고 하는 게 점(占)보는 사람의 심리인진 모르겠지만.


강에서 낚시를 드리우는 게 아니라 투망을 던지는 것과 같다. 투망을 던지면 낚시보다 더 많은 물고기가 잡힐 것이다. 하지만 잡힌 물고기 입장에서 보면 둘 다 자신은 잡힌 게 된다. 점을 보는 사람의 심리가 그렇다. 비록 점의 언어에 포획된 게 맞지만, 그 포획이 낚시 바늘 하나를 문 상태와 같은 것은 아니라는 말이다.


샤머니즘에서 바위에 절할 때도 그와 같다. 바위의 영성과 자신의 영성이 만나는 것인데 그것 역시 ‘1:1’ 대응의 만남이 아니다. 우리가 너무 근대 수리학적 관점에 매몰되어 있어 늘 그런 관점을 옳은 것으로 여기는 경향이 있다. 점이 맞다 혹은 맞지 않다는 관점으로 보는 게 바로 그것이다. 맞추면 용한 사람이고 못 맞추면 용하지 않다고 여기는 것 말이다.


그러면 점의 언어는 어떤 것이라고 해야 할까? 점의 언어는 기표(記標)적 언어라기보다 ‘정보(情報)적 흐름’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다른 말로 하면 ‘액체성’이다. 여기서 액체성이란 흐름이 한 방향으로의 일방적 흐름이 아니라는 걸 말한다. 이른바 ‘비과학적’이다. 그런데 우린 ‘비과학적’이라고 하면 좋지 못한 것으로 여긴다. 하지만 세상엔 온통 비과학적인 것들 천지이고 아주 특수한 규정 속에서만 ‘과학적’인 게 존재할 수 있다.

점이 비과학적이라는 말은 ‘흐름’이 쌍방향 혹은 방향성이 다양하다는 말이다. 점을 봐 주는 사람과 점을 보는 사람이 함께 ‘감응(感應)’한다는 것이다. 점을 봐 주는 사람이 있고 그의 외부에 객관적 대상으로서 점을 보는 사람이 있는 게 아니라는 말이다.


그러므로 점은 내부에서 외부를 진단하는 ‘과학적’ 관점이 될 수 없다. 내재적(內在的)이라는 말이다. 점을 보는 사람과 점을 봐 주는 사람의 운명이 함께 공명(共鳴)하는 세계가 점의 세계라는 말이다. 그때 사용되는 언어가 바로 ‘정보적 흐름’ 즉 ‘액체성’의 언어라는 말이다. 그러므로 결국 점 역시 ‘삶의 기술’ 중 하나라고 해야 할 것이다.

목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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