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아버지들
<어느 베르그송주의자의 회상-8>
할아버지 그리고 외할아버지
외할아버지(부채 드신 분)와 할아버지, 외할아버지는 ‘전남 고흥군 녹동읍 신정부락’에서 오셨고 할아버지는 ‘함남 신흥군 하원천면 흥덕리’ 출신이시다.
부산 남구 감만동 해안을 ‘적기(赤岐)’라 부르고 그곳에 ‘모리구치(もりぐち)’라는 해수욕장이 있었다. 우린 그곳에서 여름 장사를 했었다(기억으론 1970년까지). 수영복이나 부기(우끼, うき [浮き], 튜브), 평상(平床), 파라솔 등을 대여해 주거나 각종 술과 음식을 팔았던 것이데, 팔다 남은 아나고(붕장어) 회는 다음날 아침 초장과 함께 밥이나 국수를 비벼먹던 생각이 난다.
우암동을 경유해서 감만동 가는 ‘마이크로버스’가 있었고 감만동 종점에서 내려 해수욕장까지는 한참을 걸어야 했다. 장사를 마치고 집으로 갈 때는 종점에서 타게 되므로 맨 뒤 좌석은 늘 나와 동생의 차지였다. 우린 그곳에 드러누워 ‘비포장도로’ 위에서 덜컹거리는 버스의 진동을 깔깔거리며 즐겼다.
어머니는 일본 나고야에서 태어나셨다. 이름이 ‘후지꼬’인가? 당시 초등학교 2학년에 해방이 되어 외가(外家)인 전라남도 고흥군 녹동으로 왔다고 한다. 처음 돌아왔을 때는 식구 모두가 일본말 밖에 몰라 외출하기도 두렵고 어려웠다고 했다. 지금은 이름 이외에 일본말을 하나도 모르시지만 외할아버지는 해방이 되고도 일본에 받을 돈(노가다 임금과 주변에 빌려 준 돈 때문에) 때문에 몇 달을 더 있다가 오셨다고 했다.
외할아버지는 일본에 살던 시절이 그리웠던지 가끔 술에 취하시면 자식들을 일본 이름으로 부르면서 추억에 잠기곤 하셨다. 자신의 입장에서 보면 자신이 살던 터전이 바뀐 것이다. 스스로가 아니라 누군가에 의해서 인데 그건 바로 국가였다.
난 국가를 믿지 않을 뿐 아니라 경계하는 편이다. 국가는 오래전부터 인민을 도륙한 역사를 갖고 있기 때문이다.